우리는 더불어 살 수 있을까

이번글은 쓰기 무서운 글이다.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가족끼리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회의 스트레스와 피로도, 분열이 극에 달한 이 때에 (코로나에 미중 갈등, 인종갈등, 미국 11월 대선 등) 이런 글을 쓴다는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직접적인 정치 포스팅은 2017년에 쓴 한국현대사 70년에 붙여 이후 3년만이 아닐까. 용기를 내어본다. 부디 이 글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울림이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의 첫번째 독자는 크리스천이고, 두번째 독자는 정치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고, 세번째 독자는 이시대를 사는 한국인 모두이다. 내 가족과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써봤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모두가 공동체로서, 서로 사랑하고 위하고 아끼며, 함께사는 법을 계속 배워가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우리는 과연 무언가에 동의할 수 있을까?

요샌 친구들과 연락도 안하고 할말도 없어. 코로나로 가뜩이나 만나는게 부담이 된 상황인데다가, 온라인으로 캐첩해도 서로 조심해서 할말도 없어. 워낙 모두가 극도로 예민한 상황이니, 정치적 견해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고 해서, 그런 이야기는 서로 자제하고. 또 삶에서 재밌는게 없으니 할말도 없고. 그래서 갈수록 연락하는 사람도 없어지는 것 같아.

위의 말은 엊그제 만난 미국친구가 한 말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극도로 사회가 분열되고 예민해지긴 마찬가지다. 모두가 고립되어 있어 스트레스가 높고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는 소셜미디어와 언론의 영향을 받다 보니 갈수록 이런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과연 우리는 무언가에 동의할 수 있을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서로 사랑하고 연합될 수 있을까? 몇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사실 요샌 분열되는 이슈가 너무 많아서 예를 들자면 끝없이 들 수 있을것 같다)

1 조국사태

친조국: 진보의 지식인 주진형 – 필자가 진보의 지식인으로서 존경하고 팔로우 하고 있는 분이다 (물론 모든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민정수석비서관이던 조국씨를 법무부장관 후보로 지명한 게 작년 8월 9일이다. 언론에 의한 의혹 제기가 시작된 것은 8월 중순부터이다. 조국씨가 마라톤 기자 간담회를 했던 것은 9월 2일, 청문회는 9월 6일이다. 바로 딱 1년 전 지금이다. 정확히 1년 전 같은 날자에 언론이 무슨 헛소리를 하고 다녔는지, 그리고 거기에 사람들이 각자 어떤 반응들을 보였는지를 날자 별로 매일 매일 보여주는 서비스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페이스 북이나 유투브 방송에서 일주일 별로 모아서 바로 작년 그 주에 언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었는지를 상기해주면 어떨까? 그러면 당시 언론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굴었는지, 그리고 당시 어떤 언론사가, 그리고 기자들 중에선 누가, 어떤 분탕질에 앞장 섰는지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원하면 요즘은 그가 무슨 기사를 쓰고 다니는 지도 검색해서 알 수 있다. 한국 언론의 가장 큰 특징은 이들이 사회의 분열을 주도하고 갈등을 증폭시킨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작년 조국 사태 때만큼, 그리고 올해 봄 코로나 사태만큼 극명히 드러난 적도 없다. 지나간 아픈 상처를 다시 들쑤시는 건가? 나는 70년 전에 때를 놓친 친일 청산을 갖고 얘기하는 것보단 작년에 시작해서 지금도 진행중인 조국사태를 갖고 악덕언론 청산을 하는 게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반조국: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 서민교수: 잘나가는 조국 흑서 – 서민교수는 박근혜탄핵에 앞장섰고 문재인 정부 집권을 지지한 진보고객이자 노사모 초기 회원이라고 한다.

“내가 책을 낸 것은 조국 전 장관 덕분이다. 다른 필자들이 문재인 정부와 등돌린 것도 조국때문이다. 아내는 구속되고 자산관리인 김경록씨도 재판에 불려다니고, 저와 같은 대학에 있는 교수도 조국 딸을 논문 1저자로 올려줬다며 곤욕을 치렀다. 저같으면 좀 미안한 마음이라도 가질 텐데, 이 분은 법정에 출두할 때 늘 정의로운 십자군같은 느낌을 준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주역이라는 최순실도 공항에 들어오면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는데, 조 전 장관은 미안한 기색이 없다. 이런 사람을 장관에 앉히고 ‘마음의 빚’운운한 대통령이나 감싸고 도는 문빠들을 그냥 둘 수없었다.”

“조국일가가 투자한 사모펀드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입시 비리보다 훨씬 나쁜 비리가 사모펀드다. 서울 버스 와이파이나 2차전지 사업 같은 건 한탕 해먹으려고 한 것이다. 사람 죽이려다 미수에 그친 것도 범죄 아닌가. 이 정부 고위공직자 198명 중 조 전장관만 왜 유일하게 사모펀드를 했을까, 조국씨가 이 펀드가 어디에 투자했는지 모른다고 했는데, 거짓말한 증거가 속속 드러나지 않았나.”

2 전광훈과 태극기 부대

친 전광훈&태극기: 김진홍 목사가 본 전광훈과 광화문 세력 – 장로교 목사이자 사회운동가 (71년 활빈교회를 설립하고 빈민선교와 사회사업을 펼침, 74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시위 주도하고 옥고 치룸, 청계천 거주민들과 함께 경기도 남양만으로 집단 이주, 두레공동체를 설립하고. 지금은 자유우파적인 행보를 보이는 중 (위키피디아 참고). 아래 영상에서 이들의 정신과 마음에는 동의하지만 전략적 실패를 지적하는 말씀을 하셨다.

총선기간 보수기독교계의 역할에 대해 비판해 본다면?

전광훈 목사가 소교단 소속이고 말이 거친바가 있고 깔끔하지 못한 언어구사를 했지만은 그 사람은 애국자다. 열정이 있고. 광화문에 모인 몇십만명의 크리스천들은 나라걱정하는 진실된 크리스천들이다. 그 점을 위해하고 거교회적으로서 뒤를 밀어줬어야 하지 않나.

기독자유통일당과 세력은 두가지 큰 과오를 범했다고 본다. 하나는 어떤 이유든 당을 만든것 – 광화문 세력이 나라를 위한게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가진게 아닌가 라는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 두번째는 예배를 강행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것. 이 두가지가 전략적으로 실패한 부분이다.

반 전광훈&태극기: 정의당원으로 활동하고 옥바라지 선교회에서 활동하는 20대 여성 하민지님의 글 – 진보적인 다음세대 크리스천의 마음을 이렇게 잘 대변해주는 글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명문이다. (좀 길고 안타깝고 해명하고 싶은 부분도 있지만 (특히 교회의 주술성에 대한 언급부분)지만 곱씹어볼만한 포인트가 많다.)

1. 한국 교회에 대한 애정이 딱히 없다. 교회에 다니며 가족 위해 기도하는 평범한 사람에게 애정이 있다.

2.첫 차 타고 출근한 적이 있다. 새벽 4시 20분에 오는 버스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탔는데 만원 버스였다. 버스 안에 앉은 사람은 전부 노인이었다. 이들이 이 새벽에 전부 어딜 가는 건지. 등산하러 가는 건가 했지만 옷 차림이 등산 차림이 아니었다. 새벽 일찍 일감 얻으러 어딘가 가시는 건가 하면서 버스 타는 40분 내내 서서 갔다. 의문은 ‘여의도순복음교회’ 정류장에서 풀렸다. 버스 안 노인은 그 정류장에서 모두 내렸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새벽 기도회 가시는 거였구나.

3.우리 부모님을 보고 추측하자면 교회는 노년층에게 종합 엔터테인먼트이자 주술성을 기반으로 한 도시 공동체 같은 공간이다.

