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과 목적#3 – 증거없이는 못믿겠다고? 우리 모두는 증거없이 무언가를 믿고있어

이번글은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 3편이다. 내 주위 사람들의 고뇌와 번민을 들으며 느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묵상하다가 쓰게 된 글이다. “너무 바빠. 별로 재밌는것도 없어. 남들은 다들 제자리를 찾고 잘 사는것 같은데 나는 나이만 먹는것 같아서 초조하기도 하고 그렇네. 이뤄논건 없고 삶이 정체된것 같아서. 뭐 인생 별거 있냐”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나 자주 듣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시간도 없고, 마땅히 할말도 없어서 그냥 건강이 최고다, 그래도 우리가 이런건 있지 않냐, 잘하고 있다, 이런 상투적인 인사나 큰 도움안되는 위로로 대화를 끝내기 일수다.

죽을만큼 열심히 해봤어? 인생 만만치 않아. 죽어라고 살아야 겨우 남들만큼 살까말까야.” 이런 생각을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다가 지쳐버린 친구에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건 그 세번째 이야기이다. 어떻게 복음만이 절대 진리인걸 믿을수 있냐고? 증거없이는 못 믿겠다고? 이 질문에 대답한다.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시리즈: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믿고 있다.

팀켈러의 구글 토크 – 하나님을 말하다 (Making sense of God)

팀 켈러는 지성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구글러들 앞에서 2016년에 한 토크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증명되기는 전에는 믿을수 없다고? 난 논리로 변증된 것만 믿는다고? 아니,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믿고 있다. 신을 믿는것도, 신을 안믿는것도 믿음이다. 아래 그가든 예를 적어본다.

복음이 아무리 좋은 소식이지만 증거가 있냐고? 난 변증된 것만 믿는다고? 아니 우리모두는 무언가를 믿는다. 약자가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인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그걸 검증할 수 있나? 당연히 없다. 인간은 유물론에서 보면 이 광활한 우주와 끝없는 시간 가운데, 찰나를 사는 지극히 작은 존재이다. 개개인에게 권리가 있다는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각자 서로를 존중하고 법을 지키고 사는것이 옳은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결국 이 모든것은 하나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이다. 그리고 모든 믿음은 객관적으로 인정할만한 이성적인 이유와, 정서적/개인적 이유, 사회적 이유 등의 조합이다.

우리 모두가 결국 무언가를 믿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통찰력이다. 그는 우리 각자의 믿음이 바탕이 되는 세가지 축을 소개한다. 즉 우리 모두는 이런 일륜의 이유들로 각자의 믿음, 각자의 세계관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1. 지적인 이유: 어떤 믿음이 더 객관적인 증거들이 많은가. 어떤 세계관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이 더 잘 설명되는가.
  2. 개인적/정서적 이유: 똑같은 사건에도 우리는 다르게 반응한다 (예: 직업적 성공을 이룬 사람이 신은 없거나 굳이 필요없다고 생각할수도 있고, 직업적 성공 이상의 영적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신을 찾을수도 있다.)
  3. 사회적 이유: 주위 사람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어떻게 사는가. 어떤 예들을 봤고 어떤 문화권에 속해 있는가 등

아래 그림은 조금더 다른 각도에서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보여준다. 포인트는 이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복잡한 것들의 상호작용이다. 결코 모든것이 지식에 의해서도 아니고 모든게 환경에 의한것도 아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서 온건지 보여주는 다른그림

당연한 것은 없다.

“인간의 권리는 절대적이다. ” “다른사람의 결정이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와 같은 주장은 다 믿음의 영역이다. 그건 사실의 영역이 아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 주장을 객관적으로 완벽히 변증할 것인가? 그리고 이런 믿음은 일련의 복잡하고 다양한 전제가 섞인 것이기에 자신이 보기엔 당연해 보여도 조금만 더 파고들면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민감한 주제일 수 있는 성소수자 (또는 동성애 등) 인권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인간의 권리는 절대적이다. ” “다른사람의 결정이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라며 인권운동으로서 LGBTQ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동성애자의 인권이 존중되어야 해요. 그들도 똑같은 자기결정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그들의 결혼은 당연히 합법이 되어야 해요. 우리의 성은 각자에게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므로 성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학교와 사회에서 가르치고 모든 차별의 전제가 되는 것은 없애야 해요.” “퀴어축제에 동참할 것인가요? 인권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성소수자의 인권을 대변하는 퀴어축제에 참가하지 않을수 있죠?”

