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 읽기에 앞서 제 블로그에 처음 들어오시는 분들은 부디 공지사항 에 있는 글들을 읽어봐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에서 이런 글들을 쓰고 있고 제게 연락주시고 싶은 분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것 같은지 제 생각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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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이번 글은 “시간” 에 대한 글이다. 시간을 나눠보면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문법에는 나오지 않고 우리의 개념속에만 있는 영원 이렇게 네가지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난 그 중에 과거의 상처/컴플렉스에 무의식중에 얽매인채 미래를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현재와 영원을 살고자 한다. 이 글은 바로 그 이야기이다. 현재와 영원을 산다는것은 무슨 말일까. 미래를 보고 살면 왜 안될까. 나는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 이순간 현재와 영원을 살고 있는가 미래를 보고 살고 있는가. 이런 내용들을 나누고자 한다.
시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쓰다 보니 다분히 하나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내 신앙도 많이 나오게 됐다.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나의 신앙관을 담아낸 이야기를 쓸때는 참 조심스럽다. 몇가지 드는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 내가 늘 잊지 않고 싶은 것은 나도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고 한결같지 못할 수 있다는 거다. I’m not saying I figured out everything and I will always be the same. 지금까지 나의 신앙이 많이 바뀌고 내 입장에서는 성장/성숙했다고 느껴지듯이, 분명 나의 신앙도 앞으로 또 많은 변화가 있으리라. 내가 교만해지고 한결같지 못해지거나 나의 생각이 바뀌는 일이 없을거라고 자신할 수도 없다. 나의 삶과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 현재 진행형이다. Authenticity 가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 그리고 이건 앞으로도 그럴테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신앙 이야기이다. 내가 다른사람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이상 다른사람의 신앙에 대해 judging 한다는건 내게 참 어려운 일이다. (이 부분이 내게 참 항상 도전이다.) 언제든지 대화하고 나누고싶다. 언제든 내가 틀릴 수 있고, 또 다른사람 입장에서는 다른 삶의 굴곡과 과정에서는 다른 기도와 간구가 있을 수 있다고, 그건 내가 판단하거나 할 영역이라기 보다는 난 내 도리를 다하고 내 신앙생활이나 잘 하고 싶을 뿐이라고 (그것도 너무 어렵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이야기 자체가, 상당히 부담스럽고 어떨 때는 공격적일 수 있다는걸 알고 있다. 당장 나만해도 누군가 예수님 이야기를 하거나 성경 말씀을 들고 나오면 바로 눈길을 돌렸으니까. 특히 내 주위 가족, 친한 친구들 중 어찌보면 상당수/대다수가 non-christian 인 상황에서 그들에게 나를 너무 멀게 느껴지게 만들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실제로 우리 부모님은 내가 이런글을 정말 그만 쓰셨으면 하신다.
- 정말 가장 무서운 것은 신앙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더 생기고 커질지 모를 내 영적 교만이고 언제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나의 부족함이다. 주위의 신앙인이 공감해주고 칭찬해줄 때, 겸손과 감사로만 받을 수 있을지, 아니면 우쭐대고 교만해질지. 괜히 영적인 척하는건 아닌지. 이런걸 자꾸 생각하고 쓰고 나누면서 거의 내가 전에 생각하던 사이비 신자처럼 모든걸 영으로 생각하고 무엇이든 다 음성을 듣고 한다고 하고 그런 느낌의 figure로 비춰지고 나또한 우쭐하지 않을지. 절대로 나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전체 신앙을 판단한다거나, 나의 한결같지못함에 읽는 독자 여러분이 시험을 당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한다.
- 비슷한 맥락에서 김영봉 목사님이 인용한 윌터 힐튼의 말을 적어본다. “내 말이 주는 참된 인상과 실제 내 모습이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 때문에 오직 소리를 높여 자비를 구하며 있는 힘껏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글로써 분명 나는 ‘나 이상의 무엇’으로 독자에게 비춰질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의도치 않은 허위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I’ll give it a good try.”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글을 쓰는 이유는
- 쓰고 싶어서. 요새 이런 생각 하는게 너무 재밌고 나누고 싶어서. 그리고 이 곳은 내 생각을 나누는 곳이기에.
- 하나님을 믿기에. 혹시 나의 의로 교만으로 쓴 글이라면 그리고 과정에서 내가 그렇게 된다면 다니 나를 깨시고 낮추실 것을 믿기에. (글을 쓸지 말지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 왠지 써도 괜찮다는 마음을, 오히려 안쓸때의 부담감을 주시는듯)
-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란 존재를 내가 지금까지 살펴보건데 깨지고 무리수가 좀 있더라도 작은 기쁨이나 마음의 와닿음도 너무나 나누고 싶어서 눈치없이 또 엄청 흥분해서 나누고 그랬다가 또 실수하고 반복하고 그러면서 배워가는 모습이었기에…
- 이 글에서 내가 하는 주장 – “우리는 현재와 영원을 살아야지, 미래를 살아서는 안된다.”에 비추어 보자면 이 글은 써야한다. 그래, 만약 막연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다면, 내 삶이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분명히 쓰고 싶은 글이니까 쓴다.
