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과 목적#6 – 복음은 별볼일 없는것을 No하고 더 나은것을 Yes로 택하는것

이번글은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 6편이다. 내 주위 사람들의 고뇌와 번민을 들으며 느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묵상하다가 쓰게 된 글이다. “너무 바빠. 별로 재밌는것도 없어. 남들은 다들 제자리를 찾고 잘 사는것 같은데 나는 나이만 먹는것 같아서 초조하기도 하고 그렇네. 이뤄논건 없고 삶이 정체된것 같아서. 뭐 인생 별거 있냐”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나 자주 듣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시간도 없고, 마땅히 할말도 없어서 그냥 건강이 최고다, 그래도 우리가 이런건 있지 않냐, 잘하고 있다, 이런 상투적인 인사나 큰 도움안되는 위로로 대화를 끝내기 일수다.

죽을만큼 열심히 해봤어? 인생 만만치 않아. 죽어라고 살아야 겨우 남들만큼 살까말까야.” 이런 생각을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다가 지쳐버린 친구에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아래 그 여섯번째 이야기를 나눈다. 종교는 결국 인간성을 억압하지 않아? 너무 힘들고 너무 고리타분한 길 아니야? 이 질문에 대답한다.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시리즈:

종교는 인간성을 더 억압하고 제한하는거 아니야? 너무 숨막힐것 같아.

기독교가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압제들을 만들어내고 있는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막말로 교회와 성경이 가장 사람들을 압박해온거 아니야 – 자유를 주기는 커녕? 요새 이야기하는 소위말해 성소수자 이야기만 해도 크리스천들만 목숨걸고 반대하잖아. 여성을 억압한것도, 성에 대해 터부시 한 것도,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옹호한 것도, 다 크리스천들 아니야? 이런걸 볼때마다 난 무신론자들이 더 자연스럽고 더 당당하고 더 정의롭고 더 솔직한 것 같아.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아집과 위선의 집합체 같고. 사실은 자기들이 더 부패하고 더 호박씨 까면서 겉으론 정의롭고 겉으론 착한 척 하는 꼴이라니. 그걸 어떻게 설명할거야?

그리고 이런 거창한 이야기는 차지하고라도, 난 너처럼은 못살아. 술도 안먹고 야한 동영상도 안보고 주말에 좀 놀고 즐길때 그러지도 않고 교회가고, 또 뭐? 낮은자리로 가고 희생하고? 난 그냥 나대로 살래. 크리스천의 삶은 숨막혀 보이고 재미도 없고 낭만도 없는것 같아. 그런 삶은 매력없고 안끌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져.

자주 듣는 지적이고 질문이다. 결국 삶이 더 고리타분해지는게 아닌지. 너무 많은 것들에 No라고 해야하는거 아닌지. 그런 모습이 더 부자연스럽고 위선적이지 않은지. 그리고 인간성을 억압하고 인간의 자유와 본능을 제한하고, 수많은 압제를 양산하고 있는건 아닌지.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종교는 억압을 정당화하는 장치이다. 궁극적인 해방 – 인간 해방이 있을때, 종교는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이건 더 나은것을 Yes로 택하는 거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Jay Stringer의 Christian Sexuality 인터뷰

원하지 않는 성적인 행동/습관들 (Unwanted)이 곧 힐링으로 가는 실마리” 라는 내가 “성” 관련 주제에서 거의 가장 좋아하는 책을 쓴 저자 Jay Stinger는 크리스천의 성 사역에서 진행한 위 인터뷰에서 우리가 성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을 No에서 Yes로 바꾸자고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를 좀더 들어보자.

원하지 않는 성적 행동/습관들 – 그게 자위든, 외도든, 특정 포르노 소비든, 성적학대나 상상이든 – 을 가진 수천명이 사람들을 만나고 조사하고 상담하면서 공통적으로 배운게 있어요. 그건 그 행동들에는 뿌리가 있고 이유가 있다는 거에요. 그걸 그냥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하거나, 단순히 찍어누르려 해서는 절대로 다스릴 수 없어요. 오히려 키울 뿐이죠.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해요. 그걸 원하는 스스로의 욕구에 아주 깊숙히 귀 기울이는 거죠. 난 왜 이게 좋지? 난 왜 이게 끌리지? 그 질문이 없이는 회복도 있을수 없어요.

