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적응기1 – 자라면서 MBA를 접하기 전까지

* 아래 글 읽기에 앞서 제 블로그에 처음 들어오시는 분들은 부디 공지사항 에 있는 글들을 읽어봐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에서 이런 글들을 쓰고 있고, 제게 연락주시고 싶은 분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것 같은지 제 생각 정리해 봤습니다.

이번글은 미국 적응기이다. 미국 취업기는 미국 취업이 되고 나면 한달음에 마무리해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일단 미뤄놓고 있다. 전부터 쓰고 있었던 부모님/제 세대/후배 들에게 드리고 싶은 글과 “강하고 아름다운 국가, 경제, 시민을 꿈꾸며” 라는 글은 너무 무거워서 선뜻 못쓰고 있고 좀더 가벼운 포스팅으로 “What I do for fun”이라는 글도 써보고 싶지만 일단 미루고 있다. 그래서 남은게 이 미국 적응기 새로 시작하기다. 정말 일벌리기 좋아하는 백산 어쩔 수 없구나.

미국 적응기는 크게 두가지에 초점을 두고 써보고 싶다. 하나는 영어, 특히 Speaking 과 Listening (+약간의 writing)이다. 영어는 미국 적응기에 도저히 빼놀 수 없는 이야기다. 두번째는 문화, 스포츠/연애에서 부터 유머를 하고 이해하고, 깊이있는 이야기 할 수 있는 기반만들기 부분이다. 어떻게 정말 상대를 이해하고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겪었던 아픔들은 무엇인가. 이런 부분들이다. 다른 분들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으로 대표되는 이노무 서구사회 를 “성급히 일반화” 해버리자면 너무 말하기 좋아하는 나라다. 저녁식사자리나 몇명이 모이는 자리에가면 하나같이 말을 할려고 눈알을 부라리고 잎술을 옹알거리고 있어서 말할 타이밍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남이 말 끝나기 전부터 치고 나오고 서로 눈을 열심히 마주치고 맞장구 쳐주다가 마치 스포츠에서 공격을 하듯이 확 치고나가 멋진말을 해버린다. 그러다보면 나에게 오는 발언기회는 점점 줄고 나에게 오는 Eye contact 도 갈수록 죽고 결국 나는 좀비같이 되버리고 만다. 이 와중에 한번 말을 했는데 아무도 안웃거나 이해를 못하면 발언기회는 제로가 된다. 그리고 나는 “백산은 아시안이라 그런지 좀 Shy한거 같아. 착하긴 한데, 아 Good Listner야. 말을 좀더 하면 좋을거 같긴해.” 이런 굴욕적인 멘트나 해버린다. 말할 기회를 줄것이지 이런 예의범절 없는것들. 이런꼴을 특히나 어리고 좀 재수없는 애들한테 여러번 당하고 나면 정이 떨어지는게 사실이다. 1대1은 그나마 되지만 여러명이 있는 곳에서 도무지 커뮤니케이션하기 어려운 이 문제. 나는 어떻게 적응해 왔는지 공유하고 싶다.

크게 총 10부작 정도로 쓸까 생각중이다. 1~3편은 MBA에 오기 전까지 이야기고 4~7편은 MBA에서의 1년, 8~10편은 2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부디 이번엔 시작했으면 끝내자 산아. 1편 시작. 두둥!!

1. 미국인 교수님과의 1주일에 한시간, 나의 영어 말문트기

첫번째 이야기는 킷 전스턴 교수님과의 영어 말문 트이기 이야기이다. 난 미국에서 살다 온적은 없지만 초등학교 약 2~3학년 때 부터 중학교 1~2학년정도까지, 약 5년정도(?) 1주일에 한번씩 한시간씩 미국인 선생님과 영어 회화를 했다. 돌이켜 보면 이게 영어를 겁없이 이야기하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우리 형 친구 동생이 피아노 꿈나무인데 미군부대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이 훗날 나의 영어선생님 Keith Johnstone 의 와이프가 그 선생님이면서 이 모든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한번씩 우리 집이나 형 친구 집에와서 여러명과 영어로 대화를 하는 그룹과외 형식이었는데 내가 워낙 좋아하고 잘 따라서 나중에는 그룹과외를 그만하게 되었지만 나는 1주일에 한번씩 계속 용산 미군부대나 용산 한강변의 선생님 집으로 찾아가면서 꾸준히 만났다. 중간에 잠깐씩 취소된 적은 있어도 1주일에 한번 1시간의 대화를 몇년이나 이어온 우리는 친한 친구사이었고 난 ‘킷선생님’ 만나러 가는 시간을 참 즐겼다. 어찌보면 내가 살면서 받은 거의 유일한 과외기도 한데 부모님께 정말 감사드리는 부분이다. (그리고 피아노 치는거와는 달리 나도 참 즐기며 열심히 했다.)