언뜻보면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주장에 대해 만약 이렇게 물어본다면?

  • “그렇다면 흑인으로 태어나 자신이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백인으로 대우받고 백인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나요? 학교에서 우리의 인종은 우리가 타고나는게 아니라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고 피부색을 바꾸는 수술을 하는 것을 축하받을 일로 사회에서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 “그 결정이 남한테 피해를 준다는것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죠? 그러면 자신이 여성이라고 생각하면 군대를 안가도 되나요? 여자화장실이나 목욕탕에 가도 되나요? 청소년들 중 성정체성 혼란을 겪는 아이들에게 호르몬치료를 하는게 옳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만약 옳다고 생각하여 호르몬치료를 사회적으로 권장한다면, 나중에 다시 타고난 성으로 돌아가려해도 갈수없어진 아이들은 누구의 책임인가요?”

결국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주장, 이 믿음도 조금만 들여다 보면 이다지도 헛점이 많다. 우리는 다 각자 무언가를 믿고 있다.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만 “믿음의 비약”을 했고, 과학기술의 진보나 눈에 보이는것만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런 “믿음의 비약”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은 없다.

신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냐고? 그럼 없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

위의 생각을 조금만 발전시키면 통상 접하는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된다. 하나의 진리만 있는것을 어떻게 알수 있냐고? 신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냐고? 그렇다면, 없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 없다는게 증명이 되었나?

팀켈러의 구글 토크 – 하나님을 말하다 (Making sense of God)

다시한번 팀켈러의 구글 토크, 2008년에 한 것을 가져온다. 여기에서 팀 켈러는 신의 존재를 밎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믿음인지 날카롭게 드러낸다.

세상이 부조리하니 선하고 완전한 신은 있을수 없다고? 신이 인간이 모르는 그 어떤 선한 목적을 가졌는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을 증거할 수 없으니 신이 없다고? 창조주 신과 인간의 관계는 셰익스피어와 햄릿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햄릿은 셰익스피어가 직접 그 안에 자신을 쓰기 전까지는 그 존재를 알 수 없다. 증거할 수 없으니 없다? 그것 자체가 엄청난 증거할 수 없는 전제들을 가정한 믿음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것이 있다고 믿는것보다 더 큰 믿음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래는 그가 드는 몇가지 이유이다. 이 이유들을 들여다 보면 신의 존재를 믿는것도, 믿지 않는것도 다 믿음의 영역임이 더 명확해진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 인권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진화론으로? 자연법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자연은 오히려 적자생존이 아닌가? 법률로 합의된 공동체의 유익을 드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인권자체가 대중의 이익에 어긋나더라도 개개인에게 부여하는 권리가 아닌가? 마치 노예제가 영국전체국민들 대부분에게 이익이었지만 인권에 의해 폐지운동이 일어난것 처럼? 법률과 공동체의 유익은 결코 절대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양심의 존재? 내재한 도덕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마찬가지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곤 우리 모두에게 있는 양심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모든게 상대적이 될 뿐이고 절대적 기준은 없다.

우주의 탄생, 빅뱅도 마찬가지다. 우주의 탄생을 우연이라고 보는것은 가능하나 가능성은 지나치게 낮다. 자연에 존재하는 많은 규칙들을 설명할 수 없는것도 마찬가지이다.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질서와 규칙이 자연과 인체에도 있다.

아름다움을 향한 태생적인 욕구, 무언가를 소망하는 우리의 갈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무신론 진화론에선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진화에 도움이 되었기에 발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성은 절대적인가? 이성또한 진화에 도움이 되었기에 발달되어온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그럼 이성의 힘, 그 이성으로 우리가 지금 논증하고자 하는 자연선택을 우리가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가?

하나의 진리만 존재한다는 생각은 편협한 사고방식이라고? 상대주의 – 절대적 진리는 없고 모든게 상대적이란 생각 – 이것 자체가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상대주의를 절대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질문할지 모른다. “니가 크리스천인건 니가 기독교 국가에 태어나 그런 문화와 사고를 접했기 때문이지. 니가 아프간에 태어났으면 넌 이슬람교일거야. 결국 다 어디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영향 받는 상대적인것 아냐? 그래서 난 절대적 진리를 믿을수 없어.” 이 비판에 대해 팀 켈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의 믿음은 지적인 변증의 결과이고 당신의 믿음은 문화적 배경의 영향이라는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아니, 분명 사회적인 이유가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우리는 모두 지적인 이유 – 논리와 논증을 통해, 개인적 정서적 이유, 사회적 이유등을 조합하여 세계관을 형성하지. 그럼 모든 믿음이 결국 상대적이라는 너의 세계관은? 그건 절대적인 진리야? 너의 논리로 따지면 너의 그 세계관 또한 문화적 배경의 영향일텐데, 그게 맞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하지?

