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집에서 보낸 일주일 – 가족편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에 콕 박혀 지낸지 일주일이 지났다. 은근히 많은 시간이 지난것 같지만 이 모든게 일주일밖에 안됐다니 새삼 새롭다. 그간 느낀 몇가지를 나누고 싶어서 새벽4시에 눈을 떠 모든걸 제치고 글을 쓴다. 부디 내가 느낀 것들이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어떤 공감이나 위로, 평안의 메세지가 되기를 기도한다.

일주일간 느낀것의 여러가지 부분 (가족, 일, 예배, 다양한 생각들) 을 시리즈로 써보고 싶은데 (역시 야심차다 ㅋㅋ) 이건 그 첫번째,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홈스쿨링 하는 보석같은 아내

아내가 꾸며준 작은 책상과 애들 놀이터

팔불출처럼 아내 자랑을 하며 시작하니 양해 부탁(^^) 드린다. 이미 상당히 안다고 생각했지만, 집에서 또 일주일동안 애들도 보고 하며 있어보니 아내가 새롭다. 아내는 미술도 음악도 재능이 상당하다. 하루종일 애보고, 밤에 내일 애들과 할 새로운 액티비티를 여기저기서 보고 만들며 기뻐한다. 임신 막달인데 ㅠㅠ. 그 창조성과, 그 에너지에 깜짝깜짝 놀란다. 정말 우리 가족의 해 (안의 해) 이고, 축복이고, 엄마이고 아내이다. This woman is incredible.

부끄럽지만 고백할게 하나 있다. 사실 칭찬받는데 익숙했던, 칭찬을 먹고 산 공부좀 한다고 했던 둘째아들 한국인으로서 난 내가 모든거에 잘하는줄 알았다. 미술도 곧잘 한다고 생각했고, 뭐 피아노도 오래쳐서 음악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 진짜 부끄럽다. 이런 나의 완벽한 착각은 부분적으론 청소년기에 깨졌고, 대부분이 성인이 되어 깨졌다.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다.

아내는 정말 나와 다른 사람이다. 먹는걸 엄청 좋아해서 요리하는게 행복이고, 음악 미술, 심지어는 체육까지 (지난번에 아내와 혼신의 힘을다해 탁구를 치고 진 후에 난 탁구채를 잡지 않기로 했다) 다재다능하다. 심지어는 이런 유투브까지? 후덜덜 (여보 미안 ㅋㅋ). 부부가 살면서 서로 피어나는걸 보는건 놀라운 축복이 아닐까. 마치 같이 일하는 사람의 수퍼파워를 보면서 서로 의지하고 어벤져스 팀을 꾸릴때 기쁘고 든든한것처럼. 다시금 느끼고 감사한다. 우리 아내는 수퍼우먼.

와서 이르지마 지금 하율이 혼나잖아

둘째가 잘못했다. (두살짜리니 잘못하는일이 하루에도 수십번 수백번이다). 잘못하는게 정말 다양하고, 큰사고가 있고 작은 사고가 있지만 이번엔 꽤 큰 사고였다 (먹지말라는걸 입에 넣어서 큰일날뻔한). 그래서 이건 확실하게 혼내고 넘어가야 겠다고 해서 혼내는데 첫째 하루가 와서

“엄마, 아빠, 난 안그랬어요. 잘했죠? 하율아 너 똑바로 벌서. 혼나야되!”

이러며 엄마 아빠 코스프레도 하고, 자기를 알아달라고 한다. 이거야 원 네살짜리가 벌써 호가호위를. 그래서 한소리 들었다. “와서 이르지마. 지금 하율이 혼나잖아.”

형제자매의 잘못을 이르는건 부모의 징계를 멈추거나 누그러뜨리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와서 자기는 잘했다고 하거나, 심지어 부모를 등입고 본인이 직접 혼내면? 이 상황에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된다. 부모도 마음이 많이 아프다. 이미 큰 문제가 나서 둘째는 울고 있고, 집안 분위기는 엉망일지 모른다. 이렇게 혼낼때는 차라리 다른 애는 어디 가있거나 가만히 자기할일 하고 말썽안부리는게 도와주는거다.