프린스턴 대학을 나온 잘생긴 우리 킷 선생님

프린스턴 대학을 나온 잘생긴 우리 킷 선생님

킷 선생님은 유쾌하고 멋지게 생긴, TV에서나 나올 듯한 미국인이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음악과 소프트웨어를 전공하여 작곡, 컴퓨터 작곡 등을 지도하는 일을 하다가 한국인 부인을 만나 선뜻 한국에 와버린 낭만파. 직접 커피를 내려마시며 내게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처음 가르쳐준 사람이다. 할로윈에 “trick or treat”이라며 캔디를 주는 풍습도 해보고, 6.25전쟁과 반미 감정에 대해 서로 열올리며 토론하기도 하고, 필기체는 어떻게 쓰는건지 가르쳐 주기도 하고, 그냥 우리는 친구처럼 이얘기 저얘기 하면서 지냈다. 그가 미군부대에서 사주던 맛있는 브런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한달치 과외비가 수년간 한번도 오른적 없는 10만원이었고 나한테 먹이고 사준거 따지면 그도 이걸 절대 돈벌려고 한건 아니었던것 같다. 그냥 즐기며 내게 문화와 영어를 가르쳐 줬고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심어줬다. 그래서인지 나는 길거리에 가는 외국인한테 말거는 거나, 학교 수업시간에 발표하는 거나 항상 거리낌이 없고 겂이 없었다.

2. 중학교때 한달간의 미국 홈스테이 – 미국 문화, 가치에 대한 동경을 심어준

Vashon Island 에서 내가 살았전 집도 딱 이런 느낌이었다.

Vashon Island 에서 내가 살았전 집도 딱 이런 느낌이었다.

두번째 이야기는 중학교 때 내가 미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난 중2 여름방학때 Seattle 에 있는 Vashon Island 라는 곳에서 3주간 홈스테이를 하며 영어를 배우는 프로그램에 가게 된다. (역시 다시한번, 부모님 감사드립니다.) 처음 미국땅을 밟고 미국인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정말 충격이었다. 첫째로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하고 여유있을 수가 없었다. 내 또래 그집 자녀들은 공부를 하기는 커녕 책상도 없고 책도 없고 일어나면 뭐하고 뛰어놀지만 고민하며 살고 있었고, 부모님들- 기성새대들은 따스하고 인자로운 웃음과 썰렁한 유머로 날 항상 편안하게 해줬다. 가끔은 문화적인 코드 차이 – 세면대를 쓰고 나면 물을 닦아라, 라면을 먹을 때도 씹어먹고 후루룩 소리를 내지 말아라, 혼날 때도 눈을 마주쳐라,  등을 느끼고 배울때나, 한국이 막 중국과 하나된 나라지? (홍콩과 한국 착각) 정도로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는 얘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미국에 있다는걸 실감하곤 했다. 그러나 너무나 행복하고 편안했던 한달이었다. 하루종일 밖에서 뛰어놀다가 해지는 저녁놀을 보며 스테이크굽고 맥주 한잔 마시며 동화속에 나오는 사람들 같은 사람들과 인생을 이야기했다. 그집 부부는 7년을 걸쳐 직접 지은 집에서 살고 있는 낭만파였고 보트로 세계를 여행한 콧수염기른 멋진 그집 부부의 친구 아저씨는 내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무슨 말만하면 칭찬해주고 웃어주는 긍정적인 문화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자연을 벗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삶에 대해 더 여유롭게 관망하는 성숙한 사람들. 난 이들과 한달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 너무 좋아서 그 후년에 다시 방문했고, 지금도 연락을 유지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이다. 무엇보다도 내게 미국이 가진 아름다움과 그 culture에 대한 동경, 선망을 심어준 경험이다. 나중에 내가 미국에 와서 힘들었을 때도, 내게 근본적으로 미국이 가진 청교도 정신, 주위에 베풀고 주위 사람을 존중하는 자세 같은 것들을 “좋게 보는 마음” 을 잃지않게 해준 근간이 아니었을까.