질문할 수 없는 환경, 억압적인 가정환경이나 종교 규율하에서 자란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반복하는 비율이 그렇지 않은 환경에 있던 사람보다 몇배이상 높게 나와요. 억압과 억제는 절대 해결책이 아니에요.

바다에서 비디오를 찍다가 백상어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되는지 아세요? 도망가면 죽을수도 있어요. 상어한테 직주행해서 상어 코와 카메라를 부딪히면 상어가 깜짝 놀라서 도망가요. 단 한번도 자기한테 정면 질주하는걸 본적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를 쫓아오는 수치심도 마찬가지에요. 숨길수록 더 커지죠. 막지 않고 초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하면 거짓말처럼 없어져요.

그의 접근법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즉 “하지말자”가 아니라, “왜 하지?” 라는 초청이었다. No가 아니라, Why였고, Why를 통해 Yes로 가는 과정이었다.

이건 계속 소개하는 팀 켈러의 “복음에 의해 인도된 삶”에서 팀 켈러의 메세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복음은 짐을 덜어주는거야. 이것도 해야되고 저것도 해야되는게 아니야.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야. 그건 꼭 짐을 덜어줘야 해. 니가 완벽해져서 받아들이고 누릴수 있는게 전혀 아니야. 니가 완벽하지 않다는걸 아는 순간 오히려 받아들일 수 있는거지”

세상의 성과 복음의 성 – 더 아름답고 충만한 성에 대한 Yes

세상이 말하는 성과 복음이 말하는 성을 조금더 뜯어보면 이것이 단순히 No가 아니라 더 나은 것으로의 Yes임을 알 수 있다. 세상의 성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육체에 솔직하자. 성을 해방하여 자유롭게 성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자.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다면 욕구에 충실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성 관념은 “진짜 소중한 것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 great power comes with great responsibility” 라는 스타워즈에 나올 법한 말과 오히려 더 일맥상통한다. 즉 진짜 성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평생 함께하겠다는 언약의 관계하에서만 누렸을때 본연의 자리를 찾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진정한 기쁨은 받는것보다 주는데에 있는것 처럼 (그게 어려울지라도), 성과 같은 부분도 내가 단순히 내욕구를 채우는데 (그게 포르노를 보고 자위를 하는거든, 서로 아무런 제약없이 friends with benefit 같은 관계에서 즐기며 소비하는 것이든) 쓰는것이 진짜 본연의 자리가 아니라, 내가 괴로울때나 힘들때도 희생하며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한 관계에서 상대를 섬기는데에서 향유되는 것이 본연의 자리를 찾은 것이고 그제서야 비로서 성은 진정한 기쁨과 진짜 맛을 선사할 것이라고 본다. 적당한 것 (Mediocre) – 소비하는 성 – 에서의 타협을 거부하고 진짜 – 희생하고 책임지며 하나됨을 누리는 성 – 를 택하자는 것이다.

세상의 일과 복음의 일 – 안간힘 쓰지않고 기쁨과 재미로, 진정 나된 모습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며 주위를 사랑하는 일로의 Yes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복음은 No가 아니라 더 나은 것으로의 Yes임을 얼마든지 엿볼수 있다. 일을 예로 들어보자. 일에 “복음, 기독교”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런 반응을 종종 접한다

“뭐 돈 많이 벌거나 성공하는게 별 가치가 없다거나 세속적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거야? 그런 삶은 No이고 더 거룩하고 신성한게 있다 뭐 그런? 난 그런 생각이 더 잘못이라고 봐. XYZ봐봐. 성공해서 주위에도 베풀고 얼마나 좋아. 그런반면, 크리스천들은 종교행위 하느라 일도 열심히 안하고 때론 주위에 민폐나 끼치고 그런거 아니야? 그런거엔 아무 관심 없소이다. 결국 최선을 다하는게 답이지 그 이상 뭐가 있다는거야?” 복음 같은 허황된 소리를 받아들여서 세상의 성취에 대해서 디스카운트 하고 대충사는거, 이건 진짜 구리다.