만약 첫째가 와서 진심으로 울면서 이랬다면? “아빠, 엄마, 마음이 많이 아프시죠? 하율아, 너도 많이 놀랬지? 사실 이게 하율이만 잘못한건 아니에요. 제가 동생을 더 잘 보살폈어야 되는데. 동생이 뭘잘 모르고 한거니 차라리 저를 대신 혼내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것만큼 부모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하는게 있을까? 진정한 형제 사랑은 이런게 아닐까?

엄청난 고통이 찾아올때, 그 고통을 설명하려는 것은 인간적 본능이다. 종교계에서 부터, 표현하든 표현하지 않든 다양한 해석과 설명이 있는것을 알고 느낀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를, 일부는 하나님의 이땅을 향한 징계나 심판으로 보기도 하고 (물론 그 근간에는 자식이 부모에게 돌아오기 바라는 사랑이 있다는걸 이야기하지만), 불교나 힌두교 같은데서는 전생의 업보 같은것으로, 건너선 안될강을 건넌 (동물과 너무 접촉한?) 것에 대한 결과로 보기도 하리라. 그러면서 이땅을 위해 중보한다고, 대신 기도하고, 대신 회개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나만 해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품고, 이 작은 미생물이 모두를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을 없애달라고 기도해왔다.

나는,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이르고 자기는 잘했다고 알아달라고 하는 첫째처럼 중보하는가? 아니면 더 심하게, 형제들에게 이런저런 걸 잘못해서 벌받는거라며 지적질 하는가? 그런 우리의 가슴엔 무엇이 있는가? 형제를 향한 사랑이 아닌 정죄하는 마음, 나는 그리 잘못하지 않았다는 자기 의 (self-righteousness)가 가득하지 않은가?

잠깐 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놀라운 기적과 사랑의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땅 노예에서 구하고 홍해를 가르고 미디안 광야에 인도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불평하고 범죄하자 이들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민족을 일으켜 모세와 함께 자신의 특별한 계획을 실행시키고자 결심한다. 그때 사랑하는 아들 모세가 눈물로 자기에게 호소했다. “하나님, 이들을 죽이실거면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을 바꿨다. 여기에 더 나아가, 실제로 이 모든 죄값을 직접 치루고 돌아가신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자 성경의 주된 스토리이다.

우리는 나는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는가? 탕자의 비유에 나온 첫째 아들처럼 자기는 잘했다는 자기의로 가득차 있는가? 욥의 친구들처럼 분명뭔가 잘못했으니까 징계가 왔지 그러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손가락질 하는가? 아니면 형제를 향한 진정 사랑의 마음으로 모세처럼 울부짖는가. 우리 아버지는 무엇에 반응할까? 집에서 애들보면서 느끼는 마음들, 생각들.

왜 또 풀죽어 있는거니?

하루가 만든 컵케익선물. 아빠로선 이거 이상이 컵케익이 세상에 있을리 없다

하루는 잘 삐진다. 잘 풀이 죽기도 한다. 한번은 하루가 완전히 풀이 죽었다. 자기는 언니 오빠들 처럼 글씨도 잘 못쓰고 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였다.

“하루야, 왜 암말도 안해? 왜 기분이 안좋아?”

처음엔 말도 안하고 뾰루퉁 해 있다가, 한참 기다려주고 달래주고 하니, 울먹이며 “나도 빨리 크고 싶어 엉엉. 언니는 이런것도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해” 이러면서 운다.

하루는 그림을 진짜 잘그리고 좋아한다. 근데 수학이나, 암기는 사실 부모가 보기에도 사알짝 걱정이 (?) ㅋㅋ. 엄마를 닮은게야. 뭐 아무래도 좋다. 절대 남과 비교하거나 남이 되려할 이유가 없다. 좋아하고 잘하는거 하면 되니까. 그게 부모 마음이다. 어느순간 하루가 이상한 언니들이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아님 세상에서 이상한 겁을 먹고 와서, 왜 나는 수학을 못하는거야 이러면서 풀이죽어 있거나, 심지어 우울증에 빠진다면, 부모로서 그것만큼 슬픈일이 있을까.

얼마전에 내 영적멘토와 오랜만에 통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내 눈을 똑바로 보더니 이러더라.