3. 한국에서 해본 영어공부 – 대학다닐때도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쓰다.

안병규 선생님과 미드 강좌

안병규 선생님과 미드 강좌

세번째 이야기는 대학생활 이야기이다. 난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중학교때 두번 한달씩 나가 미국에서 있어본 것 외에는 전혀 외국생활 경험이 없었고 그나마 하던 영어회화도 중학교 때 끊긴 상태라 나에겐 영어를 쓸 수 있는 공간이 절실했다. 그래서 강남역에서 아침 6시 20분~7시 10분간 진행되는 안병규 어학원의 미드 듣고 따라하고 표현배우기 영어 강좌를 꽤 몇달간 수강했다. 아침일찍 뭔가 한다는 느낌이 너무 좋았고 또 미드도 그렇게 재밌는게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영어가 그리 는 것 같지는 않다. 배우는 표현도 한정되어 있고, 대 강좌다 보니 내가 말을 해도 피드백을 바로 받거나 대화로 이어갈 수는 없었다. 즉 나는 미드를 너무 좋아했고 따로도 많이 봤지만 결코 그걸보며 영어를 공부하거나 영어가 는 케이스는 아니다. 그냥 뭔가 영어를 한다는 느낌이 좋았다. 간헐적으로 시험보러 다닌 토익과 토플 학원에서는 영어가 그리 늘지 않았다. 대학교때 한번씩 다닌 외국 여행, 특히 터키에서 한 국제 워크캠프기간에는 영어를 계속 썼는데 난 일상 회화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고 얘들도 마음좋은 유럽애들이다보니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의 영어는 여전히 얕은 회화 위주였고 깊은커뮤니케이션을 하기엔 부족함이 많았다. 매일 아침 10분정도 통화하는 전화영어도 좀 해봤는데 감을 유지하는데는 도움이 됐지만 대화가 깊어진다든지 표현력이 는다든지 하는 느낌은 없었다.

영어 과외를 해볼까. 월스트리트 인스티튯 같은델 다녀버릴까. 학원을 다니면서 영어가 진짜 는다고 느낀 시간은 신동표 어학원의 신동표선생님 통번역반을 다니면서 부터이다. 이건 재경부 근무당시, 즉 2010년 이야기인데, 난 주말 오전에 신동표 어학원에 가서 영어배우는게 참 즐거웠다. 특히나 통번역대학원을 준비하는 이쁘장한(?) 여성분들과 정말 어려운 뉴스나 지문들을 즉석에서 영한, 한영 번역을 하여 발표하는 연습을 한 것은 엄청난 도움이 됐다. 한번에 약 3분짜리 뉴스를 듣고 바로 요약해서 영어와 한국어로 이야기해보기 는 그냥 수동적인 듣기에서 능동적으로 키 포인트를 집어내며 듣는 연습을 하게 해줬고 한국말을 영어로 할 때도 (이게 훨씬 쉬웠지만) 논리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많이 해보게 됐다. 결과적으로는 반에서 겨우 꼴찌 수준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선생님이랑도 친해지고 통번역 대학원을 준비하지 않는 민간인으로서 꽤 한다는 쿨한 포지셔닝+칭찬으로 스스로도 더욱 뿌듯해지고 모티베잇 되는 그런 쾌거를 일궈냈다.