- 그리고 기억하고 남기고 내 주위와 나누고 나를 더 책임감 있도록 만들고 (make myself more accountable) 그러고 싶어서.
2. 현재와 영원 vs 과거와 미래
나의 시선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 있었다. 발전과 성취, 진취적인 태도와 목표, 이런 것들이 우리 아버지의 끊임없는 에너지의 근원이었고 내게도 아주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노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매 시간을 maximize 하려 했고 한시도 낭비할 틈이 없었다. 충실히 살고 싶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분명 이전의 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도 남은 사람이었다. 현재는 미래를 위한 수단이고 준비이고 도구고 연료였다. 더 멋지고 의미있는 삶을 위해서 현재라는 땔깜을 태우는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리고 난 영원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신앙이 생기고 나서도 영원이라는 개념은 너무 어려웠다. 구원의 확신? 내세? 경험해보지 못한 그 영원을 계속 확신한다고 외쳐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왠지 가식적인것 같기도 하고 뭔가 동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난 그다지 과거를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 과거의 상처에 무의식적으로 어느정도 얽매여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부분은 몇번 나눴고, 그마저도 그리 obvious 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 나의 이야기의 초점도 나의 쉐어링도 현재(영원) vs 미래 에 주로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생기고, 30대에 접어들면서 생각과 초점이 완전히 바뀌었다. 왜? 어떻게? 먼저 내게 많은 영감을 준 책 두권에서의 관련 내용을 소개하고 싶다.
아래는 김병제 목사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여정” 이란 책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작가는 미래와 현재, 영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은 시간을 살고 있으나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로 그의 운명을 삼으셨다. 그래서 사람은 시간안에 살면서도 영원을 향한 그리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끝간데 없이 세속성과 더불어 놀다보면 영원에 대한 관심도 거의 사라지고 만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두가지, 곧 현재와 영원에 집중하기를 원하신다. 사람은 현재를 통해서 영원을 만난다. 사람은 현재만을 경험할 수 있다. 과거역시 현재 과거를 회상함으로 경험하며 미래도 역시 현재 그 미래를 경험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와 관계없이 시간과 관계없이 그냥 사건을 통째로 경험하신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시다. 때문에 시간과 관계없이 단지 일어난 사건 그 자체를 아신다.
사람은 생리적으로 미래를 향하게 되어 있다. 미래를 향한 사람들의 생각, 또는 미래를 향한 비전이라는 것은 희망과 두려움 이 두가지로 불타고 있다. 미래의 천국을 위해서 지금 잡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지는 현재를 놓치고 마는것, 이건 오히려 현재와 미래를 다 놓치는 모순이다. 이게 악마가 원하는 바이다. 미래를 갖기 원하지만 미래는 현재로 인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면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없다. 미래를 그래서 그들의 환상속에만 존재하게 될 뿐이다. 악마는 사람들이 저 멀리 있는 무지개를 보고서 끝없이 달려가기를 원한다. “현재야 거짓과 탐욕과 무례함으로 가득한 들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현재 그렇게 거짓을 행한다 해도 미래에 얻을 것을 생각하면 그건 견딜 수 있다고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영성의 신비함을 깨달은 자들은 한번에 한 순간을 살 뿐이다. 자기앞에 주어진 시간에 집중한다. 한순간을 헤쳐나갈 수 있다면 하루를 헤쳐나갈 수 있고,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결국 그의 일생을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한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살고 있지만 원수는 그들을 위해 영원을 예비해 두었다. 그래서 인간의 주된 관심을 영원 그 자체와 이른바 현재라는 두 가지 시점 모두에 집중시키려 들지. 현재는 시간이 영원에 가닿는 지점 아니냐. 원수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경험 할 수 있지만, 인간은 현재의 순간, 오직 그 순간에만 원수와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즉 현재의 순간에만 자유와 현실성을 얻는 게야.그렇기 때문에 원수는 인간이 계속 영원에 관심을 갖거나(이건 곧 원수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다) 현재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할 게다. 원수와 영원히 하나가 되는 일과 영원히 분리되는 일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하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현재 들리는 양심의 소리에 따르거나 현재 주어진 십자가를 지거나 현재 주어지는 은혜를 받거나 현재의 즐거움에 감사 드리게 하려 든단 말이지.따라서 우리의 임무는 인간을 영원과 현재로부터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가끔씩 한 인간(이를테면 과부나 학자)을 유혹해서 과거에 파묻혀 살게 하는 것도 다 이런 관점에서 하는 일이야.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지. 이런 치들은 과거에 관한 한 어느 정도는 참된 것을 알고 있는데다가, 과거는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영원을 닮아 있거든. 그러니 과거보다는 미래 속에 살게 만드는 편이 훨씬 낫다. 