“산, 전혀 기쁜거 같지가 않은데? 무슨일이 있었던거야? 왜그래? 나한테 이야기해봐”

그래서 가만히 내 속을 들여다보니, 내가 무엇에 풀이 죽어 있는지가 보였다. 난 그날 영어기도 모임을 앞두고 있었다. 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은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사람들이었고 객관적으로 말하고 기도하고 이런데 은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과 영어로 같이 기도할 생각을 하니 이상한 중압감이 있었고, 이 사람들 앞에서 내가 말을 조리있게 하지 못할수도 있다는게 나를 묘하게 짓눌렀다. 난 이들을 사랑했지만, 그래서 이들에게 잘보이고 싶었고, 내 영어가, 내 말솜씨가 충분히 좋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나도 모르게 풀이 죽어 있었다.

예수님이 만난 사람중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아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스스로도 본인이 너무나 천하다고 생각했던,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고 (아마 계속 이혼당했던게 아닐지) 천대받는 계층인 사마리아인 이었으며, 아무도 물을 긷지 않는 시간에 혼자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긷고 있었던 그 여인의 이야기. 어쩌면 스스로를 매우 낮은 사람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늘 푹 숙이고 다니고 있었으리라. 그러던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자 180도 바뀌었다. 자기가 피하던 세상으로, 피하던 사람들에게 가서 큰 소리로, 무엇도 의식하거나 하지 않고 외쳤다. 기쁨으로 동네방네에 가서 소리쳤다 와서 보라고.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아무 거리낌도 없이.

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우물가의 여인처럼 살고 있진 않은가. 세상과 나를 비교하며 풀죽어 있진 않은가. 내가 나 스스로를 판단하며 저으기 겁먹어 있거나, 나를 내버려 두라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진 않을까? 이렇게 비교하는데 익숙하다 보면 난 은근히 내가 잘하는걸, 주위와 비교해 더 많이 가진걸 뻐기거나 (속으로 좋아하거나) 못하는거나 덜가진거에 풀죽거나 (아님 마음을 닫아버리거나) 하게 된다. 내 머릿속의 논리는 명확하다 – 내가 수학 못하는거, 내가 이사람보다 못가진거, 내가 남들보다 말 못하는건 확실한 사실이라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게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가 우리 사랑하는 아버지가 보기엔? 우리 아버지는 내가 그냥 나답게 신나게 세상을 향해 아무 거리낌 없이 맘껏 나답기를 바라실텐데. 나의 나된것 만으로 너무나 좋다고, 사랑한다고 하실텐데. 그럼 난 예수님을 만난 우물가의 여인처럼 마음껏 기쁨으로 신나서 아무 신경도 안쓰고 소리칠텐데. 아래는 관련하여 내가 최근에 성경공부 카톡방에 나눈 메세지다.

워낙에 시대가 수상하니, 자꾸 하나님앞에, 제가 뭘 할까요. 제가 대신 회개할까요. 제가 어떻게 사랑할까요 이렇게 물은것 같아요. 그리고 아무것도 못하고 안하고 있는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아님 주위에서 뭔가 하고있는사람을 보면서 아 여기에 Jesus의 이름을 얹어야 하는데 조바심도 난거 같고요. 오늘 기도하는데 이런 조바심, 이런 마음들 다 내려노라하시는 주님의 넉넉함을 느낍니다. 어차피 내가 하는거다. 나의 때에. 너는 그냥 내 안에 거하거라. 기쁨과 평안과 유머로 나아가거라. 주위에 아름다운 움직임을 맘껏 칭찬해주거라. 꼭 직접적으로 내 이름이 거기 없어도 좋다. 꼭 니가 안해도 좋다. 그냥 칭찬해줘라. 집에서 부터 나의 사랑을 가족에게 주고, 무엇보다 니가 기뻐하고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한꺼번에 다 안해도 괜찮아. 계속 눈물로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를 믿고, 평안가운데 거하며, 할수있는것을 기쁨으로 하려무나….think that’s what he is saying to me today

부부가 각자 공급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지난 일주일간 아이들 표정이 더 밝아진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학교에 가서 낯선 사람들과 지내는게 재미도 있지만 스트레스도 있었을텐데 집에서 엄마 아빠가 이렇게 늘 있고 신나게 놀아주니. 아들은 날 볼때마다 거의 놀이터 취급을 하는데 그게 전혀 싫지는 않지만 때로는 감당이 안되기도 허허