즉 종교적 믿음은 역사와 문화에 휘둘리므로 모든 견해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다원주의, 그 다원적인 믿음또한 사실은 역사와 문화에 휘둘리므로 역시 진리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가. 다원주의적인 신념또한 신뢰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믿음이 아닌가.

상대주의 – 절대적 진리는 없고 모든게 상대적이란 생각 – 이것만이 진리라고 한다면 이것 자체가 편협한 사고방식이 되고 만다. 상대주의를 절대화 했기 때문이다.

믿는건 좋은데 제발 혼자만 믿고 주위에 강요하지 말라고? 우리 모두는 우리가 보기에 옳고 좋은 그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누고 있다. 그게 우리의 갈망이다.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믿음건 니 자윤데, 제발 개인적인 영역에서만 간직하고 주위에 권하지는 말라고.

그 생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또 세상에 무언가를 나누고 있다고. 무언가를 셀링 (selling)하고 있다고. 정말 좋은것은 정말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누고 싶은게 우리의 본능이라고. #Blacklifematters가 온 소셜미디어를 도배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광화문을 가득했던 그 촛불의 물결이나 태극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월호 리본이나 #정인아사랑해 는? 아니 이렇게 거창한 정치적구호나 인권운동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올리는 음식사진은? 여행사진은? 부동산이나 주식정보는? 나는 소셜미디어 안한다고 혹자는 이야기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당신도 누군가와는 당신이 사랑하고 당신이 보기에 좋은 것을 나눌것이다. 나누고자 할 것이다.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있는 갈망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보기에 옳고 좋은 그 무언가를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누고 있고 나누고자 한다.

복음을 강요해서는 안되고 강요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권하는 것까지 막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강압이고 폭력이 아닐까?

한가지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리고 모든 세계관은 어떻게든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있다. 신앙의, 세계관이 철저한 사유화는 불가능하다.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확신을 남겨둔 채 사회에, 공적인 논의의 장에 나오는건 불가능하다. 예들들어보자. 이혼법률을 만들때 결국 우리는 결혼의 목적을 무엇으로 보느냐 – 개인의 행복이냐 가정을 통한 사회의 발전이냐 에 따라 이혼법률에 대한 시각이 결정된다. 회사의 정책을 만들때 – 모든 논의가 허용가능한가 어떤 시각은 정치적을 옳지 않고 배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 이런것 자체가 세계관의 충돌이다. 사유화 해야 한다는것 자체가 강압적이고 종교적이며 인간소외적이다.

선택 없이는 “앎”도 없다. 데이터 없는 머신러닝은 앙꼬없는 찐빵이다.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그래도 안믿기는데 어떻게 하냐고. 그리고 진짜 이 길이 맞는 길인지, 어떻게 아냐고. 그거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일단 선택해보면 안다!

믿음과 선택, 행동,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한 믿음의 바퀴

필자가 머신러닝 회사에서 머신러닝과 엔진을 맡고있는 프로덕트매니저인 만큼, 잠깐 머신러닝 비유를 해보고자 한다. 우리의 뇌에서 믿음의 영역은 하나의 머신러닝으로 볼 수 있다. 믿음은 판단을 낳고, 그 판단은 행동 또는 비행동을 낳고, 행동/비행동은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다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거나 약화시킨다. 이렇게 데이터가 계속 쌓이면서 우리의 믿음은 원래의 방향으로 확고해지거나 또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머신러닝을 해본사람이라면 다 아는 답이 있다. 데이터가 왕이다. 데이터 없는 머신러닝은 앙꼬없는 찐빵이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믿음의 “선택” 없이는 얻을 수 없다.