인간의 열정은 생물학적 필연성에 따라 앞을 향하고 있는 법이므로, 미래에 대한 생각은 당연히 희망이나 두려움으로 불붙게 되어 있다. 더구나 미래는 미지의 것이 아니냐. 그러니 미래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곧 비현실적인 허상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한마디로, 미래만큼 영원과 닮지 않은 건 없어. 미래는 시간 가운데서도 가장 완벽하게 찰 나적인부분이지.과거는 꽁꽁얼어붙어 더이상 흐를수 없고,현재는 영원의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으니까. 우리가 창조적 진화니 과학적 인본주의니 공산주의 같은 사상체계에 격려를 아끼지 않은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사상들은 인간의 애착을 미래에, 그 찰나성의 핵심에 붙들어 놓지.따라서 거의 모든 악은 미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감사는 과거를 바라보고 사랑은 현재를 바라보지만 두려움과 탐욕과 정욕과 야망은 앞을 바라보지. 혹 정욕은 예외일 거라고 생각지 말거라. 현재에 쾌락을 느끼는 순간, 죄(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인)는 이미 저질러져 버린 상태가 된다구, 이 과정에서 쾌락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로서, 쾌락없이도 죄를 짓게만 할 수 있다면 얼른 빼 버리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이 쾌락은 원수가 제공하는 것이므로 현재에 경험하게 되지. 그러나 우리가 제공하는 죄는 역시 늘 앞을 바라 보고 있다.물론 원수도 인간이 미래를 생각하기 바라지. 다만 내일 실천해야 할 정의나 자비의 행동을 계획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만큼만 생각하길 바란다. 내일의 일을 계획하는 것은 오늘의 의무니까. 모든 의무가 그렇듯이, 그 재료야 미래에서 빌려오는 것이지만 막상 그것을 실천하는 시점은 현재 아니냐.이건 좀 시시콜콜히 따져보며 생각할 문제다. 그 작자는 인간이 미래에 신경을 쓰면서 미래 에 보물을 쌓아두길 원치 않지. 우리야 물론 그렇게 되길 바라마지 않지만 말이야. 원수의 이상형은 하루종일 후손의 행복을 위해 일한 다음 (그 일이 자기 소명이라면), 그 일에 관한 생각을깨끗이 털고 결과를 하늘에맡긴채 그순간에필요한 인내와감사의마음으로 즉시 복귀하는 인간이다.하지만 우리한테는 미래에 잔뜩 가위눌려 있는 인간, 이 땅에 금방이라도 천국이나 지옥이 임할지 모른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인간, 그래서 천국을 얻을 수 있다거나 지옥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불어넣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원수의 계명을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 자기는 생전에 보지도 못할 계획의 성패 여부에 믿음을 거는 인간이 최고지. 우리가 바라는 건 전 인류가 무지개를 잡으려고 끝없이 쫓아가느라 지금 이 순간에는 정직하지도, 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게 사는 것이며, 인간들이 현재 제공되는 진정한 선물들을 미래의 제단에 몽땅 쌓아놓고 한갓 땔감으로 다 태워버리는것이다.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보면, 그리고 다른 조건이 동등하다면, 환자가 현재를 살아가는 것보다야 불안이든희망이든(둘중 뭐가되든 상관없다) 온통 전쟁에 대한 생각으로 꽉차있는 편이 훨씬 낫지. 사실 ‘현재를 산다’는 표현에는 좀 모호한 데가 있어 불안이 미래와 관련된 것만큼이나, ‘현재를 산다’는 것 역시 미래와 관련된 과정을 묘사하는 말일 수 있거든. 그러니까 네 환자가 미래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진짜 현재에 몸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는 좋을 것’이라고 스스로 설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말씀이야. 정말 이런 이유로 환자가 평온을 찾은 것이라면 우리한테는 이득이다. 잘못된 희망이 산산 이 부서질 그날을 위해 더 큰 실망감과 그에 따른 조급함을 쌓아가는 셈이니까. 그런데 반대로 환자가 무서운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이겨 낼 미덕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그러면서 모든 의무와 모든 은혜와 모든 지식과 모든 쾌락의 유일한 거처인 현재에 몸담고 있다면, 이건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니 즉시 공격을 감 행해야 한다.
정말 소름끼치는 Insight를 준 책이다. 미래를 보고 살아왔었는데. 악마가 하는 말을 다시한번 인용하자면 “미래만큼 영원과 닮지 않은 건 없어. 미래는 시간 가운데서도 가장 완벽하게 찰 나적인부분이지. 거의 모든 악은 미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감사는 과거를 바라보고 사랑은 현재를 바라보지만 두려움과 탐욕과 정욕과 야망은 앞을 바라보지. 전 인류가 무지개를 잡으려고 끝없이 쫓아가느라 지금 이 순간에는 정직하지도, 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게 사는 것이며, 인간들이 현재 제공되는 진정한 선물들을 미래의 제단에 몽땅 쌓아놓고 한갓 땔감으로 다 태워버리는것”. 아 내가 이렇게 살아왔던건 아닌가. 미래를 걱정하면서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는게, 마치 거대한 정치이슈나 사회 불공정 같은 것에 엄청나게 분노하고 비판하면서 항상 그런것에 occupy 된 나머지 지금 내가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작은 변화들은 실천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많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든 그렇게 살도록 조장하고 유도하고 하는 세력이 있다는걸 인식하게 됐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 아내 민경이를 보면서이다. 나와는 정말 달리 그녀는 정말로 하루하루를 살고 그 순간을 살고 현재를 살며 작은 일에도 즐거워한다. 별 재밌을거 없어보이는 애기와의 씨름과 집안일을 하면서도 늘 룰루랄라이고 늘 우리부모님한테 안부전화 드리고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 하고 그런 반복되는 일상에도 진정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럽기에, 즐기면서 하기에 더 잘한다. (물론 순간순간을 살기 때문에 엄청 빼먹고 까먹는 것도 많고, 미리 계획이 안되어 있는것도 많고 헛점 투성이긴 하다.) 내게 현재를 사는 사람의 모습을, 그 아름다움과 힘을 삶으로 보여주고 느끼게 해줘서 너무너무 고마워요 각시.