아빠는 매우 소심한 사람이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 함부로 행동해도 언성을 높이는 적이 없다. 한번은 온 가족이 어떤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반찬에서 죽은 바퀴벌레가 나왔다. 엄마와 나, 동생은 경악을 했는데 아빠는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다며, 모르고 먹으면 약이라며 식당 주인에게 따지지 말라 했다. 아빠는 젊은 시절에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아내와 자녀에게 풀었다. 가족에겐 함부로 하고 남에게만 한없이 자상한 아빠가 싫었지만 어쨌거나 밖에선 “네네 아이고 제가 부족하고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제가 미안합니다”하는 사람이다. 아빠는 나이들수록 점점 작아져 갔다. 이젠 키도 나보다 작고 몸무게도 적다. 집에선 아무렇게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손을 올리는 폭군이었는데 나이들수록 “그래 괘안타 아이다”만 얘기하는 사람이 돼 갔다. 엄마가 뭐라고 하면 “알겠어요” “여보가 하라는 대로 할게요”라고 말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엄마는 아빠가 변해서 좋지만서도 자꾸 위축되는 것 같아 초라하고 안쓰럽다고 했다. 젊은 시절, 가부장의 폭력을 견딘 여성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아빠는 교회 때문에 변한 것 같다. 아빠는 교회에서 운영한 ‘아버지 학교’라는 프로그램에 참석했다고 한다. 프로그램의 내용을 정확히 모르지만, 엄마 말에 따르면 아빠가 교회에서 엄마를 향해 손편지를 써왔다고 한다. 내용인즉, 젊은 시절에 이쁜 우리 마누라를 때리고, 함부로 하고, 어쩌구 저쩌구 회개합니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평생 잘하겠습니다, 마누라 사랑합니다 등이었다고 한다. 엄마는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다며 신기해 했다.

변한 아빠는 교회에서 전화가 오면 한밤중에라도 달려간다. 아빠는 고물상을 20년 넘게 운영한 경력으로 세탁기, TV 등 못 고치는 게 없다. 1993년에 산 헤어 드라이기를 아직도 고쳐서 쓰실 정도다. 교회는 그런 아빠를 자주 부른다. 하 집사님, 전등이 나갔어요, 불이 안 들어오네요, 본당 엠프가 안 켜지네요, 에어콘에서 물이 떨어지네요, 등등 교회에서 조금이라도 앓는 소리가 나면 쏜살같이 달려가 해결한다.

아빠는 “하 집사님”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는 듯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빠 성격이 소심하다보니 아빠는 한참 어린 동생들한테도 무시당하고 집에 와서 혼자 화내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교회에서 환대받고, 집사님이라고 치켜세워지니까 행복하신 듯했다. 그리고 교회라는 공동체에 무리 없이 스며들기 위해 교회 전반에 깔려 있는 사랑과 친절과 회개의 정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 하시는 것 같았다. 엄마를 향한 손편지도 거기서 나오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1년에 두어번, 부모님이 출석하는 교회에 간다. 아빠는 “예 목삿님, 우리 딸래미가 왔네요, 에이 아입니다 즈그 엄마 닮아가 이뿌지요, 내 안 닮았습니다. 우리 딸 그냥 평범하게 삽니다. 인천서 대학 나와가지고 스울서 한양 박사 하고(아빠 나 석사 수룐데..), 지금 어디가면 작가님, 기자님 소리 듣고 삽니다. 에이 아입니다 평범하지요. 이만치도 안 하고 사는 젊은 아(아이)들이 어데 있습니까. 아입니다” 한다. 누가 봐도 자랑인데 자랑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한다.

재미있는 것은 나를 그렇게 소개하면서 자신이 바라는 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우리 딸이 이쁘고 똘똘하고 다 좋은데 체력이 약해가 걱정입니다. 스울 사는 넥타이 부대들이 다 그렇듯이(아빠는 여성인 내가 넥타이 부대, 즉 서울 사는 직장인의 지위를 성취한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앉아서 글만 쓰고 책만 들따 보다 보이, 몸도 마이 상하고 그라지요. 그리고 우리 딸이 인자 시집도 좀 가고 해야 되는데, 원체 똘똘해가 웬만한 머스마들은 씅에 안 차고 그라나 봅니다(음 그렇게 알고 계시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 딸 근강하게 해주시라고, 배우자도 좋은 놈 만나게 해주시라고 날이면 날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끝나고 나면 오늘 초면인 교회 어른들이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기도 중의 기도는 역시 목사님 기도다. 온갖 교회 어른의 기도를 받는 퀘스트를 거치고 나면 최종 퀘스트인 목사님 기도가 남아있다. 목사님이 내 정수리에 얹은 손의 온기를 느끼면서 조신하게 두 손 모으고 눈 감고 있으면 아빠는 진짜로 내 체력이 풀피가 되고 금방이라도 훌륭한 사윗감이 나타날 것처럼 싱글벙글해진다.

이렇게 교회라는 공동체는 주술성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누구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기도와 환대를 아끼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게 이뤄질 거라고 확신한다. 이 맹목적인 희망이 작은 도시의 노인을 묶는 강한 끈인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교회 내 엔터테인먼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다. 페북에 여러 번 써서 내 페친은 많이들 알겠지만 엄마는 성악가가 꿈이었다. 여성이 대학에 가는 게 놀라운 일이었던 시절, 엄마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대학에 원서를 냈고 실기 시험 보고 성악과에 합격했다. 물론 집안에서 여자는 대학 가는 거 아니라고, 자퇴하라고 종용해 세 학기만 다니고 자퇴당했지만.

엄마는 현재 경상도의 한 작은 도시에서 4개의 지역 합창단에 소속돼 있다. 당연히 교회 성가대에서도 활동한다. 자신이 가진 탤런트로 하나님을 드높이는 일을 하는 게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하지만 엄마가 노래를 하는 건 하나님을 드높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결국 자아 실현을 위해서다. 한번은 교회에서 찬양 대회였나 뭐였나, 아무튼 노래 관련 큰 행사를 했는데 엄마는 소프라노 자리를 꿰차고 싶어했다. 합창을 잘 모르지만 엄마 말에 따르면 소프라노는 가장 화려하고, 가장 주목받고, 가장 노래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다. 엄마는 당당히 소프라노에 발탁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소프라노는 다른 아줌마가 차지했다. 엄마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이유인즉, 자신은 2030대를 스울서 보낸 스울 사람인데, 졸업 못했지만 대학도 다녔는데, 나는 평생 노래만 듣고 살았는데, IMF 때 단칸방 이사해도 이탈리아 가곡 LP판은 절대 버리지 않고 꾸역꾸역 싸들고 다녔는데, 노래라고는 개똥만큼도 모르는 저년이 뭔데, 저년이 뭐라고 소프라노를 차지하다니.

엄마는 그날로 금연을 시작했다. 보건소에 가서 금연껌을 받아와 질겅질겅 씹었다. 그러더니 유튜브와 네이버를 검색해 서울서 제일 잘한다는 이비인후과를 찾아 성대결절 수술도 했다. 유튜브를 보면서 밤낮으로 발성 연습을 했다. 그 다음해 합창대회에선 소프라노 자리를 되찾았다. 엄마는 기뻐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고운 찬양을 올리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하나님이 알아주신 거라고 했다. 이후에도 노래를 향한 열정을 잃지 않고 매일 노래하시는 중이다.이외에도 교회에서는 무슨 퀴즈대회, 야유회, 전 교인 친목대회, 전도대회 등 자식을 서울로 보낸 노년층이 즐길 수 있는 많은 놀거리가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의 모든 행사에 참석하며 즐거워 했다.

4.우리 부모님을 토대로 추측하자면, 60대에게 놀거리와 즐길거리가 너무 없다. 어떤 사람들은 트로트 열풍의 주역이 오팔세대라고, MZ세대급 신흥 소비층이라고도 하지만 그것도 서울 중산층 이상의 얘기다. 지역에 사는 저소득층 60대에게 유일한 즐길거리는 TV, 놀거리는 산책이다. 이 두 가지에선 사람을 만나 교감하기 어렵다. TV에는 잘 모르는 유행어들이 나와 이해가 안 되고 산책을 하자니 마스크는 답답하다. 여전히 스마트폰은 어려운 물건이다. 1년에 두어 번 오는 자식이 한게임 맞고나 포커를 깔아줘야 스마트폰의 유용함을 겨우 깨닫는다.