문제는 부모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애들이 신나게 즐겁게 뛰어놀때 사진만 올리지 애들이 땡깡부리고 말도안되는 짓 해논 사진은 찍지도 않고 올리지도 않는다. 사진찍을 여유가 어딨겠는가. 여기에 평소엔 당연히 가능하던 것들이 – 그게 일이든, 성경 읽는거든, 기도하는거든, 친구들과 한번씩 만나서 밥먹고 수다떠는 거든 – 너무나 쉽지 않아지니 이것또한 스트레스. 특히나 애 있는 집들은 이해하리라. 가장 기본적인 나의 의무들만 하기에도 힘이 벅차다. 여기에 다른 스트레스 – 그게 내가 산 주식이 떨어지는거든 (다행히도 난 주식도 하나 없는 소시민이지만 ㅎㅎ) 회사 스트레스든 그냥 막연한 불안감이든까지 겹치면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일이 큰 스트레스가 되고 싸움이 된다.

우리도 힘들었다. 특히 지지난주에는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우리는 급기야 애들을 처갓집에 보내고 (처갓집이 근처에 있는건 진짜 큰 축복이다) 몇년만에 단둘이 며칠저녁을 집에서 보냈다. (묘한 어색함과 침묵속에서 허허) 그 기간 중에 한번의 공동체 기도모임, 그리고 한번의 개인적인 기도를 통해 아내가 완전히 회복하는 축복이 있었다. 지난주 초인적인 아내의 헌신과 사랑은 그 전주에 있었던 회복, 위로부터의 부으심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

나만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기쁘고 내 마음이 평안하고 할때 이 모든것들이 축복으로 다가오지, 내가 숨이 턱까지 차오를때는 이 모든게 스트레스고 폭탄에 불붙이는것처럼 느껴질때가 얼마든지 있다. 예를들어 아내가 – 불안하니까 카페에서 커피 테이크아웃도 하지마 – 이럴때, 그럼 슈퍼는 가면서 커피는 안된다는거야? 이런 유치한 마음이 든다든지 (다행히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휴). 애들한테 괜히 화풀이를 한다든지, 그리고 또 스스로를 자책하며 우울증에 빠진다든지. 그런 악순환이 얼마든지 반복될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고, 더 온화하게, 더 따뜻하게 신경쓸 때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자 위로부터의 사랑을 공급받아야 한다는게 절실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줄수 없듯이, 내 안에 줄 사랑이 있어야 나눌수 있듯이, 사랑은 나눌수록 더 채워지지만, 사랑의 공급원과 내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 한계가 있는 구조라는걸 느낀다. 다른 글에 쓰겠지만 각자 어떻게 그 사랑을 채움받고 있는지 보면 참 재밌다. Zoom으로 친구들과 술을 한잔 하기도, 댄스파티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즐길 수 있는 TV, 비디오, 넷플릭스, 게임 등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나에겐, 우리 부부에겐, 위로부터 공급받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그래서 서로 더 기도하고 배려하려 노력하고 다짐한다.

부부간의 작은 거리감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 노아의 방주

코로나 이후 부부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어찌보면 더 바쁘고 정신없어 졌다. 애들이 학교도 어린이집도 안가니 임신한 아내는 늘 무거운 몸으로 애들 보고 하느라 파김치가 됐다. 나는 나대로 애들도 보고 회사일도 하면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남는 시간이 있으면 각자 밀린일을 하거나 본인이 진짜 하고 싶어하는 일 – 많은 경우 위에 나온 ‘위로부터 공급받기’를 각자 하느라 몰두했다. 그러기에도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부족했기에.

난 시간이 나면 조금이라도 말씀일 읽거나, 아니면 다양한 기도모임, 온라인 소그룹 모임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거의 매일밤 뭔가가 있었던것 같다). 아내는 교회일과 다양한 밀린일 하느라 바빴다. 그러다가 보니 우리끼리 대화도 꽤 있고, 서로 사이도 좋고, 종종 시덥잖은 농담을 할때도 있었지만 뭔가 완전히 클릭되지 않은 느낌이 분명히 있었다. 나는 기도모임을 할때마다 조금씩 괜히 눈치가 보였고 (사실 넘 많긴 했다 하하), 아내는 아내대로 그냥 나 건드리지 않고 본인 할걸 했고, 나도 그런 아내를 터치하지 않았다. 한두번 좀더 뭔가 나눔도 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를 시도도 해보려 했지만 그럴때마다 타이밍이 안맞거나 아내도 피곤해 보였다.