정재륜 목사님은 이사야서 61장 1-3절의 두번째 설교에서 세상에는 세상의 아픔을 전혀 모르고 항상 가벼운 이야기만 하는 가벼움 version 1의 사람, 세상의 짐을 다 진 것 처럼 심각하게 무겁게 찌푸리고 불평과 부조리를 입에 담고 사는 무거운 사람, 그리고 정말 많은 아픔과 풍파를 보고 겪었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웃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충실히 기쁨으로 열과 성을 다해 실천하면서 주위에 사랑 베푸는 가벼움 Version 2 로 사는 사람 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래. 현재를 살면서 가벼움 2 로 살고 싶다. 잡히지 않는 무지개를 쫓아가느라 현재에는 정직하지도 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는 삶은 아니다. 성경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려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
3. 영원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래 미래 대신에 현재를 산다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영원은 무엇인가? 영원은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참 내게는 어려운 개념이다. 아래 Q&A형식으로 내 지극히 주관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생각들을 써본다.
Q1) 영원이란 무엇인가
영원에 대해 조정민 목사님은 ‘땅의시간 하늘의 시간’이란 책이래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가장 와 닿았던 설명이라 공유한다. 그래 영원과 우리가 수학시간에 배운 무한대는 분명 다른 개념일 것이다. Forever 와도 분명 다른 개념일거다. 그래서 천국/지옥은 절대로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죽음후에 어디 천당이란 곳으로 physically ‘가’서, 이동해서, 거기서 끈임없이 행복을 누리며 계속해서 사는 그런 개념은 아닐거 같다.
- 시간에는 두가지 개념이 있다. 물리적으로 일정하게 흘러가는 시간 ‘크로노스’와 건져 낸 시간 ‘카이로스‘. 건져낸 시간은 영원으로 옮겨진다. 건져낸 시간은 ‘순간’이라도 영원한 시간이 된다. 영원이란 시간밖의 시간이다. 어쩌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시간 자체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뜻한다. ‘영원’은 오랫동안 끝없이 살아가는 무한한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영원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Q2) 영원한 세계를 믿는 것
영원을 믿는 것. 내세를 믿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이 글에서 다 쓰기는 참 어려울 만큼 광범위한 이야기다. 내가 그나마 영원이라는 개념에 많이 편안해 진 것은 예배의 기쁨을 체험하면서 부터이다. 예배 과정에서, 회개와 간구와 찬양의 기도 가운데에 엄청난 기쁨과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을 느끼면서 내 안의 육이 떠나고 영만 남았을 때, 내 영이 원래 있을 곳으로 갔을 때에 느낄 수 있는 그 기쁨과 그 상태의 개념은 내가 지금 유한한 육을 가진 존재로서 다 알 수 없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Q3) 영원을 현재에 끌어당겨 사는 것
이게 훨씬 잘 다가온 개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고나서 변화되는 나의 마음과 심령이 너무 좋았다. 천국을 지금 현재에 끌어당겨 산다는 게 훨씬 와닿았다. 내가 세례를 받을 때 “형제님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진지요?” 라고 물었을때 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사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정말 확신이라고 하기엔 잘 모르겠어요. 제가 하나 확실히 아는것은 예수님믿고 나서 변화되고 있는 제 모습이에요. 그걸 보고 있으면 사망으로 가던 제 삶이 이미 구원 받아서 살고 있는걸, 많은 순간에 천국을 누리고 있는걸 느껴요.”.
Q4) 보상을 바라고 일하는건 잘못된 동기부여가 아닌지
천국 이야기가 많이 나온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신다. 영원한 삶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서 지금의 현재에 더 하나님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 하는 것은, 마치 미래에 더 나은 삶을 살기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 처럼 값싼 보상심리에 따른 잘못된 동기부여로 사는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너무나 약하기에 이런 보상, 이런 동기부여가 사실 꼭 필요하다. 만약 내가 엄청난 시험과 유혹에 든다면, 세상에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난 눈한번 질끈감고 에라 모르겠다를 안할 수 있을까? 영원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현재가 영원과 연결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이겨낼 수 있을까? 결혼전부터 굳게 마음먹고 나서 지난 몇년간 포르노를 본적은 없다. 적어도 완전 음란물은. 안보다 보니 평소엔 별로 생각 안난다. 그러다가 갑자기 상당히 강한 충동으로 찾아올 때가 있다. 그냥 눈 딱 감고 한번만 보면 어떨까. 그런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남들도 많이 보는데. 누가 아는것도 아닌데. 바로 이런 때에 영원한 삶으로의 연결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런거 없이 참기는 참 어렵다. 그래 지금 당장은 무슨일이 안생기는거 같지만 분명 생기는구나. 내세를 위해 참자. 이런 보상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못참을 정도로 나는 나약한 존재니까.