5.나는 한국 교회에 대해 별 애정이 없지만, 부모님이 교회에 다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인생이 조금 더 즐거울 수 있으니까. 밖에선 “하 씨”이지만 교회 가면 “하 집사”다. 밖에서야 엄마가 노래를 잘하든 말든 관심도 없지만 교회에선 가수다. 이렇게 즐겁고 대접받는 공간에서 자식을 위해 기도도 할 수 있다.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나와 동생 이름으로 매주 감사헌금을 하신다. 그래서 교회 사람들이 내 얼굴은 몰라도 내 이름은 다 안다.

6.광화문에 운집한 수만 명을 봤다. 저들에게서 우리 부모의 얼굴을 본다. 교회가 삶의 탈출구, 해방구가 된 이들에게 교회의 명령은 곧 법이다. 교회에서 전화가 오면 자다가도 뛰어나가는 우리 아빠가 그랬듯이 말이다. 전광훈은 정부의 방역 지침을 어기고 기어이 집회를 열었다. 교회의 명령을 어길 수 없고, 교회 말을 따르는 게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을 따르는 게 내 자식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집회로 몰려갔다.

7.노년층을 대상화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광훈이 이번에 집회 안 한다고 했으면 그들은 안 모였을 수도 있다. 교회의 말을 법 같이 따르는 이들이기 때문에 목사의 말을 믿고 다음을 도모했을 수도 있다.

8.지난 3월 기준, 코로나19 사망자의 약 99.8%가 50대 이상이다. 치명률은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올라간다. 60대 1.75%, 70대 6.49%, 80대 16.2%다. 80대의 경우 코로나19에 감염되면 7명 중 1명은 죽는다.

9.그리고 전광훈 목사가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 뉴스를 보는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교회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따르는 우리 부모님 같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전염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냥 허탈하다. 무엇보다 그들은 노년층이 대부분이다. 노년층 치명률을 쳐다 보니 섬뜩하다.

10.나는 사실 극우 개신교가 외치는 말들, 이를테면 “이대로 가다간 대한민국 공산화된다” “문재인 빨갱이” 같은 말들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 잘은 모르겠다. 그들이 뭐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공포심을 내비치는지도 알 수 없다. 기이할 정도로 충성스럽고 맹목적인 애국심도 어디서 온 건지 모른다. 그저 7080 반공 국가, 독재 정권의 망령이 아닌지 추측할 뿐이다. 빨갱이를 몰아내면 대한민국 지킨다는 말처럼 주술적인 말도 없을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논리도 없고 실체 없는 희망만 가득한 말이다. 이 주술성이 무속신앙처럼 돼버린 한국 개신교와 맞물려 반공 정서가 한국 개신교를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가 짐작한다.그럼에도 이 시국에 방역 당국의 지침을 거스르고 집회를 열어 주술적인 말을 쏟아내야 할 이유와 목적이 있었을까. 전광훈은 매 집회 때마다 헌금을 현금으로 걷는데 그 때문이었을까. 좀 속되게 말하면, 815 집회가 ‘대목’이라 피할 수 없었던 걸까.11.전광훈은 확진돼 치료에 들어갔다. 전광훈을 따른 수만 명의 사람들은 감염 위기에 처했고 어떤 사람은 핸드폰 버리고 도망 갔다고 한다. 전광훈이 집회를 기어이 연 배경에 어떤 야욕이 있는지 단언하긴 어렵다. 빨갱이 몰아내고 대한민국 지키기 위해선지, 문재인 대통령을 성토하기 위해선지, 헌금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허나 중요한 건, 교회에 다니며 가족 위해 기도하며 당장 나 먹고 살 돈은 없어도 자식 이름으로 헌금하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가난하고 나이 든 사람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이웃들도. 이 생각을 하면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정치적 옳고 그름은 차선책(Sub optimal)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삶을 다스리는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 (정치)를 다루는데 있어서,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용납하자는 이야기냐? 그런 한가한 이야기 할 시간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충분히 일리있는 지적이다. 여기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첫번째 말은 (특히나 크리스천 들에게), 정치적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은 최선이 아닌 차선책 (Sub optimal)일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앞선 글 –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장기전에서 쉽게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 프레이밍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뤘기에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잠깐 머신러닝 이야기를 해보겠다 (필자가 머신러닝 회사에 다니는 만큼). 우리 회사는 모바일 광고를 머신러닝 모델을 통해 제공하는 회사이다. 광고주의 목표에 따라 다양한 모델을 쓰는데, 크게는 인스톨 최적화 모델, 구매 최적화 모델, 매출 최적화 모델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쿠키런 게임을 만든 데브시스터즈 회사가 정해진 예산으로 가장 많은 인스톨을 올리고 싶으면 인스톨 모델을 사용하면 된다. 가장 많은 수의 구매이벤트 (인스톨 후 유저가 게임중에 구매하는것)를 올리고 싶으면 구매 모델 (Action model)을 쓰면 되고,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고 싶으면 매출극대화 모델 (ROAS model)을 쓰면 된다.

우리회사가 보유한 세가지 모델의 단계: 인스톨 최적화, 액션 최적화, 수익 최적화 모델

재밌는 것은 매출극대화 모델을 쓰면 인스톨극대화 모델을 쓸때 보다 인스톨은 더 적어진다는 것이다. 인스톨에 최적화된 모델이 아니기에. 그래도 광고주 – 데브시스터즈 회사 입장에서는 이 모델을 쓰는게 더 큰 수익을 가져올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광고주는 매출극대화 모델을 선택한다. 매출이 커질수 있다면 인스톨이 좀 적어도 괜찮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의 세계관에서 정치적 옳고 그름은 결코 우리의 최적목표 (최종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소망과 관심은 지금의 짧은 삶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껴안을 수 있는 동기를 가진다. 인스톨을 희생해도 매출이 극대화 된다면, 인스톨을 희생시키는게 우리의 미션인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자. 예수님은 로마식민지로 유대땅이 지배받던 그 당시, 소위말해 매국노로 분류되던 세리 (정복국 로마에 세금을 걷는 관원)과 열심당원 (무장 독립운동을 하는 세력)을 모두 제자로 맞아들였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향해 나가고 압제에서 해방시키면서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침), 로마 황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크리스천으로서 마음과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명확히 하셨다.

이하는 보수와 진보가 각각 어떤 차선책을 선택할 위험이 높은지 짚어보도록 하겠다.

보수가 경계할 것 – 복음을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것

보수주의자들이 회개하고 경계해야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이데올로기로 만든 것일 것이다. 이에 대해 내가 무릎을 치고 동의한 것이 이상호 목사님의 아래 비판이다.

한국교회는 이승만을 놓아야 한다. 박정희나 전두환도 놓아야 한다. 다른 쪽에서는 김구나 노무현을 놓아야 한다. 이들이 하는 말에는 진실이 없다. 이들은 팩트보다는 미화하는데 치중한다. 과는 없고 공만 논한다. 이들의 모순은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집착한데서 비롯한다. 성경적이거나 역사적이지도 않다. 또한 현실적이지도 않다. 보수를 자처하는 목사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복음의 전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투사가 되는지 모르겠다. 이들이 하는 말을 살펴보라. 이들이 붙잡고 있는 건 성경이 아니다.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다. 그러면서 다른 쪽을 사탄이라고 삿대질한다. 때론 교회 밖의 이리보다 교회 안의 누룩이 더 파괴적인 惡이 될 수있다

목회자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세상 바닥을 경험했고, 소명으로 목회를 시작했을 목회자들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누룩에 취한 거다. 복음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 무엇인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자기 소견으로 살아온 거다. 이들은 한국의 현대사에 모든 게 매몰되면서,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지, 얼마나 惡한지, 이로 인해 교회가 당할 고초가 어떠한지, 얼마나 많은 영혼을 잃을지 모른다.

