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 읽기에 앞서 제 블로그에 처음 들어오시는 분들은 부디 공지사항 에 있는 글들을 읽어봐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에서 이런 글들을 쓰고 있고 제게 연락주시고 싶은 분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것 같은지 제 생각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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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글은 지난 글 현재와 영원, 과거와 미래의 후속편이다. 시간에 대해 묵상하다 보니 또하나의 큰 꼭지와 질문이 과연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기독교에서는 흔히 모든것이 하나님의 섭리고 예비하심이고 모든것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다 정해놓으셨으면 자유의지가 무슨 소용이지? 미래가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건가?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주시는 것도 하나님이 다 정하신건가? 그럼 나의 기도는 나의 노력은 다 무슨 소용이지? 우리 어머니가 본인은 예수 믿는사람들이 이런이야기 하는게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며 나한테 물으셨던 질문이다. 그래서 한번 생각을 정리해봤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이건 내가 부족한 지각과 이해를 바탕으로 정리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얼마든지 틀릴 수 있는 견해이다. 어떤 커멘트나 토론이든 환영한다.
분명 하나님은 모든걸 창조하셨고 모든걸 예비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천지와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나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결국 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모든것. 하나님이 내 갈비뼈를 통해 만든 민경이를 내게 주셨고 하나님이 부모님 뱃속에서 내게 생명을 주셨고 모든 기회와 만남들을 예비하신다. 내가 어떤 일이든 해내거나 내 삶에 어떤 열매가 있거든 그건 다 하나님 은혜고 은총이고 예비하심이고 인도하심이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이나 무슨 위로나 성령의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러나 나의 삶은 분명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영향받는다. 신앙은 선택이다. 삶도 선택이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누리는지 여부는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달려있다. 내가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과 내게 하시는 말씀을 민감하게 듣고 반응하는지, 아니면 내가 그냥 내 멋대로 사는지에 따라 어떤 삶을 사는지는 분명히 달라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내가 내 삶의 모든걸 결정할 수 있는건 분명 아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키를 한자 더 자라게 할수도, 갑자기 오는 질병이나 불행을 막을수도 없다. 단지 내 삶에는 분명 내가 결정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를 좋아하는 이유중 하나는 너무나 많은게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모든것을 예비하셨고 나의 삶의 모든 과정과 열매들은 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지만, 그렇다고 모든게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의 삶은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영향받아 간다. 마치 이휘재의 인생극장처럼 나의 선택에 따라 다른 결과들이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어떤 큰 방향성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셨을지 모르지만 분명 I have stake in my life. 다만, 하나님은 모든걸 이미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지금 이순간, 내 삶의 미래와 영원에 일어날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신다. 그건 그분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계시록이 쓰일 수 있는 것도,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것도, 미래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다 아시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사주팔자나 점쟁이들의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도 신내리고 사주보시는 분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된 적이 있는데 참 좋은 분이고 정말 신통(?) 하시다. 내 짧은 경험으로 분명 영의 세계는 있으며, 그런 신내린 사람들은 아주 신통하게도 과거나 미래를 알아맞추거나 예측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성경에서도 신접한 여인이 죽은 영을 불러내고 예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하는지라.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사무엘상 28장)”. “영”의 세계에서 보고 경험하고 알 수 있는 것들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을 수도 있을것 같다. 그리고 사람이 죽고 육신이 없어지고 영만 남게 되면 영이 경험하는 백만년의 시간이 인간세상의 백만년의 시간이 “영” 에게는 1초같이 느껴질지도 모르리라. Anyway, 무당이나 신내리신 분들이 미래나 과거를 알아맞춘다고 할지라도 난 그것이 모든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는 것은 아닐수도 있을것 같다. 나의 “영” 과 “육” 이 미래와 영원에 어떻게 살아갈 지에는 나의 “자유의지”가 분명 영향을 미친다. 다만 영의 세계에서 미래의 일들이나 과거의 일들을 어느정도 볼 수 있음이리라…
아래는 김병제 목사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여정” 이란 책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미래를 아시지만 결코 미래를 다 정해놓지는 않으셨다는게 그 요지이다. 별 둘 사이를 두 발로 딛고 서서 빛을 보고 계신 하나님의 비유가 압권!