Q5) 영원, 천국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완벽한 상태가 아닐까?
난 어렸을 때 읽은 두 친구의 새끼줄 이란 동화가 생각났다. 내용은 이렇다. 두 친구가 부자집에서 삼년동안 머슴살이를 했는데 주인이 집에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새끼 꼬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한 친구는 마지막이니 대충했고 다른 친구는 정성스레 꼬았는데 다음날 주인이 그 꼰 새끼에 엽전을 마음껏 꿰어가라고 했다. 새끼를 제대로 꼰 친구가 제대로 엽전을 꿰어갈 수 있었다. 이 내용. 난 영원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주실 엽전을 꿸 수 있는 새끼 꼬기를 지금 하고 있는가.
성경은 분명히 똑같이 은화 하나씩 받은 상태에서 은화를 많이 늘린 종에게 주인이 은화를 몰아주고, 은화를 전혀 늘리지 못한 종의 은화는 아예 뺐어 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누가복음 19장, 마태복음 25장). 또 이런 구절도 생각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분명 영원의 세계도 다 똑같은 영원의 세계가 아니리라.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나 우리의 ups and down과는 전혀 무관히 본래부터 완벽하신 존재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치 않게 완벽하시다. 영원한 세계에서, 육식의 한계와 육신에 따른 죄의 본능이 없어지고 영만 남았을때 하나님과 얼마나 동행하고 공명할 수 있는지는, 교감할 수 있는지는 결국 그때 우리 영의 상태가 어떤지에 따라 달려있지 않을까. 우리 영이 아주 좋은 새끼줄일지 엽전을 거의 못꾈 새끼줄일지 우리에게 달려있는게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본다.
Q6) 영원한 삶에서의 보상은, 하늘나라의 보물은 무엇일까?
그러면 영원의 세계에서의 엽전은, 은화는 무엇일까? 천국에 쌓아두는 보물은, 영원한 삶에서의 보상은, 지금 그냥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생각하는 복이나 보상과는 분명 다를 것 같다. 그건 더 높은 지위도 더 인정받는 것도 자랑/정욕/Ego 이런것과 관련된 것은 아니리라. 그건 왠지 더 많은 ‘일거리’ 일 것 같다. 더 많은 ‘쓰임‘ 일것 같다. 더 ‘낮아짐’, 더 ‘비움’ 일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보상에는 항상 ‘나’가 들어가지만 하나님 나라의 보상에는 ‘하나님’이 들어갈거 같다. 더 많은 ‘동행‘일 것 같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사실 영원한 삶에 대해 모르는게 너무 많아서 이런걸 생각해보는거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상의 나래를 좀더 펼쳐보자면, 육이 없는 상태에서의 영은 무엇으로 감각할지 궁금하다. 시각, 촉각, 청각, 미각, 후각 이런게 없는 상태에서 영은 어떻게 감각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할 것인지.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할 때 성령님과의 감화감동, 교통하심이 있으면 가슴 안쪽이 뜨거워 지는 순간이 있는것 같은데, 이런 경험으로 유추해 보건데 영의 감각은 ‘공명’ 같은게 아닐까? 아직 감각기관이 발달하지 않은 태아가 뱃속에서 엄마와 하는 공명. ‘동행’ 은 그런 차원에서 한번 생각해본다.
4. 내 삶에서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영원
1) 돈
가. 미래를 살던 시절
미래를 생각하고 걱정하다 보면 항상 돈이 부족하다. 그래서 다양한 상황논리를 핑계삼아 금전적으로 100% 정직하지 못했던 때가 너무도 많다. 한가지, 살면서 평생 묻어두려고 했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스탠포드 MBA에 입학했을 때 난 한국에서 장학금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학교에 이 사실을 다 이야기하면 학교에서 주는 Financial aid 의 액수가 아주 상당부분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장학금을 받지만 적지않은 돈을 빚을 내야했던 나는 고민끝에 학교에 장학금을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중에 학교에서 우연한 계기에 그것을 알게되어 징계위원회까지 회부될 뻔 했었다. 정말 극적으로 징계위원회가 열리기 직전에 Financial aid의 Head가 제소 자체를 취하 해서 아무일 없이 반성문 비슷한 것만 쓰고 넘어갔지만 (그리고 결국 Financial aid 액수는 상당히 줄었고 그만큼 빚은 늘었지만 지금은 다 갚았다! ^^) 그 당시의 내 심정은 너무나 무서웠다. 이대로 불명예 정학 또는 심지어 퇴학 같은걸 당하게 되면 내 인생은 어떻게되는가. 미국처럼 명예가 중요한 사회에서 난 친구들한테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난 왜이렇게 정직하지 못했는가. 너무나 많이 반성했고 지금도 한번씩 되새김질 하며 다시는 정말 그러지 않아야지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혹시나 이글을 읽고 나의 부정직에 상처받으실 분들께 다시한번 고개숙여 사죄드린다. 난 정말 부족한 인간이다.