크리스천 보수주의자들의 기도모임 홀리튜브에서 얼마전에 이호 목사님이 아래 강의를 하셨다. 제목만 봐도 뭔가 느껴지지 않는가 – 공산주의와 성혁명.

이호목사의 강연 – 공산주의와 성혁명

짧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공산주의는 가장 반 기독교 적인 정신의 집약체이다 – 마르크스도 그걸 알고 공산국가 건설을 위해 기독교를 반드시 (타 종교보다 더) 타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유고작에 보면 그 방법으로 성혁명을 이야기한다. 즉 동성애 물결로 대표되는 성혁명은 가장 반 기독교적인 영적 세력이자 흐름이고, 지금 정권과 지금 대한민국은 그런 영적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반드시 교회가 이것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이승만에 의한 민주대한민국 건국을 인정하지 않고, 미국보다 중국을 더 우방으로 생각하며, 북한 정권을 끼고 돌고, 성혁명을 지지하는 진보세력의 물결은 크리스천이 방어하고 싸워야할 영적 세력이다.

참 써 놓고 보니, 만약 이 글을 읽는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이 이런 생각이나 글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좀 안가고 좀 죄송스럽기도 하다. (당장 이해가 되지 않고 매우 불쾌해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Please excuse me). 필자는 이런 견해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이승만이 친일파에 본인의 명예욕에 빠진 독재자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그런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한번쯤 이호목사의 이승만 강의를 들어보시길 추천드린다. 왜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많은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이승만을 높이고 이승만 정신을 높이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백번 양보하여 위의 견해와 이야기가 다 맞다고 할지라도, 정치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것은 최선이 아닌 차선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상호 목사님의 비판 – “보수를 자처하는 목사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복음의 전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투사가 되는지 모르겠다. 이들이 하는 말을 살펴보라. 이들이 붙잡고 있는 건 성경이 아니다.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다. 한국의 현대사에 모든 게 매몰되면서,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 을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조선이란 나라 – 유교정신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 에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제사가 우상숭배라며 그것을 없애는 것을 최전선에 앞세운 기독교/천주교 세력이 많았던 것을 떠올려보자. 정약용의 삶에 대해 다룬 이 책에서도, 다산이 처음엔 천주교를 받아들였다가, 조상을 공경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학(천주교)을 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전략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영혼이 예수님을 만나지못했을까.

반면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자신의 피를 흘리며 복음을 전했고, 학교나 병원을 세우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나아갔고, 문둥병 걸린 사람들을 향해 나간 목사/신부님들, 각자의 자리에서 한 영혼을 섬기며 인생을 바치고 피를 흘린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에 의해 나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게 아닐까 본다.

문정권으로 대표되는 진보세력을 싸워 이겨야할 영적 세력으로 생각하며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모든걸 걸고 있는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과연 이것이 최선의 전략인지. 제사를 반대하는 것을 최앞선에 내세운 전략적 실수를 되풀이 하는게 아닐지. 심지어는 박정희/전두환 등 유신/독재 세력에 맞서 써운 민중신학 마저도, 그것이 아무리 그 자체로는 정의로운 싸움이었다고 해도, 크리스천의 근본정신이 될 수 없는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민중신학이 모든것으로 알았던 목사님들이 나중에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고백했던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래는 보수주의에 모든것을 걸고 있는 크리스천과 한국 교계에 대한 이성호 목사님의 비판이다. 모든 말 한마디 한마디를 내가 다 충분히 이해하고 백프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겨들을 말들이라고 생각한다.

1.

교회가 사람을 키웠어야 했는데, 고작 출세한 사람으로 만든 거였습니다. 교회 다니는 대통령이나 총리, 장관, 고위관료들, 기업가들, 법률가들, 의사들, 예술가들, 게다가 건물주들도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욕먹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 일은 잘하고, 교회재정에 도움을 주고, 목사에게 밥 사주고, 교회 돌아다니면서 간증은 하고 다녔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의를 행하지는 못했습니다. 근데도 목사들은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힘이나 이름이 되는 것처럼 치켜세웠으니, 목회의 실패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키우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곳입니다.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곳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처럼 키우는 곳입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일할 사람으로 키우는 곳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이 아니라 세상을 아는 지식으로 체계적으로 자라야 하고, 나이 들수록 사람을 얻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교회 일을 제대로 해서 사람을 얻고,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덕을 선전해서 사람을 얻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아! 지금 교회에 필요한 건 전략입니다. 하나님의 전략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2.

성경은 중산층의 번영을 지지하지 않는다. 성경이 지지하는 사회는 하나님의 공의와 복지가 사회 전반에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보여준 것처럼, 중산층의 번영은 사치로 이어지면서 우상숭배와 탐욕, 쾌락에 빠지게 했다. 자기만족에 집착하는 중산층은 누군가를 소외시켜 잉여 인간으로 만든다. ‘자유’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지만, 성경이 의미하는 자유와는 상반된다. 성경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죄로부터의 자유,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죄의 결과로부터의 자유, 진리를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는 자유다. 복음적인 정치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공의와 복지에 힘쓰는 거다. 이런 복음적인 정치를 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정치인을 본 적 있나? 복음적인 정치는 우편에서 법과 질서를 옹호하거나, 좌편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차원 너머에 있다. 광화문에서 ‘교회’로 자칭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당을 만들어서 정치하려고 하는데, 그들의 정치는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다. 오히려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고,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부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정치적인 사람들이기에 권력과 돈 앞에서 끝없이 분열을 거듭하면서 자멸할 거다. 그들은 자신의 이상과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지라도,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십자가를 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와 복음의 능력을 함부로 밟으면서, 교회를 진공지대에 올려놓고 막말로 흔들어댄다. 하나님 나라와 현실 국가. 하나님 나라와 현실 사회, 하나님 나라와 교회, 하나님 나라의 정치에 대해 무지하다.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3.

목사들이 앞장서서 정당을 만들었다. 정당 이름에 ‘기독’을 붙였으니 국민들은 기독교에서 만든 당이란 걸 알 거다. 이전에도 이런 정당이 있었지만 매번 실패했다. 이 정당의 홈페이지에 보니 네 가지 정책을 내놓았다. 기업경영권 회복, 토지공개념 반대, 전교조 철폐, 원어민 학교 활성화이다. 그리스도를 빙자한 정당이라면 복음적인 정책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또 교회를 지키고 자유를 지키고 복음으로 통일을 이룬다고 기치는 올렸지만, 구체적인 강령이나 정책이 없다. 통일과 관련해서는 고작 이승만 통일전략 연구원을 만들겠다고 하는데, 이승만과 통일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기독)의 이름을 정당을 만들 때는 조심해야 한다. 하웃즈바르트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이 정당을 만들 때는 주어진 사회 환경에서 정당 형성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가를 분석해야 하고, 그리스도인 정당은 ‘복음적’ 정치 활동을 위한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어야 한다는 거다. 근데 지금 ‘기독’ 이름을 붙인 정당은 이전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만일 이런 정당에서 국회의원이라도 나온다면 더 큰 일이다. 이들이 한국교회의 이름을 내걸고서 저지를 정치적 난장판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복음도 없고 상식도 없고, 그리스도를 내건 정치적 행위만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정당이 아니라 소금과 빛이 되도록 교회다움을 더하는 거다.

4.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했다고 ‘친일파’라고 낙인찍을 수는 없다. 제국주의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친일파라고 낙인찍으려면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목사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친일파’로 낙인찍어야 한다.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목사가 신사참배 함으로 성도들이 ‘용기’를 내서 함께 신사참배를 했던 거다. 신사참배 한 목사들은 반성과 회개하는 과정이 없이 해방 후에도 교권을 잡았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친일파가 보여준 모습과 흡사하다. 신사참배는 했으면서도 반공 이념으로 무장해서 보수 정권과 함께 빨갱이를 잡는데 공조했다.