그러다가 엊그제, 아내가 매우 어색한 표정으로 할말이 있다더니 어렵게 나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

오빠, 사실 지난 일이주간 내 맘에 오빠와 거리를 두는게 나도 모르게 있었던것 같아. 나는 나대로 너무 정신없고 힘든데, 오빠는 늘 신앙적으로 재밌는거에 꽂혀 있는것 같고, 그게 꼭 나빠보이거나 싫은건 아닌데 너무 자극적인것만 찾나 이런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이런시기에 가족예배도 더 하고 가족이 더 하나되면 좋을텐데 뭔가 오빠 마음은 딴데 더 가있는것 같기도 하고 나는 지금 그런데 더 낼 에너지가 없는데. 그래서 은근히 거리를 두고 있었던것 같아. 그런데 어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그거 하지 말라고 – 거리두기 – 회개시키고 오빠한테 사과하라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사과 하려고 (어색). 지금 진짜 특별한 시긴거 같아. 마치 노아의 방주를 짓게 하셨을때의 그런시간같아. 우리 가족이라는 이 작은 공동체가 너무너무 소중한것 같아. 이 작은 공동체에서 부터 더 큰 공동체로 계속 나아가지 않을까. 바이러스와 함께 집에만 있게 된 이 시간에, 하나님이 그걸 다 다시 새로 처음부터 제대로 만들게 하시는 느낌이야.

그랬구나. 뭔가 느낌은 있었지만 설명되지 않던 것이 설명됐다. 그리고 어떤 상황인지 이해도 너무나 됐다. 나도 이런기분 느낀적 있었다. 전에 아내 선교보내고 우울증 걸렸을때 (과거글 참고), 난 아내와의 인티머시 – 하나됨을 원하는데 아내는 너무나 앞으로 나가는데 마음이 쏠려있는것 같아서 외롭고 허전하고 괜히 밉고 그랬었던게 기억났다.

사실 이 상황을 비난하거나 짜증내지 않고 아니면 전에 나처럼 내가 너무 힘들다고 밉다고 실토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고 나에게 사과하는 아내가 세상에 어딨겠는가. 하지만, 불행히도, 난 그 아내의 회개와 사과와 먼저 내민 손을 성숙하게 잘 잡지 못했다. “아 그랬구나, 무슨 말인지 알아. 나도 전에 그랬잖아. 우리 좀더 잘해보자” 이정도로 이야기하고 넘어갔지만, 내 마음은 평화롭지 않았다. 뭔가 걸린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확히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굳이 표현해보자면 이런 이유에서였던것 같다.

아내가 이해안되는게 아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얼마나 힘들겠는가. 하루종일 만삭의 몸 이끌고 애 보고, 짬짬이 교회일도 해야하고. 그러다가 머리 식히고 나와 수다를 좀 떨고 싶거나 같이 애들 이야기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러고 싶을텐데. 하지만 난 나대로 너무나 바쁘고. 나도 지금 이렇게라도 기도하고 이렇게라도 모이고 하지 않으면 내 영이 죽을것 같은데. 그리고 남녀의 사랑의 랭귀지는 왜 이다지도 다른 것인가. 난 아내의 정서적 필요에 귀기울이고 하는게 참 간단하고 만만치 만은 않게 느껴지는데…참 왜 이다지도 다르게 우리를 만드셨을까. 하나님의 미스테리

그래서 하나님께 다음날 이런 불편한 마음을 토로하며 기도했다. 대략 이런식이었다.

산: 하나님, 제 마음이 불편하네요. 왜 이러죠? 사실 왠지 알것 같아요. 남녀를 너무 다르게 만드셨고, 전에 제가 반대입장이 되본적도 있고. 진짜 남녀는 로맨스를 느끼는게 왜이렇게 다른가요. 지금 제가 같이 기도하는 싱글들은 완전 불붙듯이 예배하고 사역하고 하는데, 가족을 꾸려가는건 확실히 만만치 않은 일이네요 블라블라

God: 산아, 니가 알긴 뭘 아냐? 웃기지 말아라 짜샤 (마치 내가 내 애들을 보고 귀엽다고 웃는것처럼)

산: (할말없음)

God: 산아, 결국 한몸인거 알지? 한영인거 알지? 너와 아내와? 내가 전에 알려줬지? 그리고 결국에 아내와 제대로 하나되지 못하면 그건 다 니책임인거 알지?