나. 현재/영원을 살려고 노력했던 것
작년에 유턴을 하다가 길거리에 정차해논 차를 백미러로 살짝 스치고 지나간적이 있다. 아무도 없었고 순간적으로 그냥 갈까 하다가 그래도 크리스천이 됐는데 그러면 안되지, 하나님이 보고 계실텐데 이런 생각에 내려서 포스트잇 쪽지를 남겨놨다. 미세한 줄이 가있어서 많이 나오면 한 10~20만원 나올까 했는데 이게 왠걸, body shop에 가서 아예 차 옆면을 다 갈아야 겠다고 70만원 이상의 견적을 뽑아줬다. 보험처리 하면 더 비싸질거 같아서 그냥 현금으로 주고 끝내려 하니 결국 $1,000을 요구해서 그렇게 주고 와이프한테 웃음섞인 핀잔도 한마디 들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다. On-going battle
돈 만큼 완벽하게 ‘미래’ 지향적인게 있을까. 돈은 영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현재 일용할 양식이 있고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된다면 돈은 현재와 아주 큰 상관이 있지도 않다. 돈은 많은 경우 정말 미래 지향적이다. 돈에 대해서 언젠가 더 써볼 기회가 있겠지. 참 무서운 놈이다 이 돈은. 위 에피소드가 $1,000 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1억이었어도, 10억이었어도, 아니 더 컸어도 나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원을 두려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 노력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지금도 우리 부모님이 갑자기 아프시면 어떡하지? 연금도 없는데 나도 부모님도 위해서 더 저금하고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하지 않을까? 돈을 조금씩이라도 모아야 언젠가 집을 사지 않을까? 이런 미래에 대한 걱정과 생각들이 항상 있다. 당연히 해야할 걱정이고 당연히 지혜롭게 저축도 분명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난 과연 현재, 그날의 일용한 양식을 구하며 영원을 예비하며 살고 있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것인지, 아니면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돈 앞에서 또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지나치게 돈에 얽매이지는 않을지. 항상 경계하게 되고 정말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다. 최근에 내 가슴을 많이 울린 책, 김영봉 목사님의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에서 묘사된 것처럼, 가난을 추구하고 나누고 절제하면서 살기를 기도하고 소망한다.
2) 커리어, 그리고 내가 사는 곳
가. 미래
커리어를 선택함에 있어서 나의 기준은 항상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내 커리어에, 내 커리어의 정점의 순간을 극대화 하는데에 가장 도움을 줄까 였다. 내가 행정고시를 쳐서 공무원이 되고자 결정했던 것도 나랏일이 재밌을 것 같고 경제부처관료의 삶을 읽을 때 가슴뛰는 그 외침도 있었지만, 한국사람으로서 가장 진취적으로 국제 무대에서 뛰기에 제일 적합한 first step 으로 여겨졌던 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었던 것 같다. 기획재정부에 들어가고 나서 경제정책국을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선택해서 가게된 것도 당장 내가 더 끌렸던 국제금융국 같은곳 보다는 경제정책국을 먼저 거치는 것이 가장 정석이고 가장 나중을 위해서 맞는 수순이라는 주위의 조언 때문이었다.
어디에서 사는가, 살 것인가, 살고 싶은가 이런 문제도 마찬가지 였다. 내가 어디에서 사는게 내 미래의 삶을 가장 내가 원하는 데로 만들어 줄 것인가 이런것이 너무나 중요했다. 미국에 너무 오고 싶었던 것도, 미국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것도, 한국이 내게 준 다양한 무게가 버거웠고 미국에서의 삶이 다양한 면에서 더 윤택하고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자식교육에, 내 가족에, 내 커리어에, 내 삶에 더 좋고 유리한 환경을 계속 생각하면서 optimize 하려 해왔다.
나. 현재
그렇게 머리를 굴려가며 미래의 나를 멋지게 만들려고 커리어를 꾸려왔는데 이게 왠걸, 난 정말 여러군데를 좌충우돌하고, 정착 잘 못하고 크게 인정도 잘 못받으면서 내가 최초에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고 한번도 상상해보지 조차 않은 일을 작은 회사에서 하고 있다. 가끔, 아니 종종 주위에서 묻는다. 그래 산아 뭐가 되고 싶니? 계획이 뭐니? 3년후 5년후, 10년 후에는 어떤 커리어를 보고 있니? 요새의 대답은 잘 모르겠다 이다. 계획을 세운다고 계획대로 된 적도 없다. 미래를 고민하다가 현재 직장에 현재의 위치에서 충분히 충실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너무 많다. 일단은 하루, 길게는 일주일씩 끊어서 생각해보고 있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가. 나는 성장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worker 인가. 나는 지금 주어진 책임을 excel 하고 있는가.