신사참배 한 목사들은 신학적으로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보수주의를 표방한다. 신학적 보수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는 기초와 결이 다르다.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로 자처하는 목사들은 신학적으론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이들은 그냥 정치적 행위를 할 뿐이다. 보수주의 신학은 성경과 전통신학을 중시한다. 교회 안팎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한다. 반면 정치적으로 보수주의는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따라 계속성과 안전성을 추구한다. 엄밀히 말하면, 신학적 보수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는 대립하거나 충돌한다. 한국교회 목사들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로 자처한다. 광장에서, 강단에서, 온라인에서도 보수정당들의 주장과 같이한다. 이들의 신앙(혹은 신학)과 정치적 언행 간에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간극이 있음에도 정치적 언행을 계속한다. 이들의 본색은 일본의 경제 도발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났다. 한국교회에게 있어 일본이란 나라는 그냥 주권을 침략한 국가에 그치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게 했던 국가다. 정치적 보수주의자로 자처하는 목사들의 친일 언행은 과거의 신사참배와 궤적을 같이 한다.목사의 정치적 언행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현하는데 국한되어야 한다. 보수든 진보든, 목사는 주관적 언행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고, 만일 하려면 목회를 그만둬야 한다. 이들은 결코 사람을 얻지 못한다. 매너도, 학문도, 사랑도 없는 이들은 교회를 허무는 여우와 같다.

목사가 정치적 언행을 교회 안팎으로 나타내려면 몇 가지를 갖춰야 한다. 첫째 성경에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와 정의와 공의를 기초해서 말해야 한다. 둘째, 한국사회의 맥락에 통찰하고 현실성과 학문성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 셋째, 증오가 아니라 연민과 동정이 가득한 언어여야 한다. 마치 개 짖듯이 몇 마디 말로 짖지 말아야 한다. 지금 목사들과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한 목사들이 겹쳐진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고발하고 죽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겹쳐진다. 바울을 배신하고 떠난 데마와 겹쳐진다. 또한 매일 십자가를 지고 가리라고 고백하면서도 십자가를 피하려는 내 모습과도 겹쳐진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

진보가 경계할 것 – 회개없는, 자기희생없는 가짜해방을 내세우기

진보주의자들이 회개하고 경계해야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회개없는,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 없는 가짜 해방을 내세우는 것일 것이다.

위 영상에서 김영서 작가는 9년간 이어온 친부의 성폭력, 그리고 친부의 수많은 압제와 상처에서 자신을 해방시킨건 그 무엇도 아닌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데에 있었다고 고백한다. 피해자로서 피해의식에 휩쌓여 있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그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진보정신이다. 너무나 필요하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피해의식”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나 또한 누군가에겐 가해자일 수 있다는것,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이기심을 가진 죄인이라는 것, 나의 영혼엔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그 고백이다. 그것이 없는 해방은 가짜 해방일 수 밖에 없다. 내가 피해자라는 억울한 마음에, 가진자와 압제하는 수구세력을 정죄하는 마음에 평생 갖히기 쉽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보주의가 회개하고 경계해야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한다. 진정한 진보주의자는 본인이 ‘피해자’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피해자가 더이상 ‘피해자 정체성’을 가지지 않고, 나 또한 회개와 자기부정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지시킨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에서 주로 만나는 진보주의자들은 ‘피해자’ 정체성을 가지고 있거나, 피해자를 보호하는 ‘정의’의 편에 있다는 데에 모든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 회개나 성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조국사태나 이번정권의 주 세력인 386세력이 가장 비판을 받는 이유도, 이제는 주류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언더독 멘탈리티를 내세우며 (속칭 피해자 코스프레)반성이나 성찰 없는 심판, 회복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성혁명을 예로 들어보자. 동성애자의 성적정체성이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죄냐 아니냐의 논쟁을 넘어서, 성혁명 이데올로기가 가진 정말 큰 위험성은 회개와 자기부정 없는 성해방을 내세우는데에 있다. 우리의 성은 언약 (covenant)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누릴때에 온전한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성이 아닌,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상대방에게 희생할줄 아는 성, 기쁠때나 슬플때나 희생하며 함께한다는 그 언약의 관계 안에서의 성(sex)이 될때, 우리는 비로서 역설적으로 성에서 해방될 수 있다.

노동자 해방, 인종차별 해방, 여성 해방도 다 마찬가지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인간의 삶의 근본문제는 사회의 압박이나 압제가 아니라 (이것이 마르크스적, 유물론적 사고가 갖는 가장 큰 해악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우리안의 이기성, 우리안에 우리가 주인이 되고 싶은 우리의 에고, (크리스천적 용어로 죄성) 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진보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적 약자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도록 나올수 있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코 제도적인, 외부적인 유토피아 수립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흑인 인권해방운동과 LGBTQ운동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운동을 시작하고 리딩하는 단체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신론적 진보주의를 가지고 있다

아래 이상호 목사님의 비판을 잘 들어보자. 인권, 평등 등을 논의하는 진보주의의 근본정신은 성경에서 왔음에도, 신을 잊었다는 비판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인권이나 자유, 평등과 같은 진보의 아젠다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제 진보가 커져서 독립하더니 반기독교가 되었어요)

1.

좌익에 대해 말하겠다. (우익에 대한 비판은 이미 해왔다.) 좌익은 행복한 무신론자를 꿈꾼다. 신의 존재를 지우고, 신의 부재에 승부를 걸고, 최소악을 위한 정치를 하고, 최선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희생시켜서 무신론적 진보를 성취해야 한다. 사르트르가 좋아하는 말 ‘신의 침묵’이 바로 그건데, 좌익의 진보주의는 하늘에는 신이 없고, 있어도 부재하다는 걸 종교적 신념으로 믿는다. 좌익의 하늘은 끝까까지 좌익인 베르나르 앙리레비의 말처럼 ‘사상의 하늘’이다. 하늘과 땅에는 좌익의 이념만이 있다는 것인데, 이건 전체주의와 같은 거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좌익을 잘보라. 그들은 우울하다. 그들의 사랑에는 우울증이 있고, 그들의 말에는 무의미가 뛰놀고 있다. 좌익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하기에, 나중에 말을 뒤집어도 전혀 가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좌익이 종국에 구축하는 시스템은 악마적이고, 프로메테우스적인 무신론이다. 좌익은 알고 있는 거 같으나 실상은 모른다. 모르면 배워야 하지만 좌익은 욕을 한다. 슬라보예 지젝이 좌익이면서도 욕을 먹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좌익은 자신의 무식을 모른다. 좌익이 아는 건 자신의 지식이기에, 좌익의 혀는 무지의 惡으로 가득하다.

한 마디 더! 좌익의 시간에 대해서 말하겠다. 좌익에겐 시간이란 게 없다. 서구의 좌익이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걸 보라.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볼 수 있는 반유대주의는 희생양을 찾는 좌익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 좌익은 뒤틀린 시각으로 역사와 인종을 차별하거나 무시하거나 짓밟아버린다. 좌익의 시간은 바로 그들 자신에 불과하다. 그래서 좌익은 지독하게 우울하다. 웃고 있어도 울고 있다.

2.

진보주의는 인권이나 자유, 정의에 관심을 가진다. 진보주의자는 피해자 편에 설 수밖에 없다. 진정한 진보주의자는 피해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다. 하지만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선 희생을 찾을 수 없다.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가치와 개념은 성경에서 나온 거다. 평등이나 복지, 인권은 성경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아시아와 유럽의 신화나 철학에서는 나올 수 없는 가치들이다. 성경이 아니면 인류의 진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근대 이후는 그렇다. 동성애 차별금지나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진보주의의 뿌리도 그렇다.

이렇게 진보주의가 성경에 뿌리를 두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에서 균형을 잃고 만 거다. 동성애를 사랑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가정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들을 허물려는 거다. 이런 진보주의는 가인의 모습과 일치된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곤 하지만 하나님이 뜻하시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예배를 드리는 거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진보주의자들은 성경과 교회를 죽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진보주의자들은 성경과 교회를 없애려고 한다. 진보주의자들은 가인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아벨을 죽인 것처럼, 진보주의자들은 성경과 교회를 죽이려고 한다.

4.