어떤 별의 탄생은 그 별의 폭발과 함께 나타난다. 그 별의 폭발이 우리눈에 보이기 까지는 17만년이 걸린다. 그 별의 폭발이 만들어낸 빛은 17만년이 걸려서 지구의 우리눈에 보이게 된다. 그때 그 별과 지구 만큼 거대한 분이 계셔서 그 두별 사이를 그의 두발로 더디고 서 계시다고 생각해보자. 그분은 17만년 전의 과거와 17만년후의 현재를 동시에 보신다. 그 별의 폭발을 보시면서 동시에 지구를 바라보신다. 폭발의 순간에 빛은 지구를 향해서 그분의 다리 사이로 날가지만 두개의 다른시간을 그분은 동시에 보신다. 더 나아가 그런 공간조차 벗어난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 이를 보신다면 시간은 전혀 그 울타리를 벗어나서 다른 차원이 되고 만다.
하나의 소설 이야기를 해보자. 주인공 A가 사무실을 나와서 B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C에게 돈을 주었다. 이는 세가지 연속된 사건들이다. 사무실에서 나옴, 만나서 대화를 나눔, 돈을 줌이라는 세가지 사건이 소설에서 그려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를 시간에 따라서 하나씩 경험한다. 그러나 소설작가는 그렇지 않다. 작가는 이 세가지 사건을 거꾸로 써 내려갈 수도 있고 동시에 경험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소설의 작가시다. 우리의 행동을 통째로 아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을 미리 아신다. 하나님은 전체를 한꺼번에 보신다. 하나님께는 시간의 미래가 없다.
자유의지, 사람의 자유는 어떤경우에도 강제당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불가항력적으로 사람을 제어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없는 사용하지 않기로 창조하신 무기이다. 하나님의 가장 미약한 존재감으로도 사람은 제압당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에 이런 개입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홀로 설 수 있게 하는게 하나님의 참된 계획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돌리지 못하신다. 단지 사랑에 호소하실 뿐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시간 밖에, 시간 위에 계신다. 말하자면 그분은 모든 시간을 지금 보실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일 할 일을 미리 보지 않으신다. 지금, 시간을 초월하여 보신다.
만약 기도한 대로 되지 않는다면 간구해 봤자 소용없다는 증거가 하나 더 추가되는 셈이다. 또 설사 기도한 대로 이루어졌다 해도 그 성취의 물리적 원인을 찾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니‘기도를 하든 하지 않든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고, 따라서 성취된 기도 역시 거절당한 기도나 다름없이 ‘기도해도 소용 없다’는 걸 증 명하는 좋은 증거로 삼을 수 있지. 너는 영적 존재니만큼 어떻게 이런 걸 다 혼동할까 이해 가 안 될 게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을 궁극적 실재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인간은 원수도 자기처럼 어떤 것은 현재시제로 바라보며, 어떤 것은 과거시제로 뒤돌아보고, 또 어떤 것은 미래 시제로 내다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원수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인간과 다르다고 믿을 경우에도, 내심으로는 원수의 지각 방식이 워낙에 유별나므로 그가 보는 사물의 모습이 곧 그 사물의 본질이라고는 생각지 않거든 (입으로야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겠지)! 네가 ‘인간이 오늘 드리는 기도는 원수가 내일의 날씨를 조정하는 데 사용하는 수많은 좌표 중 하나’라고 설명하려 들 경우, 환자는 즉시 이렇게 반박할 게다. 그 말은 원수가 인간이 드릴 기도의 내용을 미리 알고 있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자유의지로 기도 하는 게 아니라 미리 정해진 대로 기도하는 게 아니냐고 말이지. 그리고 어떤 날의 날씨를 결정하게 된 원인을 찾아 물질 그 자체가 처음 창조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다면 인간 세계든 물질 세계든 모든 만물은 ‘처음부터’결정나 있었던 게 아니냐고 덧붙이겠지. 환자가 뭘 놓치고 있는지 알 만하지? 