어디에서 살지에 대해서도, 이제는 관점이 많이 바뀌었다. 어디가 내 미래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해줄지 보다는 어디에서 지금당장 나를 필요로 하는가를 묻고 반응하고자 노력한다. 그토록 버거웠던 한국의 무게도, 이제는 나를 필요로 해주는 고국이있다는 감사함이나 그리움으로 다가올 때가 참 많다.
다. On going battle
말은 멋있게 했지만 자주 미래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며 이런 생각을 하게된다. 난 어떤 일을 하고 살게 될까. 난 미래에 한국과 세계의 어딘가에서, Public과 Private 의 어딘가에서, 내부 살림과 외부 마케팅/파트너십 업무사이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지 않을까. 난 커리어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일하는 회사가 잘되고 내가 인정받고 업무 성과가 엄청잘 나오고 이럴 수 있을까. 이런 미래에 대한 막연한 상상과 걱정들에 종종 휩싸이곤 한다. 주위에서 멋진 성과를 내고 있는 내가 아는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기도 한다. 어디에 사는지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사는건 이것대로, 한국을 돌아간다는 생각하면 그건 그것대로 다양한 근심거리를 주고 미리 앞으로 비자는 어떻게 해야할지 자녀교육은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 다양한 미래의 계획을 내 인생에 가장 유리한 대로 세워보기도 한다. 과연 나는 내가 말한것 처럼 현재에 충실하며 내가 있을 곳을 내가 할 일을 잘 찾으며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 It’s an ongoing, never ending challenge.
3) 존경하는 인물, 닮고 싶은 인물
가. 미래
내가 정말 존경했던 인물들은 자신의 삶에서 부단한 노력으로 많은 발자취를 많은 meaning 을 만들어 냈던 사람들이다. 특히나 자수성가 하거나 underdog 이었던 사람이 일궈낸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 손에 땀이 쥐어질 정도였다. 정주영, 김우중, 이명박 (적어도 서울시장까지), 징기스칸, 카네기, … 나도 내 삶에서 최대한 쥐어 짜서 뭐라도 남기고 가고 싶었다. 한번뿐인 인생 멋지게 살다 가는게 중요했고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 인물들을 존경해 왔다.
나. 현재/영원
그청년 바보의사 안수현씨를 보면 정말 현재를 살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하루하루 기도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고, 노력하며 살았다. 예배를 사모하고 손해볼 줄 알면서 신뢰하는 삶을 살았다. 좋은 책과 찬양 씨디를 가지고 다니고 하나님이 기회를 열어주시면 기도하고 같이 울고 웃으며 이런 선물을 전했다. 그는 33살의 짧은 인생을 살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참 많은 사람에게 찡한 도전과 감동을 주고 갔다.
고 이태석 신부님, 마더 테레사, 그리고 그 모든 이름위의 이름 예수님… 이런 분들이 세상에서 남긴 결과나 impact 가 내가 원래 존경하던 사람보다 단기적으로 봤을때 더 큰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님 말씀처럼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 보다는 얼마나 큰 사랑으로 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현재에 집중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한 이런 사람들이 요새는 정말 훨씬 더 좋다.
다. On going battle
그리고 항상 경계하고 싶은 것이 힘과 영향력이 있어야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분명 자주 약하고 가난하고 낮은 사람을 쓰셨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낮고 천한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다. 그래 나는 약할 때 강할 수 있으리라. 희생과 섬김이 세상의 강함을 이길 수 있으리라.
4) 나의 시간과 마음가짐
가. 미래
과거의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
- 내가 어떻게 하면 미래에 더 발전할 것인가
- 이 사람을 만나서 미리 관계를 만들어 놔야 나중에 부탁할 수 있을텐데
- 어떤 만남이 어떤 시간사용이 더 나의 발전에 좋을것인가. 누가 내게 영감을 주는가.
그래서 늘 나보다 더 성공했고 갖추고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연락하고 시간과 공을 들이고 조언을 받고 도움을 받으려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항상 바빴다. 앞으로 나가기만도 너무나 부족했으니까.
나. 현재
이제는 나의 마음을 이런 것들에 붙잡으려 기도하고 노력해본다. 난 오늘하루를 어떻게 fresh하게 살 수 있을까.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에게 어떤 사랑을 주고 어떻게 하면 주님의 시선으로 그들을 볼 수 있을까. 그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주님이랑 어떻게 디브리핑을 할 수 있을까
나의 시간사용도 마찬가지이다. 이번주에 누구를 만나야 할까, 주님이 내게 주시는 사람은 누구일까. 일요일 예배드리며 생각한다. 지난 한주를 정리하고 다음주 한주를 민경이와 같이 플래닝 해본다. 어떤 때는 분명히 내가 도움받아야 할 사람을 만날때도 있지만,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 내가 쓰임받을 수 있는 곳/사람/context를 찾기 위해 항상 민감하려 한다. 그리고 거기에 시간과 나의 에너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다.