현 정부는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속으론 전체주의를 지향한다. 차별금지법 등이 정초하고 있는 정치적올바름은 일종의 ‘전도된 매카시즘’으로 온 시민을 권력의 발굽 아래에 밟아버린다. 이런 선례는 유럽에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현 정부는 시민사회의 건강한 비판을 황폐화시킬 거다. 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의석을 줬는데도 이런 일을 못하면 되겠느냐”하는 말은 전형적인 전체주의자의 말이다. 아마 부동산사태는 이후 벌어질 사태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거다.

현 정부는 권력의 맛에 취해서 눈에 보이는 게 없다. 박근혜 정부의 몽매한 정치력은 이렇게까지 시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정말 놀랍게도 현 정부는 각 시민의 종교생활과 일상생활까지도 간섭하고 강제하려고 하는 대담함을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수십 년 뒤로 후퇴하게 될 거다. 사실 이런 상황은 이전에 이미 예견되었다. 무지한 그리스도인은 정치를 터부시하고, 거만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민주투사인 양 떠벌린다. 바울이 로마시민을 자처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인 시민으로서 한국사회에서 복음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더욱 말씀에 집중하고, 교회 밖에서 더욱 말씀으로 살아가야 한다. 적어도 권력의 선동과 선전으로 개돼지가 되지 않아야 한다.

5.

사람들은 권력을 잡으려고 해요.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권력을 잡을 수 없어요.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으로 시작해도, 결국 권력의지에 의해 해체되곤 하죠. 그래서 진정한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는 거의 없어요. 많은 정치인들이 동성애를 지지하는데, 권력을 잡으려고 동성애를 지지하는 겁니다. 만일 동성애를 반대하는게 권력을 잡는 길이라면 동성애를 반대하죠. 정말 많은 진보 지식인들이 권력지형의 변동을 위해 부단히 애썼어요. 사실 인권이나 자유, 평등과 같은 진보의 아젠다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제 진보가 커져서 독립하더니 반기독교가 되었어요. 여기엔 기독교 지성이 비실비실해진 탓도 크죠.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가 ‘꼰대’가 된 게 그런 증거죠. 교회가 자초한 거죠. 이번 코로나 사태는 이런 교회를 각성케 할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해. 이번 기회에 몇 가지를 챙겨야 해요. 첫째는 성경을 알자는 것이고, 둘째는 일상에서 믿음으로 살자는 것이고, 셋째는 그리스도인 시민으로서 어떻게 정치력을 발휘할지 모색하자는 것이죠. 이외에도 많은 과제가 있지만, 지금 당장 급한 과제는 대충 이렇다고 봅니다. 지금 교회가 각성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전체주의로 흘러갈 수밖에 없어요. 이 정부는 진정한 진보주의는 없고 권력의지만 가진 사람들로만 가득해서 여차하면 전체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커요. 이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생존과 사람들의 영혼과 관련되는 문제이죠.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며 지난 몇개의 글을 썼다. 여전히 고민하고 기도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을까.

연일 모든 문제로 피터지게 싸우는 한국이 처한 정치적 현실을 보면 절망감이 들때도 있다. 주진형씨는 페이스북에 농담처럼 이런말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웃픈 이야기가 아닐수 없다.

하지만 난 희망을 본다. 한국은 반세기만에 직접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뤄낸 세계 유일의 저력의 국가이다. 세계와 역사를 보면 훨씬 더 심한 갈등 (내전, 부패, 독재)로 평행선을 멤돌고 있는 국가들이 부지기수 이다. 진보와 보수의 갈증에 의해 국가가 공산화되고 숙청과 내전을 겪은 국가도 셀수 없이 많다. 가장 선진사회라는 미국이나 유럽들을 봐도 별의별 이슈가 난무한다 (특히 요새의 미국은 가관이다). 한국이 지금 처한 현실은 절대 만만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희망을 버릴 이유도 없다.

몇가지 스스로에게 되내이는, 그리고 내게 도움이 된 말들을 전하며 이 길고 무거운 글을 마무리한다.

1 크리스천의 정치참여나 정치적 언행 – 우리의 동기와 마음, 그리고 우리의 식견을 꼭 체크해가며 하자

크리스천이라고 정치참여나 정치적 언행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는 다 정치적 견해를 가지는 정치적 존재이고, 정치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단 부르심을 받고 은혜를 입은 존재로서 우리의 언행이나 행동은 구속하신 그분의 마음과 뜻에 합당해야 할 것이다. 계속 소개한 이상호 목사님은 본인의 페이스북에서 크리스천의 정치참여나 언행에 대해 아래 세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 첫째 성경에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와 정의와 공의를 기초해서 말해야 한다.
  • 둘째, 한국사회의 맥락에 통찰하고 현실성과 학문성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
  • 셋째, 증오가 아니라 연민과 동정이 가득한 언어여야 한다.

즉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기초하여, 또 하나님의 마음 (연민과 동정)에 기반하여, 여기에 인문학적 소양과 정치적 식견을 더하여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정치 포스팅은 극도로 자제하게 된다. 위 세가지에 다 만족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 관련된 몇가지 비판/주장을 덧붙인다.

1.

사람에게 분노하지 말고, 사람을 대적하지 마세요. 그럴수록 마귀는 분노하고 대적하는 대상만이 아니라 당신까지도 장악하게 됩니다. 분노하고 대적할 대상은 마귀와 마귀의 일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을 대하셨는지, 특히 권력자들을 대하셨는지를 주목하세요.문재인 대통령을 문재앙이라고 하지 마세요. 당신이 재앙을 받게 될 겁니다. 전광훈 목사를 **목사라고 조롱하지 마세요. 당신이 조롱을 받게 될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말이 험해지면서 서로 혐오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에게 분노하고 대적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귀의 종이 되고 맙니다. 정말 나라를 사랑해서 비판하려면 사람을 ‘욕’하지 말고 정책을 ‘비판’하세요. 적어도 어른이라면 욕과 비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해요. 사람들은 스스로 개돼지가 되어 패거리를 짓고는 서로 물어 뜯으면서 죽이려고 해요. 페북의 글이나 댓글을 보세요. 짐승이나 하는 욕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언어는 복음에 기초해야 한다. 복음은 세상 어떤 –주의ism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재정립해나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국가에 대해서, 자유에 대해서, 정의에 대해서, 주권에 대해서, 복지에 대해서,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등등. 목사가 정치인과 정당에 대해서 말할 때는 그러해야 한다. 선지자들을 본받아야 한다. 선지자들은 사회의 특정 계층의 이해관계를 따르거나, 특정 정당의 이념에 따르지 않았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파토스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치를 비평했다. 목사가 현실 정치를 논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현실 정치인들이 지닌 특정한 개념이나 이해관계를 벗어나서 성경적 정의의 관점에서 논해야 한다. 몇 마디 말로 치고 빠지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목사는 단순히 신학적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복음을 현실에 적용하는 차원이어야 한다. 지금 페북에는 늙은 목사들의 폭력적이고 냉소적인 정치적 언어들로 가득하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목사들이다. 오늘 한 청년이 하는 말, “페북에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장악해서 페북을 열기가 무섭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복음의 문을 닫고서, 사람들을 막는 이들은 목사들이다

3.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의 정치다. 시민사회의 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정치로 정치적 행동을 해야 한다. 특히 목사들의 언행은 성도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기에 정치적 언행에는 성경과 신학적인 측면에서 신중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짧은 기간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겪으면서 크고 작은 부작용이 적지 않다. 특히 냉전은 끝났음에도 이념을 기저로 하는 좌우 진영 논리가 사회 전반에 걸쳐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라 좌우 대립이나, 정부에 대한 태도의 대립이 격하다. 목사는 하나님의 정의를 말해야 한다. 세상의 惡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파토스로 지적하는 걸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권력자(정부)들의 힘과 선동에 눌려서 惡을 감지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대신하여 권력자들의 불의와 불법을 지적하는 역할을 해내야 한다. 교회를 죽이는 목사에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자기의 정치적 견해와 맞는 권력자(정부)에 대해서는 무조건 지지하고 반대편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한다. 에스더가 동족을 구했던 것처럼 목사는 교회를 감싸야 함에도 교회가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는 권력자(정부)를 지지한다.권력자(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일반 시민에게 맡겨두라. 목사가 특정 권력자를 지지한다는 건 이미 교회를 죽이기로 작정한 거다. 늙은 목사들이 그랬고, 이제는 젊은 목사들까지도 그러고 있다. 이들의 논리에는 성경도 신학도 없고 오직 자신들의 정치적 논리만 있다. 차라리 목사가 되지 않았어야 할 사람들이다.