특정한 날씨를 특정한 기도에 끌어다 맞추려 드는 짓은, 곧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의 지각 양심 내부에 두 점을 찍어 놓고 영적인 세계 전체를 육체의 세계 전체에 끌어다 맞추려 드는 총체적인 문제의 표피에 불과하다는 것, 시간과 공간의 매 지점에서 창조 전체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는 게야. 아니, 그보다는 인간처럼 제한된 의식을 가진 존재들은 총체적이며 내적 일관성이 있는 창조 행위도 일련의 연속적 사건으로 밖에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구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창조 행위 속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를 마련해 놓았느냐 하는 점은 정말이지 골칫거리 중에 골칫거리로서, ‘사랑’에 대한 원수의 헛소리에 숨 어 있는 비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문제는 조금도 어려울 게 없지. 원수는 인간들이 자유롭게 미래에 기여하는 바를 미리 내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한없는 현재’속에서 지금 보고 있는 것이거든. 어떤 사람이 무언가 하는 걸 지켜 보는것과 그무언가를 하도록 강제로 시키는것은 확실히 다른일이다.
CS Lewis의 표현은 정말 화려하다. 하나님은 ‘창조 행위 속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를 마련해 놓으셨다.’ 즉 시간과 공간의 매 지점에서 창조 전체가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자유의지가 창조세계 전체를 만드는 하나의 좌표 라는 표현은 정말 brilliant 하다. 마치 수학에서 엄청나게 많은 미지수들에 의해서 계속 해답이 바뀌어 가는데 우리의 자유의지가 그 미지수 하나씩을 매일 조정하는 것 같다. 우리의 자유의지와 우리의 기도가 그 함수의 하나의 input 이라는게 너무 신비롭다.
인간에게 왜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는지, 그건 또다른 separate topic이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결코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모든 미래를 정해놓지는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인간 백산의 삶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다 Fix 해놓으신건 아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예비하시고 창조하시고 모든걸 공급하고 계시지만 내게 내 삶의 궤적을 바꾸고 스스로 own할 수 있게 하는 자유의지를 열어놓으셨다.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강제하지 않으시고 직접 하기를 바라신다. 마치 내가 내 딸이 직접 일어나서 걸을 수 있도록 박수도 치고 옆에서 거들어도 주고 멀리서 지켜도 보겠지만 결국엔 혼자 하도록 encourage하는 것처럼. 사실상 인간세상이, 창조세상이 어떻게 되든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이나 영광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 같다. 하나님은 노아의 방주 때 처럼 타락한 세상을 쓸어버리실수도, 의로운 노아 같은 인간 한명을 보고 다시한번 인간세상에 희망을 품으실 수도 있다. 세상이 어떤 악으로 물들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해를 입는것은 아니리라. 내가 내 인생 막 살아서 망쳐버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되시는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너무나 아파하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직접 하나님께 나올때까지, 언제나 기회를 주시고 언제나 기다리실 것이다.사랑하시니까. 내 미래와 내 삶은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걸 만드시고 예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시고 난 단지 그 기대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부응하면 되는 것이리라. 그래 그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면 재미없으니까. Because then, it lose the whole point. 우리에게도 하나님께도.