Truth, Knowledge, Belief

위 그림은 모두가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실 (Truth)와, 믿음 (Belief), 그리고 믿음과 사실이 만나는 지점 – 앎 (Knowledge)를 설명한다. 왜 앎이 믿음과 사실이 겹치는 영역에 있을까? 믿음이란 선택을 통해서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한 사람만이 진정한 “앎”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앎”은 내게 하나의 살아있는 사실 (Truth)이 된다. 믿음이 선택 없이는 “앎” 이 있을 수 없다.

이런 것이다. 태평양 적도부근 섬에 사는 친구에게 눈 (Snow)이 뭔지 아냐고 물어보면 눈을 TV에서 봤다. 눈은 이런저런 거다 라고 지식적으로 이야기했다고 해보자. 그리고 자기는 눈은 관심 없다고 했다고 가정하자. 그가 과연 눈을 알까? 아니, 그런 지식은 진정한 앎의 영역이 아니다. 그가 캐나다 록키산맥에 가서 눈밭에서 한번 스키타보고 눈싸움 해보면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난 이제야 눈이 뭔지 알 것 같다고.

한번도 사랑은 없다고, 난 사랑따윈 필요없다고 한 친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던 그가 어느순간 완전한 사랑에 빠져서 바로 결혼해 버리고 이런이야기를 남긴다 “난 사랑이 뭔지 전혀 몰랐어. 이제야 조금 알것 같아”. 그래, 이게 앎이다.

물에 몸을 담궈보지 않고 물을 알 수 없다. 겉에서 맴도는 삶, 선택하지 않는 삶에는 앎이 없다. 데이터도 없다. 그런 삶이야 말로 삶을 낭비하는 모습이다. 무엇에도 커밋하지 않고 어떤 선택도 하지않는 삶. 그건 엄청나게 파워풀한 우리의 뇌와 영혼 (머신러닝)에게 데이터하나 주지 못하는 앙꼬없는 찐빵이다.

결국 중요한건 어떤선택이 가장 우리를 온전케 하고, 세상을 잘 보여주는지 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믿고 무언가를 선택하고 살아간다. 크리스천이 절대 부정못할 증거를 제시못하는 것처럼 다른 모든 믿음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간이 무릎을 꿇을만한 변증은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봤을때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믿음의 선택이, 어떤 세계관이 나와 우리를 가장 온전케 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잘 보여주는지가 아닐까.

그래서 팀 켈러는 하나님을 말하다 (The reason for God)에서 아래와 같은 명문을 남겼다. 내가 무릎을 치고 공감한 표현이다.

신앙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들 반응하지. 아,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어 신앙을 찾았구나. 난 그런거 없어도 괜찮아.

하지만 그렇지 않아. 내가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어. 오히려 기독교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이 더 잘 보이고 훨씬 더 잘 설명되기 때문이야.

그렇다. 나는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이다. 믿어지기 전에는 믿을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러던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어떤 체험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으로 보는 세계가 훨씬 더 이성적으로 세상을 잘 설명한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어떤 모델이 세상을 잘 설명하고 어떤 모델이 더 나와 우리를 온전하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렇게 세계관과 믿음을 접근하는 것이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했을때, 우리의 모델이 점점 더 많은 데이터로 점점더 고도화 될 수록, 우리의 앎은 어떤 길이 어떤 선택이 어떤 믿음이 세상을 더 잘 설명하고 나와 우리를 더 온전케 하는지 확실히 알려준다.

은혜의 신의 존재를 암시하는 실마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러면서 팀 켈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을 말하다 (Making sense of God)에서 비판적인 합리성을 통해 하나님이 남겨놓은 실마리를 발견해보자고 초대한다.

극작가를 소설안에서 찾을수는 없지만 소설인물을 통해 작가를 유추할수는 있다. 태양을 직접볼수는 없지만 태양이 비추는 세상을 봄으로써 태양의 존재를 알고 느낀다. 하나님의 존재의 가능성과 존재의 실마리를 추론하는것도 비슷한 방법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크게 다음 여섯가지 이유를 든다. 하나하나 다 나누자면 너무 길어질 것이라 여기선 간략한 목차로 대신한다.