4. 카투샤 군시절이 내게 준 것 – 근성과 자신감, 단 영어는 그다지

나의 군생황을 보듬어준 이주승 이태윤 형님과 (제일 오른쪽이 나)

나의 군생황을 보듬어준 이주승 이태윤 형님과 (제일 오른쪽이 나)

네번째이자 1부의 마지막 이야기는 카투샤 군시절 이야기이다. 운하나로 살아온 인생살이에서 이때도 운이 터져서 나는 카투샤로 2003년 입대했다. 편한 용투샤를 꿈꾸다가 끌려간 JSA에서 만난 미국인들과 상당히 친해지면서 영어도 좀더 자연스러워 지고 미국 문화도 좀더 이해하게 되었지만 내 영어와 미국에 대한 이해가 크게 는 것 같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하는 대화가 한정되어 있었고, 많은 시간을 같은 카투샤끼리 한국말하면서 보낸 것도 사실이다. 또 대화의 상대방들도 결코 미국의 최고 엘리트 층이 아닌, 그냥 아무말이나 하고 욕하기 좋아하는 미국애들이었든지라,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영어를 배운 면이 있지않나 싶다.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는 늘었지만 그게 나중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크게 도움이 되는 수준의 것이라기 보다는 그냥 군대에 오는 미국애들은 이런생각하고 사는구나, 정도? 역설적으로 미국애들과 말다툼할때에 그나마 가장 많이 challenging 받고 영어가 는 것 같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나의 영어는 이미 기본 회화는 자유로운 수준이었기에 카투샤 군생활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여지는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카투샤 나오면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한다는건 가끔 미국인만 있고 카투샤는 혼자뿐인 그런 곳에 가서 2년간 굴러온 애들에게 해당되는 얘길 지는 몰라도 상당수의 카투샤들은 “그럼 넌 외고나왔으니까 영어랑 프랑스어 다 잘하겠네? 뭔말인지 알겠지? ” 라고 웃어넘겨 버릴 수 있는 얘기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About sanbaek

Faithful servant/soldier of god, (Wanna be) Loving husband and father, Earnest worker, and Endless dreamer. Mantra :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Inspire and empower social entrepreneur. 30년간의 영적탐구 끝에 최근에 신앙을 갖게된 하나님의 아들. 사랑과 모범으로 가정을 꾸려가진 두 부모의 둘째아들이자 wanna be 사랑아 많은 남편/아빠. 한국에서 태어나 28년을 한국에서 살다가 현재 약 3년가까이 미국 생활해보고 있는 한국인. 20세기와 21세기를 골고루 살아보고 있는 80/90세대. 세계 30여개국을 돌아보고 더 많은 국가에서 온 친구들 사귀어본 호기심많은 세계시민. 그리고 운동과 여행, 기도와 독서, 친교와 재밌는 이벤트 만들고 일 만들기 좋아하는 까불까불하고 에너지 많은 Always wanna be 소년. 인생의 모토: 열심히 살자. 감동을 만들자. Social entrepreneur 들을 Empower하자.

8 comments

  1. 몰래몰래 본지는 육개월째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2. Hyunsoo Jung

    구글에서 관련 내용 보다가 이 곳으로 들어왔는데, 글을 깔끔하게 잘 쓰셔서 좋은 내용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 또한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다 휴학하고, 현재 샌프란시스코에서 영어공부와 구직을 병행하면서 워킹비자 받고 여기서 머물고 있는데요. 앞으로 자주 들려서 정보 얻고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

  3. 우연히 홈페이지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글을 읽어가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열정이 마음 속에서 생겨남을 느끼고 고마움을 남깁니다. 저는 2005년 이민을 와서 Palmdale, CA에 살고있는 중년의 아저씨입니다. 지난 8년여간 이민1세로 생존이라는 목표에 집중했던 삶이었는데, 후배님의 글을 읽으며 다시 꿈을 꾸어보려합니다. 종종 들려 힘을 얻고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저 서울대 88학번입니다.^^ 생면부지에 후배님이라 표현해서 놀라실까 싶어 알립니다. 그럼 오늘도 많이 행복하세요!

    • 안녕하세요 선배님, 너무 영광이고 감사합니다. 위 이메일로 연락드리면 될까요? 언제 한번 꼭 찾아뵙고 싶네요. 후배로 잘 챙겨주세요. ^^

  4. 안녕하세요. 이전에도 백산 님의 블로그 글은 많이 봐왔지만 이 글은 검색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되었네요. 저 역시 현재 신동표 어학원을 다니고 있고, 2007년에 동두천에서 카투사로 군생활을 한 경험이 있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게 되네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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