2 하나님의 정결케 하는 불 가운데에 거하자

아래는 필자가 알고 있는 한 크리스천의 나눔이다. 브라이언은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불이 때로는 우리안의 정결하지 못한 것, 하나님으로 부터 온것이 아닌것 (고린도전서 3장 내용)을 다 태워 없애 우리를 정켤게 하고, 때로는 우리를 구속에서 해방시킨다고 (다니엘서 2장 내용)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이런 불 가운데 있을 때에만 우리는 진짜 대화를 하고 진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두고두고 내 머리와 가슴에 남은 말이었다.

최근 많은 회자가 되고 있는 넷플릭스의 소셜 딜레마는 소셜 미디어가 우리를 중독시키고 더 멀어지게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밝힌다. 실제로 자본의 논리에 의해 돌아가는 소셜미디어는 우리가 더 많이 시간을 쓰도록 설계되고 최적화되고 있고, 그 결과 우리는 전에 없는 우울증, 자살률, 그리고 정치적인 분열 (자신이 좋아하는것만 보이므로)을 보고 있다. 머지않아 내전이 일어날것이라고 예측하는 실리콘밸리 테크 인사이더들도 있다. (아래 소셜 딜레마 발췌)

미국 십대여성 자살율 – 2009년을 기점으로 폭발적 성장
2004년의 정치지형도
2017년의 정치지형도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건 갈수록 우리를 자극시키고 우리와 정치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야기만을 우리에게 공급하며 분열을 조장하는 소셜미디어나 미디어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는 그분의 불꽃 아래에서 정금같이 나아올때, 우리는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3 기쁨을 회복하자

기쁨 회복을 가장 강조한 설교 – 공동체 회복을 위해 필요한 세가지 (설교듣기 링크)

이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리얼리티 교회의 이번주 설교 내용이다. 데이브 목사는 코비드와 선거를 앞둔 정치적 갈등으로 고립된 성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무나 공감한 말이다. 우리는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고립되어 있고 지금 여러분은 이미 공동체를 떠났거나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합니다. 만날수도 없고, 무슨 이야기를 잘못하면 철천지 원수가 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공동체를 유지하는게 너무 어렵기 때문이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느때보다도 커뮤니티,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지 간에요. 우리안에 심장이 멈춘 것 같고,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로의 온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요즘같은 시기에는 서로 연락하지 않고 부데끼지 않는것이 훨씬 편합니다. 사랑하지 않는것이 그 어느때보다 자연스로워 졌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을 열고, 상처입을지라도 가드를 내리고 서로 다가가지 않으면, 우리의 심장은 굳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만의 취미나, 사치나, 엔터테인턴트나, 이기심이나 이런것들로 딱딱 굳어버린 마음은 부서지지 않는 가장 안전한 상태가 되지만 역설적으로 절대 깨지지 않는, 구원할 수 없는, 다가갈 수 없는 차가운 돌덩이가 될지 모릅니다. (CS 루이스 인용)

이시기에 우리가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다시 우리의 심장이 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세가지 있습니다.

첫째, 옳고 그름보단 겸손 (Humility over rightness). 우리가 틀릴수도 있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겸손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 혼자있기 보다는 섬김 (Service over Shelter). 우리는 서로다른 능력과 장을 가지고 서로 보완하는 존재입니다. 지금 그 상호보완이 절실합니다. 온라인을 통해, 또는 이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으로 섬김의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셋째, 기쁨 대체제 보다는 기쁨 (Joy verses Substitutes). 뇌과학자들은 뇌의 “기쁨 중추”는 어린 시절에 다 성장하고 성장이 멈춰버리는 다른 부위와는 달리 평생에 걸쳐 성장하는 부위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기쁨중추가 발전할때 다른 감정 (슬픔, 고통) 을 제어할 수 있게되며, 다른 충동 (음식, 성욕, 폭력성)도 잠잠케 할 수 있음을 분석했습니다. 관계에 있어서 기쁨의 정의는 “다른사람이 나의 존재로 인해 기뻐할때, 다른사람의 눈에 기쁨이 될때”입니다. 지금 우리의 기쁨 잔고가 낮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 ‘다른사람’ 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립될수록 우리의 기쁨잔고는 없어지고 우리는 점점더 다른 사람과의 사랑과 관계에서 느껴지는 진정한 기쁨의 대체제 (포르노, 게임, 미디어, 스포츠, 등등) 를 소비하며 빠져들 것입니다. 그건 가짜 설탕처럼 단맛만 날뿐 진짜 영양가는 없죠. 이제는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회복할 때입니다. 사회적 규범을 준수하며 서로 만나서 그 기쁨을 나누세요.

4 복음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회복하자

이 긴 글의 마지막은 많은 사람이 봤을지 모르는 하준파파의 이야기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 자식에게 진짜 잘 사는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그가 말하는 진짜 잘사는 법 – 내가 잘사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잘 살게 하는것. 이 메세지에 눈물흘리고 반응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또한 눈물을 적시며 봤다. 같은 아버지로서, 이분께 존경과 사랑과 감사를 보낸다. 그리고 이렇게 복음을 살아내고, 그 가르침을 삶으로 전한 이분의 조부모님과 부모님께도 사랑과 감사를 보낸다.

그렇다. 복음은 단순하다. 복음은 아름답다. 우리의 가슴을 녹인다. 그 본질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복음은 그 어떤 보수주의보다 더 참 보수적 (전통과 역사, 원칙, 가정 중시 등)이며, 그 어떤 진보주의 보다 더 참 진보적 (인권 증진, 약자 보호 등)이다. 복음은 그 위에 있다. 우리의 아이덴티티는 공산주의로부터, 성혁명으로부터, 좌파정권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보호하는 보수전사가 아니다. 수구 기득권 세력, 재벌, 언론, 검찰을 개혁하고 노동자, 성소수자, 못가진자, 억울한자를 대변하는 정의의 수호신 진보전사도 아니다. 우리의 아이덴티티는 값없이 은혜입은 자이다. 우리를 위해 대신 모든 값을 치루고 돌아가신 아름다운 그분의 소식을 전하는 전달자이다. 본인의 십자가를 지고 가장 낮은데로 가는 제자이다. 그분의 유업을 이어받을 상속자로서 기꺼이 희생하는 양자이다. 그 순수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About sanbaek

늦깍이 크리스천 (follower of Jesus), 우렁각시 민경이 남편, 하루하율하임이 아빠, 둘째 아들, 새누리교회 성도, 한국에서 30년 살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거주중, 스타트업 업계 종사중. 좋아하는 것 - 부부싸움한것 나누기, 하루하율이민경이랑 놀기, 일벌리기 (바람잡기), 독서, 글쓰기, 운동, 여행 예배/기도/찬양, 그리고 가끔씩 춤추기. 만트라 -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6 comments

  1. 다니아빠 in 취리히

    종교적 신념을 가장한 이데올로기와 복음의 본질 간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해야 할 터인데.. 요즘의 한국 정치사회 상황과 기독교계의 행태를 보면 정말 답답하고 가끔은 진짜 화도 나더라구요. 정리를 넘 잘해주셔서 글 읽으면서 생각 정리도 잘 되고 상황 인식도 좀 더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된거 같네요 형~ 이런 글 더 많이 써주세요 ㅋㅋ – 취리히에서 다니아빠

    • 다니아빠! 누추한 곳에 와서이렇게 일반인 행색을 하며 답변 남기면 너무 고맙잖아 ㅋㅋㅋ. 응 진짜 안타까운 것도 참 많지. 답답할 때도 많고. 근데 난 더 보면 볼수록 더 이해가 되는 (역설적으로도) 면이 커지더라고. 극보수나 극진보도. 우리에겐 우리세대의 몫이 있는것 같아. 기도하며 잘 해보자 같이!

