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 읽기에 앞서 제 블로그에 처음 들어오시는 분들은 부디 공지사항 에 있는 글들을 읽어봐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에서 이런 글들을 쓰고 있고 제게 연락주시고 싶은 분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것 같은지 제 생각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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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글은 작년말부터 나의 삶에 정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나의 Doing, Bitfinder에 대한 첫번째 이야기이다. Doing 부분에 대해서 많은 글을 쓰고 싶으면서도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선 자세히 쓰기에 항상 어려움이 있다. 회사 이야기의 특성상 어려운점이나 부족함을 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이 공간과 잘 안 맞는 면도 분명 있다. 최대한 자랑성이나 선전성 표현이나 이야기는 자제하겠지만 감안하고 읽어봐주시기 부탁드린다.
StartWave 의 인연…범준이형을 알고
“산아 난 한번 챙기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확실하게 챙겨.”
2011년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됐을때, 취직, 새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와 직면한 문제들에 너무나도 목마르고 어떤 동앗줄이라도 잡고 싶었던 내게 어느날 토요일 하루종일 시간을 내준 범준이형이 해준 말이다. 바쁜 직장과 아내와 갓 돌지난 딸이 있는 이 바쁜 사람이 내게 베풀어준 사랑과 마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전에 같이 도모했던 StartWave 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다시 생각해도 한번 신나게 달려봤던 그 순간들이, 너무나 가슴뛰는 기억이었다. 이 일을 같이 해보기 전부터도 범준이형은 내게 너무나 특별한 사람이었지만 일을 하고 나서 훨씬더 가까워졌다. 정말 그냥 친한 사이 이상의 신뢰와 정을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적어도 난 형을 너무 좋아하고 따르게 됐다.) 그리고 이때 인연이 된 많은 사람들과 또 지금 회사에서 함께하고 있는 것도 참 감사한 우연이다.
Bitfinder의 성장을 지켜봄
“산아, 이제 나 시작한다. 니가 언제든 와서 신나게 일해볼 수 있는 조직, 팀 만들어 볼 목표로 열심히 달려볼게’

잊을 수 있는 맨하탄의 새벽녘
2012년 형이 회사를 나오면서 언젠가 같이 일할 기회를 계속 도모해보자고 했던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적어도 두세달에 한번은 아무 이유 없이 비디오 통화를 하거나 밥을 먹고 무슨 일이 있을때마다 서로 연락하고 최대한 돕고 애썼다. 형이 이사할 때 같이 가기도 하고, 종종 저녁도 먹고, 갈데가 없을때 형네 집에 얹혀도 지내고, 그러다가 2013년 신앙이 생긴 이후는 같이 신앙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난 정말 듬뿍 사랑받았다. 그러다보니 형이 한국에 간 이야기, 한사람 한사람을 만난 이야기, Bitfinder 를 만들고 팀을 꾸려온 이야기를 꼭 우리 친형 이야기처럼 듣고 지켜볼 수 있었고, 그 과정을 간접적으로나마 함께할 수 있었다. 워낙에 좁은 세상이다 보니 팀원들 대부분이 내가 아는 사람이거나 한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이었기도 하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기회
“잘됐다 산아. 하나님이 주신 기횐가 보다. 너 여기와서 나좀 도와줘라.”
2014년 9월, 뜻하지 않게 LINE을 떠나고 실리콘밸리로 돌아오면서 (이글 참고) 난 범준이형한테 전화를 걸었다. “형 저 완전 XX됐어요. “그때 형이 해준 말이 바로 저 말이다. 너무도 생생해서 도저히 잊을수가 없다. 그때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될수가 없더라. 난 갈곳이 없는데. 난 갈수록 자신감이 떨어져 가고 힘이 빠져 가는데,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나와 같이 일하고 싶어한다는게… 그리고 나서 일단은 결혼식 준비와 개인적인 삶에 집중하다가 난 범준이형과 호흡을 맞춰보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물론 그 전에도 범준이형은 전화와 또 틈나면 시간내서 만나서 나를 위로해주고 내게 회사진행 상황과 같이 해볼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줬다.
신혼에 집떠나 시작한 합숙생활
“산아, 내가 더 보고싶은게 있어. MBA다닐때 그 또라이같은 백산, 그 에너지를 보여줘.”
11월 말 뉴욕에 갔다. 한 일주일에서 열흘정도, 신혼여행 겸, Bitfinder 팀과 같이 한번 호흡 맞춰볼겸 겸사겸사 간 여행/예비 출장이었다. 아주 재밌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HW회사 답게 매일 HW를 만드는 것, SW를 만드는 것, 등등등. 난 상당히 비장한 마음이었다. 당시의 나의 professional insecurity 는 극에 달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잘하는게 무얼까. 난 왜 지금 미국땅에서 이러고 있는가. 내가 쓰임받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러다가 간신히 잡은 직장이었고 기회였다. 그것도 내가 너무나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이 몇년을 걸쳐서 만들어준. 정말 잘하고 싶었다. 한번 fit을 맞춰보자는 거였고 정식 오퍼레터도 없었지만 나에게 Fall back option, 2nd option은 없었다. 이것 아니면 없었다 어떻게든 해내야 했고 같이하고 싶었다. 그래서 조급했고 그래서 많이 눈치보게 되고 많이 불안했다. 빨리 성과를 내고 싶었고 나의 작은 실수나 작은 퍼포먼스에 다른사람들이 나를 계속 judge하는것 같았다. 이 미팅에 내가 들어갈지 말지, 이 결정을 내가 할지 말지, 어떤 날에는 범준이형의 말과 표정 하나하나에 너무나 기분이 좌우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외부 미팅을 한번 갖다올때 범준이형이 내게 했던 말이다. 충격적이었지만 정신이 번쩍드는 계기가 됐다. 그래. 쫄고 있을 이유가 없어…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 같다. 정말 감사했던건 형을 비롯해 팀원들이 항상 칭찬해주고 북돋아 주고 한 가족처럼 대해줬다는 것. 2015년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한번 팀과 일해보기 위해 신혼에 계획에 없던 집떠난 합숙생활을 뉴욕에서 시작했다. 6명이 2 bed room에서 먹고자는 강행군의 막바지 한복판에 뛰어들자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흘렀고 팀이랑도 몇주간 같이살며 볼꼴 안볼꼴 다 보면서 정말 친해졌다.
정식으로 사인. 부디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기를
“산아, 같이 해보자. 이미 볼만큼 봤고, 알만큼 알고, 무르익을만큼 무르익었어. 같이 하자야. 가슴뛰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거야. “
2월에 데모데이를 끝내고 실리콘밸리로 돌아오기 무섭게 우리는 또 Mayo clinic과의 파트너십을 위해 로체스터 미네소타로 향했다. 미국 최고의 클리닉 중 하나로 알려진 Mayo Clinic에서 범준이형과 호텔방 하나에서 먹고자고 하면서 보낸 2주간은 너무나 재밌고 또 감사했다. 오퍼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한복판에 오퍼레터가 왔다. 난 정식으로 사인하고 우리는 같이 무릎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허락해주시는 한 같은 공동체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lasting entity 를 만들고 싶다고…
산이만의 여정.. 산이만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 소중하게 느껴지네 🙂
하이고매 형님 캄샤합니다…. =)
안녕하세요, 매번 글만 읽고 가다가 건승하시라고 메세지 남깁니다. 도전적인 모습 보기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응원이 되네요.!!! 정말 갈길이 멉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