매번 올라오는 형 post 읽으면서 느끼는게 많아요. 오늘 역시 형 글을 읽으면서 저만의 방식으로 저의 own 신앙철학이 성립되네요. 처음 신앙생활하면서 또 지금까지도 궁금해하는 토픽인데 뭔가 클리어하면서도 제 마음 깊숙히 밀려오는 혼돈이 재밌어요..ㅋㅋ ‘이면서 아닌것’ 그래서 또 너무 모순인,,어쩌면 죽기전까지 계속 고뇌하면서 보이지않는 하나님을 찾고 느끼는게 신앙생활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드네요. 형말대로 너무 쉽게 클리어해지면 또 재미없으니까…ㅋㅋ 계속해서 더 많은사람들에게 keep inspiring해주세요. bb
오 고마워요 Sure. 너무 다 알아버리면 그건 신앙이 아니겠죠. 근데 누구신지 여쭤봐도될까요.
영의 세계에 대한 상상과 고유한 묘사들이 와닿는 지점들이 많네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는 표현들이 조금이나마 인간이 가진 언어로 카이로스를 그려볼 수 있는 부분이겠지요? 상상하고 지각할 수 있는 시간 동안 각자의 감각과 세포로 영원과 영생을 맛보는 경험들이 풍성해지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날들이 더 많아지길 소망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사랑만큼 영원과 가장 닮아있는 게 있을까 싶어요. 가끔 상상하는 건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기간을 정하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3년만 사랑해, 100년만 사랑해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니까요.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내 마음이 가장 영원에 닿아있다고 할까 생각이 드네요~ 좋은 포스팅 감사하네요. 주일 아침에 새로워집니다.
오 감사합니다 너무 와닿는 묵상이네요. 사랑할 때 만큼 영원과 닮아 있는게 없다는 말씀 저도 더 곱씹어 볼게요!!! ^^
지나가다 우연한 기회에 들르게 되었는데 글 잘 읽었습니다. 인생에 대한, 또 시간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찾아가는 고뇌와 묵상이 크게 와닿습니다. 감사드려요 ^^
더불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는 거절할 수 있는 의지가 없다면 진정한 순종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잠깐 생각해보았네요. 하나님은 인간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원하셔서 창조물 중 유일하게 인간을 당신의 형상, 영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격)에서 사랑의 관계로 만드셨으니까요. 정말 말씀에 적힌 것 처럼 하나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네요..
마지막으로 문득 케네스해긴, 찰스피니, 릭조이너 목사님 같은 분들의 책들을 도전해드리고 싶네요. 지금의 뛰어난 지성과 열정에 영성이 채워져서, 무늬만 크리스천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자녀이자 예수님 신부의 삶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 아멘~
Blessing!
너무 감사해요 응원, 도전이 정말 많이됩니다. 저의 짧은 생각에 이렇게 과찬을 주시다니요…
책 추천 정말 부탁드려요. 막 찰스피니 책을 하나 빌리긴 했는데 구체적인 책 제목들이 있으면 주시면 꼭 구해서 읽어볼게요. 언젠가 더 깊이 나눌기회 있으면 너무 좋겠네요. 아멘!!
어릴적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25살이 된 최근 신앙에 회의를 느껴서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어요… 근데 오늘 포스트 보면서 생각이 많이 드네요. 제가 멀리하게 된 이유는 너무 모순적이어서였거든요.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과연 사이비 종교와 무엇이 다른걸까? 잊지도 않은 실체에게 죄를 고하고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시크릿 효과에서 말하는 것들과 뭐가 다른 것일까? 오늘 이 포스트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감사하죠. 응원이 많이 되네요. 정말 많이 모순적인거 같아요. 이해 안되는 것도 너무 많고요. 계속 같이 고민해봐요. 평생에 걸친 주제가 아닐까요. 언제든 편히 연락주세요 저도 같이 고민하고 그래보고싶어요
좋은 글 공유 감사합니다. 저도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데요 아래는 근거없는 제 나름대로의 생각입니다..