세상을 보는 2가지 렌즈

위는 일전에 소개한 적 있는 필자가 애정해 마지않는 2×2 매트릭스다. X축은 부족과 풍요를 나타내고 Y축은 내것과 사회를 나타낸다. 복음 – 기쁜 소식 (구세주가 모든것을 이루셨고 우리는 받아들임으로써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고 살 수 있다 – 으로 세계를 보지 않고서는 우리는 세상을 자원의 유한성과 경쟁사회로 대표되는 “부족함 (X축 왼쪽)”으로 보게된다. 거기서 내것에 초점을 맞춘 삶은 1 – 좌측 아래쪽이 되고, 이웃에 관심을 향한 삶은 2 – 좌측 위쪽이 된다. 하지만 복음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우리는 4 – 우측 위쪽의 삶을 살 수 있다.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렇게 안간힘 쓸 필요 없어. 남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성공의 찬란한 광채를 쫓으며 스스로를 채찍질 할 필요도 없어. 이미 너의 모든 빚은 탕감받았고 나는 있는 그래도 너를 사랑하며 평생 사랑하고 함께할거야. 자 이제 프로가 되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애쓰듯 하던 그 스윙을 버려. 그리고 그 기쁨과 안식 안에서, 나의 사랑 안에서, 애처럼 한번 해보는거야. 뭐가 제일 재밌지? 뭐가 제일 신나니? 무슨 일을 할때 넌 가장 너됨을 느껴? 그걸 안에서 부터 한번 찾아보자. 그리고 세상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고 싶어? 그래 그게 너의 일이야. 넌 결과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그 일로 인한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 또는 그 반대 (인정받지 못하는것) 에서 자유로와져서, 애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스윙할거야. 그게 최고의 스윙이야. 그리고 넌 진짜 열심히 일할거야 왜나고? 그건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고, 그 과정에서 넌 더 큰 자유와 기쁨과 사랑을 느껴갈 테니까. 너는 쫓기는 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쫓는자가 될거야.”

즉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우리는 더이상 쫓기는 자가 되지 않는다. 미래를 불안해 하지도, 결과에 안달하거나 연연하지도 않는다. 스스로가 이룬 성취를 내것으로 생각하기도, 자랑하지도 않는다. 은혜받은 그 넉넉하고 먹먹한 마음으로 마음껏 기쁨과 사랑과 헌신과 열정으로 일하게 만든다. 그게 남들이 주목하는 일이든 – 기업총수나 정치인이나 – 아니면 주목하지 않는 일이든 – 3D업종, 단순노동 일이든, 우리는 그 일의 의미를 발견하고 이미 다 가지고 은혜받은 자로서 일을 다스릴 수 있게된다. 그건 더 나은 것으로의 Yes이다.

말썽장이 아들을 혼내는게 아니라 그 에너지를 놀이로 승화하는 부모의 사랑

세상의 자녀교육과 복음의 자녀교육 – 은혜로 하는 창의적인 해방과 분출로의 Yes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예를 들겠다. 바로 자녀교육 – parenting이다. 많은 경우 부모는 자녀를 닥달한다. 수많은 룰을 들이대고, 자녀에게 좋다는 논리로 자녀의 삶을 제한한다. 하지만 복음을 진정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녀교육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위의 그림은, 위에 소개한 Jay Stringer가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서 7살짜리 아들과의 갈등을 복음안에서 어떻게 풀어냈는지 소개한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의 아들이 계속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고 사고치고 무언가를 부수고 해서 그는 아들을 훈육하다가 화내기도 하고 그 화낸걸 사과하기도 하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아들이 그에게 이렇게 도전했다. “아빠, 또 이번에도 미안하다고 하고 내일 또 화낼거지? 이제 이 반복되는 패턴은 지긋지긋해”.

놀라운 것은 이걸 그가 어떻게 핸들링 했는지이다. 그는 기도하고 고민하다가 아들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아들아, 뭘 부숴버리고 싶니? 일주일에 한번 아빠랑 뭐든 맘껏 부서버리자. 아빠가 뭔가 부수고 싶어하는 너의 욕구를 제한하고 나쁜걸로 만들었구나. 사실 그건 좋은거야. 내가 너를 바꾸려 했던건 내가 바뀌기 싫어서였어. 아빠가 바꿔볼게 한번 같이 해보자”

그리고 그의 아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빠 트로피를 부수고 싶어”

그리고 나서 그는 아들에게 자신의 트로피를 야구방망이로 부수게 하면서 그것을 같이 즐기고 축하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의 욕구는 안전한 분출구를 찾았고 둘의 관계도 더 단단해졌다.