다. On going battle
늘 고민이다. 난 충분히 나를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너무 한국인들, 내 커리어/분야와는 너무 관련 없는 한국교회사람 들과만 시간을 보내는건 아닐까. MBA친구들, 특히나 다양한 분야에서 너무나 잘하고 있는 친구들과 조금더 꾸준히 더 만나고 해야하는건 아닐까. 이번주에 내가 한 커플을 초대할 수 있다면 누구를 할까. 나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이 외로운 사람을 부를까 아니면 내가 이번 투자자 미팅 섭외에 큰도움을 줄지도 모르는 샌프란에서 잘 살고 있는 내 MBA 동기를 부를까. 뭐가 맞다고 결론을 완벽하게 내린 것도 아니다. 항상 발전을 추구하고 미래를 향해 노력하는 나의 identity 전체를 부정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지혜를 구할 뿐이다.
5. 마치며
최근 한국출장 때 우연한 기회에 친한 친구들 따라 양재 온누리 교회의 포인트 5 예배에 갔다가 소문으로만 듣던 정재륜 목사님을 만나고 그 예배를 드리고 나서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리고 나의 주특기 장문의 이메일로 어떻게든 바쁜사람 시간을 내달라고 매달려서 아침일찍 커피를 마시며 내가 그간 가지고 있었던 신앙에 대한 이야기와 질문들을 나눴다. 너무나 은혜롭고 좋은 시간이었다. 내가 현재와 영원, 미래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 아직 천국과 지옥, 영원이 아주 와닿지는 않을때가 많다고 여쭤보고 하자 목사님이 나눠주신 성경구절이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그래. 전에 이재철 목사님도 이어령 교수님과의 대담에서 삶은 “죽음”을 알아야 비로소 알 수 있다고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더랬지.
- 어떤 대상을 분석할 때 그 대상을 들여다 보면 실체를 놓치기 쉽다. 그 대상과 상반되는 것을 같이 놓고 보면 우리가 요구하는 대상을 훨씬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삶을 알기 위해서는 대비되는 죽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고 장소도 구별되지 않고, 죽을 사(死) 자처럼 그야말로 한밤중에 비수처럼 날아온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았다, 50년을 살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하루를 죽은 것이고, 50년을 죽은 것이 아니겠느냐.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임을 알면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았을 때 하나님을 찾게 되며, 죽음을 알고 삶을 알면 하나님 말씀은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인생 사용설명서가 된다. 삶이라는 제품을 바르게 쓰면 그 삶이 의미있어진다.
분명 우리의 창조주는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결코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기 위함이리라. 멋진 미래의 나 잡으려고 쫓아가느라 지금 이 순간에 정직하지도, 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는 삶은 허상이리라. 현재에 충실하며 그 온전함과 충만함, 행복을 만끽하고, 영원의 천국을 현재에 끌어당겨 사는 내가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길지만 최근 3년 동안 저도 30대가 된 이후에 고민한 부분들과 많이 맞닿아 있고 현재 제가 생각하고 있는 가치관하고도 많이 맞닿아 있어서 재밌게 봤어요 형! 요새 누군가 What’s your career plan in 5 years? 이런 거 물어보면 대답 못하겠더라구요 언젠가부터 현재가 중요해졌고 지금 도쿄에 사는 게 의미 있고 행복한지가 중요하지 이걸 발판 삼아 그 다음에 어딜 가야겠다 이런 생각은 오히려 잘 안 하고 살게 된 거 같아요. 아무튼 간만에 인사도 하고 잘 읽었다고 형 같이 생각하는 사람 여기 또 있다고 남기고 가고 싶었어요! =)
오 민국아 고맙다 야 이렇게 답글을 다 남겨주고 반갑네…그래 생각하는거 많이 나눠줘 언제 찐하게 한번 이야기해보자!
역작이네요.그동안 좋은글들이 많았지만 이글도울림이 큽니다. 고맙습니다.
너무 감사한 칭찬입니다. 제 부족한 글에 이렇게 좋아해주시다니요…힘이 많이 됩니다! 감사해요. constructive feedback도 많이 부탁드려요!
Pingback: 시간이야기 (2)_미래는 다 정해져 있는지 | San's playground
진솔하게 쓰신 글들을 읽으며 항상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홈페이지 들어가봤어요. 세희님(?) 같은 분이 이렇게 커멘트 남겨주시고 하니 응원이 많이됩니다. 저도 응원할게요!!!
조금 전에 글을 하나 리플라이 했는데,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네요. 혹시 글 보시고 답장을 주신다면, 이메일로도 받아볼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Nam Lee 님, 반가워요. 따로 리플이 보이지 않는데요? 편히 sanbaek83@gmail.com 으로 이메일주셔도 되요!!
아, 예, 감사합니다. 다음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영원과 시간에 관하여 제가 묵상한 글인데 다음에 완성되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여기에 관심이 많아서, 구글링을 하던 중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리고 늘 하나님 은혜 충만하시길 희망합니다.
네네 너무 기대되네요 부탁드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