  2. yebin

    아멘! 한동안 가지고 있었던 고민에 가장 명쾌한 답이 되는 것 같습니다.
    소중한 고민의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은 복음화가 급속하게 많이 진행되었지만 여전한 이념 갈등, 분열, 심지어는 크리스챤들끼리도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시대와 현장을 보면서 많은 기도가 담깁니다.
    믿음의 간증, 현안들을 복음의 눈으로 해석해주시는 모든 글들, 감사하게 읽고 생각을 펼치게 됩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영육간의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 대학생 크리스챤 올림

    • 오 대학생 분이 오셔서 이렇게 관심 가져주시고 답까지 남겨주시니 너무 감사하고 기쁘네요. 너무 귀하네요 예빈님. 언제든 대화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진심과 사랑을 담은 말씀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Feel blessed and encouraged.

  3. Soojung Ha

    그렇습니다 – 진보나 보수를 지지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목표는 아니죠. 몇 가지 생각이 더 드네요.
    – 사회에서 죄의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습니다. 공산주의가 반기독교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을 경쟁으로 내몰고 소비를 부추겨서 환경을 파괴합니다.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게 ‘성경적으로’ 더 낫다고 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 성 혁명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일임은 확실한 것 같아요. 하지만 크리스천들이 비크리스천들에게 우리의 생각을 강요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크리스천이 아니었다면 성 혁명을 지지했을 거예요.
    – 비슷한 맥락에서, 조선 선교사들이 제사를 없애는 것을 강조한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사회 전반에 그것을 강요했다기보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이니까요. 예수님도 죄인들을 따뜻하게 포용하셨지만 동시에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따라와야 한다고 강조하셨으니까요. 따뜻한 섬김과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것은 같이 갈 수 있는 거라 생각해요. 예수와 우상숭배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맞고, 거기서 정약용은 옛 문화를 버리지 못해 후자를 선택한 거 아닐까요.
    – 거짓 정보와 편향된 정보가 너무 많습니다.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통찰력을 기르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필요해요. 지금까지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더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하는 게 맞는 걸까요. 그냥 복음대로 살고 복음만 전하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지 않나요.

    • 오 수정, 고마워 같이 생각하고 engage해줘서. 상당히 재밌는 포인트들이네. 역시 수정 ㅋㅋ 아래 생각나는대로 함 써봤어. 또 이야기해보자.

      1. 나도 이거 생각해본적 있어. 결국 성경적인것에서 무언가가 하나만 틀어지면, 그게 우리에게 아주 appealing하고 받아들여지는 사상이 되고 세계관이 되는것 같아. 예를 들어 공산주의는 일보다 사람을 보는점 (사람을 먼저 보고 그에 맞는 일을 만들고 배분함), 성경이 이야기하는 약자를 돌보고 경제적으로 종속된 관계를 풀고 (jubilee) 이런데에 있어서 성경적 design과 같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거의 가장 큰 핀이 안맞았다고 볼 수 있지. 성혁명이나 self-love같은 메세지도 마찬가지. 다 맞는데 하나만 딱 바꾸면 참 어필링 한듯. 자본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한다는 데에선 좀더 삶/세상과 맞지만 돈이 우상이 되었기에 지금 우리가 보는 수많은 폐해들이 나오고 있는것 같고. 단 소위 말하는 공산주의-communism은 그 디자인에서부터 신을 배격했다는 사상적 뿌리가 있기에, 자본주의와 굳이 비교하자면 더 non-biblical하거나 demotic 할수 있다고 보는 시각도 I think it’s a fair point.

      2. 크리스천이 비크리스천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강요할수는 없다고 생각. 단 더불어 사니까 비크리스천도 크리스천에게 일방적으로 비성경적 세계관을 강요할수는 없을거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해. 소위 차별금지법 등으로 대표되는 성 혁명은 크리스천과 비 크리스천에게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 즉 차별금지라고 하면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포괄적 금지는 결국 지금 미국에서 보는것 처럼 모든 회사에서나 학교 교육에서나 동성애를 정상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강요되고 그게 당연시 되는것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기조에 기반하고 있기에, 그리고 그게 크리스천의 삶 (그리고 진짜 개인적으론 내 자식들이 학교에서 받는 교육에도연결되는 것이기에) 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결국 무엇이 사회에서 합의할 수 있는 기준이고 법인지 같이 논의하고 고민하는것이 필요. 다르게 말하면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고 해서 반대하는쪽이 찬성하는 쪽에 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것 (찬성하는 쪽이 반대하는 쪽에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보다)이라고 볼 수 없지. 이런 비유도 가능할 것 같아. 만약 “어떤 절대 종교나 진리를 지지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이야기하고 그런 가치관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것은 차별로 금지해야 한다” 라고 한다면 그 생각 자체도 “특정 가치관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생각에 대한 차별”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서로 소통하고 이해형량을 하면서 합의점을 찾아가야 할. 더 자세한 생각은 여기 적어봤음 https://sanbaek.com/2020/07/26/justice/

      3. 제사에 대해서 이건 타협할 수 없는 우상숭배의 문제며 신앙인에게만 강요된 규범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 It’s a fair point. 하지만 지금의 보수 기독교계에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 현 정권의 교회 탄압(?)으로 볼 수 있는 정책들이나, 전반적인 진보적인 흐름들을 비판하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생각의 기조와 사상의 흐름의 근간엔, 공산주의 막시즘/성혁명에서 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영적 전투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고 알고 있어. 마치 조선시대의 기존의 유교적 사상 흐름에 대해, 여기와 영적전쟁을 해야 조선의 복음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고 봤어. 제사는 우상숭배니 안된다 라는 생각과, 성혁명은 동성애/막시즘이니 안된다는 생각 (사실 동성애 물결로 대표되는 성혁명도 우상숭배로 볼수 있겠지) 은 연결되는 면이 있는것 같아. 이것도 얼마든지 양자택일로 볼 수 있고, 그럼 믿는 사람이 선택해야 할 것, 싸워야 할 전투가너무나 당연하게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게 대다수 보수 기독교계, 특히 50대 이상 되신 분들이 공감하는 부분일거야.

      난 이 생각의 흐름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런식으로 세워지지 않았다는걸 (적어도 내가 보기엔) 이야기하고 싶었어. 마치 얼마나 제사를 없앴느냐, 얼마나 제사를 거부하고 갓을 자르고 하는게 조선이 더 복음화된 척도가 아니였듯이. 수많은 선교사들의 순교와 한 영혼을 향해 나가는 십자가들이, 제사와 싸운 영적전투(?)보다 더 영적전투였을수 있듯이. 우리가 싸울 싸움과 선택할 전략이 뭘지 고민해본 거였어.

      4. 이건 각자에게 주신 각자의 몫이 있을듯. 억지로 할필요도 없고 억지로 안할필요도 없고. 마음 지키면서, 하지만 또 정치나 세상일에 무관심한 크리스천이 되어서는 안되겠지. 결국 우리 형제자매부모자식이 사는 세상이고, 우리가 사랑하고 껴앉아갈 세상이니.

      5. 한가지 수정의 커멘트들을 보고 느낀건, ‘강요’에 대한 강한 거부반응(?) 이런거였어. Am I getting it right? 기독교가 이기적인 종교로 낙인찍히는데는 진짜 기독교가 구원이란 이름으로, 종교란 이름으로, righteous란 이름으로 쉽게 판단하고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무조건적으로 강요(?)한 부분은 분명히 있었고 반성해야 할거야 특히나 한국 개신교계에서.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강요하지 않지. 우린 사랑하고 섬기고 항상 gentley 증거하고, 간증하며, invite할 뿐이지. 강요하지 않되 예의차리며 거리두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관심가지고 기도하고 기다리며 사랑하는 삶, 중보하고 희생하는 삶, 그런삶이 우리가 갈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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