여기서 어떤 메세지를 찾을수 있을까? 복음은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으로 초대하는 것이라는 것. 물론 적절한 규율없는 자유는 방종으로 이어지고, 크리스천의 삶에는 성경적 세계관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규율이 있다. 하지만 복음은 그 위에 있다. 그건 늘, 삶의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더 나은 Yes의 길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경찰이 아니다. 회개는 반성문이 아니다.

기독교를 단순 “종교”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라는 패키지에 따라오는 수많은 율법, 규율을 보고 NO를 본다. 이건 복음을 몰라서이다. 복음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을 몰라서이다. 그리고 이건 많은 크리스천들도 오해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싶다.

이하 회개와 하나님에 대해 돌아보며 No가 아닌 Yes를 택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얼마전에 나와 너무 친한 한 지인이 내게 남긴 말이다.

난 죄인이고 난 늘 무슨 벌레만도 못한 존재고, 난 하나님 앞에서 늘 죄책감과 죄의식에 떨어야 하고, 그런게 도무지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이거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아? 이게 신앙생활이라고? 난 무슨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줄 알았는데 마음에 불편함만 찾아왔어.

그녀가 보고 들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항상 No라고 사사건건 하고, 엄청나게 어려운 잣대와 기준을 늘 요구하고, 잘못하면 그것에 대해 회개를 요구하거나 징계를 요구하는 그런 경찰관으로 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회개 = 사과/반성문이라고 보고, 마치 어렸을때 그 쓰기싫은 반성문 숙제를 받은것처럼 접근하고 있지는 않나? 이런 생각과 접근은 복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을 오해한 부분이 크고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어렵게 만드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검사나 경찰관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의 하나님은 공정한 심판관이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엄청나게 무서운 존재고, 그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근원이 될 정도로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한치의 죄도, 한치의 어긋남도 절대 허용하고 함께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판사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최고의 변호사이다. 직접 피고석으로 와서 대신 모든 값을 치루신 분이다. 그분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희생시킬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왜 모두에게 기쁨이 될 수 있는지

김학철 교수는 잘잘법에서 성탄이 심지어 당신에게도 기쁠수 있는 이유 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을, 복음을 소개한다. 누가복음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모든 잘못을 저지르고 패역무도한 아들을 아무 꾸짖음 없이 그냥 안아주고 사랑해주고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바로 그 은혜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고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는 절대신이라는 것이 크리스천의 믿음이고, 그렇기에 예수님이 태어난 성탄이 모두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복음을 잘 설명해준 영상이었다.

우리에게 무한대 마이너스 통장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회개는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는것

죄=빚. 우리는 빚갚음을 받은 자이다

일전에 소개한 바 있는 죄=빚에 비유한 김학철 교수님의 설명이다. 김학철 교수는 크리스천이 이야기하는 “죄”의 원문을 보면 “빚”이란 뜻이 있음을 주목한다. 그리고 성경의 비유에도 있듯이 복음은 말도안되게 큰 빚을 탕감받은 것을 의미하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속주 (죄를 사하여준 하나님, Redeemer = 빚 갚아주는 탕감자) 라고 부른다. 이런 비유를 해보면 어떨까. 예수그리스도의 빚 갚음은 온전하고 영원하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빚을 져도 (즉 죄를 지어도, 잘못을 해도) 그분은 다 갚아주신다. 아니 이미 다 갚으셨다. 이미 무한대 백지수표를 쓰고 무한대 마이너스 통장을 여셨다. 그래서 우리의 수조원대 대출이 다 탕감됐고 앞으로 또 돈을 꾸더라도 그건 대출로 잡히지도 않는다. 우리가 수조원 빚을 탕감받고 또 정신없이 수백억원대의 빚을 지고는 (세상에서), 정신이 번쩍 들어서 하나님 앞에가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 너 빚 없어. 예수그리스도 – 내 아들이 – 너가 평생 빚질수 있는 그 모든거 다 탕감했어. 라고 말씀하신다. 그게 계속 반복되는것. 말도안되게 도저히 우리가 이해하고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딜이 맺어졌다. 그 누구도 우리한테 돈 내놓으라고 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우리를 채무불이행자로 기소하고 구속할 수 없다.