시간: 우리는 시간축을 자유롭게 이동할수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 점이 믿음을 더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2차원의 생명체를 보는것처럼, 하나님도 나를 보고 계시겠죠. 저는 미래는 정해져 있되, 그 정해진 미래상이 하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근거없음). 내 행동들이 그중 하나의 미래상을 선택하기도 하고, 정말 정 아닌곳으로 가려고 할때에는 하나님께서 막기도 하시고.. 관련해서 책한권 추천해드리고 싶은데 여기에 그냥 써도 되나요?
영원: 저는 영원에 가까운것은 두가지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 순간과 정해져있는 모든 것.
일단 시간이 아주 길다고 하는것들도 시간에 영향받는 순간 영원이 아닙니다. 영원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것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시간 흐름이 없는 ‘순간’ 이 영원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인용하신 CS 루이스의 책에서 ‘과거는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영원과 닮아있다’ 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미 정해져있는것은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죠. 멀리가지 않고 성경책만 하더라도 미래에 정해두신 것들(계시록 등)이 있습니다. 그런것들도 영원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영원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유의지: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저는 편하게 신체는 내것, 영은 하나님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신체를 쓸수 있지만 영혼은 하나님만 통제하실수 있으시고, 그렇기때문에 예를들어 신체의 건강함은 다른 누구에게 맡기는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부지런히 운동하고 영양제먹고 병원 정기적으로 다니면서 관리해야 한다고 (현재까지는) 그렇게 묵상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 소유이기 떄문에 육체의 기능이나 건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손에 이미 들어가 있는것이구요.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다고 되어 있으니 분명 육체의 어떤 행위조차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를 깨끗하게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지요. 육체로는 땅의 법을, 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 괴롭기 때문에.
좋은 글 공유 감사해요.
영원이 정해져 있다 – 이거 참 재밌는 컨셉이네요.
신체는 내것 – 영은 하니님것 이것도 interesting 한 생각이네요. 육체에게 어느정도의 자유의지를 주셨는지, 하나님의 성령 말고 우리 개개인의 정신에 어느정도의 자유의지가 있을지 이런것도 재밌는 주젠거 같아요
책 추천 너무 고맙죠! 부탁드려요
(바딤 젤란드) Vadim Zeland 작가의 ‘리얼리티 트랜서핑(reality transurfing)’이라는 책이에요, 총 3부작인데 사실 제게 필요한 내용만 골라서 읽었어요. 저는 한글서적으로 읽었고 리디북스같은곳에서 이북으로 구매하면 아이폰이나 패드로 바로 읽을 수 있는것 같아요.
읽다보면 이상한 부분이 사실 많아요 무슨 신비주의같고.. 근데 다른 부분들이 저한테 굉장히 큰 도움이 됐거든요. 아마 보시면 알아서 거르실 부분은 거르고 읽으실것 같아서 추천드려요.
제가 인성이 굉장히 모나고 불안정하고, 속으로 화도 많고 엄청 찌질한데다가 또 겉으로는 안그런척 하다보니 인격적으로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고 신경쓰는것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시간에 대한 내용, 성격에 대한 내용, 세상의 여러 시스템에 대한 내용들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잠깐 skimming으로나마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 저도 도움이 될만한 책이나 영상같은것들 여쭈어봐도 될까요? 제가 멘탈이 많이 약한데 산님은 강건하신것 같아서 부러워요. 하루동안 상처받은걸 몇년간 매일 폭식, 폭음으로 풀다가 최근 천천히 나아지고 있는데 아직도 많이 불안해요. 몸도 더디게 회복되고 있고요, 사실 지금도 하루동안 멘탈이 녹아서 방에 돌아와 떨리는 손으로 타이핑 하고있네요. 비밀 댓글이 가능했다면 아마 댓글이 더 길어졌을 거에요. 장르 불문, 제게 도움이 될만한것이 있다면 뭐든 감사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제가 답글 너무 늦었죠 언제든 이메일 주시거나 편히 문의해주세요. 책도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