  1. 하나님의 존재를 암시하는 실마리들 – 만물에는 하나님의 실존을 가리키는 신의 지문이 있다 (우주의 탄생, 아름다움의 존재, 자연의 법칙들, 인간의 이성, 이런것들은 신의 지문으로 볼 수 있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 – 누구나 이미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양심, 인권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을 봄)
  3. 죄된 본성 – 마음의 빈 공간은 하나님이 아니면 죄로 채워진다 (우리에겐 누구나 존재를 증명하려는 정체성을 찾으려는 욕구가 있다. 그리고 그걸 하나님이 아닌 다른것로 채웠을때 공허함과 불안정을 경허한다. 그건 그 빈공간을 채울 완전한 존재, 하나님을 암시한다)
  4. 종교와 복음 –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복음이다 (죄의 해결책은 은혜이다. 행위중심 신앙은 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건 단순 종교가 아닌 은혜의 하나님, 복음을 암시한다)
  5. 십자가 –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예수다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 – 이건 참다운 용서는 큰 희생을 치뤄야 한다든것, 참다운 사랑은 인격적인 교환이란 것을 보여줬다. 십자가의 방식, 그 역사와 실존은 은혜이고 사랑이신 그분의 존재를 암시한다)
  6. 부활이 던지는 도전 – 예수님의 부활은 완벽한 검증을 거신 사실이다 (부활에 대한 기록은 수많은 검증을 거친 사실이다. 이걸 믿을 이유가 안믿을 이유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위 구글 토크 에서 30-40분에 보면 팀 켈러는 은혜의 기독교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아래 세가지로 이야기한다.

  •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드는 믿음 (The faith it takes to doubt it) -> 위에서 살핀바 있다.
  • 하나님이 없을때의 문제 (The problem we have without it) -> 앞선 글에서 복음 없이는 우리 개인과 사회에 진정한 소망이 없음을 이야기했다.
  • 은혜의 하나님에게서 보는 아름다움 (The beauty we see in it) -> 십자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복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슴에 반응한다.

아래는 기독교의 은혜의 하나님에 대한 7가지 증거를 어딘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출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팀 켈러의 리스트 처럼 이 리스트 또한 내게 큰 울림을 줬다. 아래 소개하며 3편을 마무리한다.

God의 존재에 대한 7가지 증거

The assurance of love – It’s not a deduction. You don’t have to worry. 

(사랑의 증거, 확신. 사랑은 끝이 없다. 결코 내가 무엇을 잘못하면 조금씩 점수가 깎이는 그런게 아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오늘 잘못해도, 내가 점수를 잃은건 하나도 없다. 그분의 나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고 항상 넘친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진다. 걱정하지 마라. 잘못한거 없다. )

The guidance of Scripture

(성경에 가르침과 가이던스가 있다. 그걸 믿고 따라가면 된다. )

The shape of your strengths

(당신의 강점을 들여다 봐라. 그게 Gift다. 그냥 있는게 아니다. 다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 수제 customized 된 선물이다. 뜻있는 곳에 이롭게 쓰라고 내게 주어진 거다. 그걸 만들어가보자. 소중하게 쓰자. 나혼자 잘먹고 잘살라고 주어진 능력들이 아니다. 그걸 찾고 인정하는 것은 it takes incredible courage. But once you realize it, acknowledge it, it gives you enormous joy.)

The reality of your circumstances

(너의 주위 환경의 현실을 잘 들여다봐라.)

The wisdom of community

(안좋은 결정을 내리는 가장 빠른 길은 고립되는거다. 너는 도움이 필요하다. )

The presence of peace

(마음의 안정(consolation)을 찾아가고 그 소리에 귀기울여라. 절대로 좌절이나, 분노나, 공허함(desolation) 에 결정을 내리지 마라. )

The goal is His glory, not yours

(결국 삶의 목적은 그분, 하나님의 영광이지 너의 영광이 아니다. )

다음편 – 소망과 목적#4 – 세상의 악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분의 절대성과 은혜에 자유와 소망이 있다 – 에서 계속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무언가 울림이 있다면, 무슨 이야기라도 더 해보고 싶다면, 무슨 하소연이라도, 고백이라도 해보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링크나 이메일 (san.baek@gmail.com) 으로 연락 주십사 초청한다.

About sanbaek

늦깍이 크리스천 (follower of Jesus), 우렁각시 민경이 남편, 하루하율하임이 아빠, 둘째 아들, 새누리교회 성도, 한국에서 30년 살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거주중, 스타트업 업계 종사중. 좋아하는 것 - 부부싸움한것 나누기, 하루하율이민경이랑 놀기, 일벌리기 (바람잡기), 독서, 글쓰기, 운동, 여행 예배/기도/찬양, 그리고 가끔씩 춤추기. 만트라 -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6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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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asdas

    실존주의 철학을 공부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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