그분이 바라시는것은 단 두가지다. 하나, 혼자 빚 가지고 끙끙대지 말고 나에게 오라고. 그럼 내가 너 빚 다 갚아졌다는걸 다시 알게해 주겠다고. 둘, 그러니 너도 남이 너한테 조금 빚지면 그냥 받지 말라고. 그냥 손해보라고. 니 앞으로 백지수표, 무한대 통장 있으니 그냥 좀 봐주라고. 그게 빚갚아준 예수님의 바람이고 그게 너의 마음에 평화를 주는 길이라고.

그래 하나님은 말도안되게 어려운 기준을 들이대며 No라고 이야기하고, 반성문을 쓰게하는 그런분이 아니다.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 2장을 어떻게 쓰지 – 이렇게 회개를 접근하는건 그분을 너무나 오해한 것이다. 회개는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원어로 회개는 metamonia로 정신이나 삶의 방향이 바뀜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회개는 “take refuge”와 동일한 용어로 시편에서 많이 활용된다. 그건 진짜에 비하면 정말 별볼일없는 (Mediocre한) 세상의 것들에서 마음을 돌이켜서 진짜를 맛보고 진짜를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새 마음을 품는걸 경험하는 것이다. 회개는 No를 통해 Yes로 가는 것이다. 회개는 엄청 좋은것이다. 그건 하나님이 친절함 (Kindness of God)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완전성을 경험하는 것, 새 생명을 주는 것이다 (관련 글 링크).

성경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회개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인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 – 부하였던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자신의 부하를 죽음으로 빠트리게 한 죄를 저지른후 1년가까이 지나 그 죄가 나단 선지자에 의해 지적당한 후 한 다윗의 회개고백이다. 자신의 죄와 잘못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다윗이 무엇이라고 했을까?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벌하소서? 아니,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나님이시여, 주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주의 크신 자비로 내 죄의 얼룩을 지워 주소서. 나의 모든 죄악을 씻어 주시며 나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소서. 나는 내 잘못을 인정하며 내가 범죄하여이런 끔찍한 일을 하였습니다.주께서 이 모든 것을 다 보셨으니 주의 말씀은 옳고주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주는 중심에 진실을 원하십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지혜를 가르치소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깨끗할 것입니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즐겁고 기쁜 소리를듣게 하소서. 비록 주께서 나를 꺾어 벌하셨으나 내가 기쁨을 되찾을 것입니다. 내 죄에서 주의 얼굴을 돌리시고 나의 모든 죄를 씻어 주소서. 하나님이시여, 내 속에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내 안에 확고한 정신을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 고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나에게 주의 구원의 기쁨을다시 주셔서기꺼이 주께 순종하게 하소서.

그래, 하다못해 예수님을 몰랐던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진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말할것도 없다. 그분앞에 나아가 마음을 돌이키는것. 그것은 반성문이 아니다.

다음편 – 소망과 목적#7 – 다른삶이 있다. 아이같은 꿈을 품고 열정, 창의성, 용기를 회복하여 낮은데로 향하자 에 계속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무언가 울림이 있다면, 무슨 이야기라도 더 해보고 싶다면, 무슨 하소연이라도, 고백이라도 해보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링크나 이메일 (san.baek@gmail.com) 으로 연락 주십사 초청한다

About sanbaek

늦깍이 크리스천 (follower of Jesus), 우렁각시 민경이 남편, 하루하율하임이 아빠, 둘째 아들, 새누리교회 성도, 한국에서 30년 살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거주중, 스타트업 업계 종사중. 좋아하는 것 - 부부싸움한것 나누기, 하루하율이민경이랑 놀기, 일벌리기 (바람잡기), 독서, 글쓰기, 운동, 여행 예배/기도/찬양, 그리고 가끔씩 춤추기. 만트라 -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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