산아, 왜 부부로 하나되게 했는지 아니? 서로의 그 다름으로 인해서 너희 가정을 더 견고하게, 더 샐틈없이, 더 완전하게, 더 탄탄하게 만들기 위함이란다. 노아의 방주 – 그건 단순히 눈에보이는 크기의 문제가 아니야. 더 빨리 만드는 속도의 문제도 아니야. 얼마나 단단하게 얼마나 깊게 얼마나 많은 눈물과 사랑으로 겹겹이 지어졌느냐에 따라서 물에 빠질수도, 수많은 영혼을 담을수도 있단다. 부부가 서로의 다름을 껴앉고 희생하며 조금 느린것 같이 만들어가는 그게, 그게 내 방식이란다. 잘할 수 있지? 어서 회개하고 나에게 오려무나. 그래야 내 아들이지.

그제서야 난 눈물로 회개하고 아내에게도 미안하다고 하고 다시금 하나될 수 있었다. 다시금 가정예배도 더 신경쓰고, 아내의 작은 영적인 정서적인 필요에도 더 귀기울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 남자들이여 잘 들으시라 – 아내가 나를 다시 더 귀엽게(?) 봐주기 시작했다. 아내가 남편을 봐주지 않으면, 남편은 – 적어도 내가 나를 봤을때 – 늘 잔소리할 대상이고, 늘 뭔가 부족해 보이고, 그 가정은 얼마든지 바가지에 물이 새듯이 계속 샐수 있는 것. 이래서는 절대로 노아의 방주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리고 그건 남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헤아릴 수도 없는 영역, 아내가 키를 쥐고 있는 영역이다. 그 아내가 남편을 봐주기(?) 시작할때, 배의 새는 부분이 메꿔지고, 가정은 견고해 진다. 아내의 필요에 세심히 귀기울일때, 아니 다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런 노력이라도 할때, 아내는 마음을 열 기회와 명분을 더 얻게 된다. 부부관계는 이다지도 민감하고 이다지도 오묘하다. 서로에게 계속 열쇄가 있고, 한번 꼬이기 시작해서 거리가 생기기 시작하면 나중에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할지 모를정도로 멀어질 수 있다.

전에 이용규 선교사님 책에서 읽은것 같다. 하나님은 부부의 아주 작은 거리감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부부가 한 영이기에, 한 영으로 예배할때 진정 영광받으시고 기뻐하신다고. 그게 사랑이신 우리의 창조주,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 마음이 아닐까. 나와 민경이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작은 거리감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개입하신게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그래, 이 포스팅에서의 아내의 말처럼, 지금 이 시기는 노아의 방주를 짓고 있는 시기일수도 있을것 같다. 부디 이 가정의 영적 리더로서, 예수님을 쫓아서, 우리의 선조 노아 할아버지를 따라서, 믿음으로 사랑으로 헌신으로 하나씩 할 역할을 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아내의 포스팅: shelter in place 하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이 마치 노아의방주의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 가족. 방주안에서 오랜시간 어디 한번 나가지 못하고 오로지 가족들과만 보냈던 그 시간이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는 쉽기만 했을까. 하지만 그는 알았고 우리도 안다. 방주안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 장소이자 하나님이 함께 하신 가장 안전한 곳 그리고 은혜였음을. 이 시간이 비록 지치기도 하고 답답할때도 있지만 돌아보았을때 결국 이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작은 교회 가정을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약속처럼 다가온다. 부부간에 관계, 부모와 아이들간에 관계, 가정의 질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활들이 뜻하신 형상대로 회복되고 이 회복됨을 통해 더 큰 유닛의 교회가 더 나아가 이 세상이 회복되는 축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결국 결론은 또 나로부터 시작되리. 나 부터 잘하자😂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오늘의 엑티비티는 무지개펜케잌

가족, 그 소확행

가족들과 함께한 24-7. 진짜 부데끼며 볼꼴 안뽈골 보며 아름답지 않았던 (?) 순간들도 있고 사고도 꽤 있었지만 참 소소한 행복도 이런 행복이 있을까. 오늘은 일어나서 애들과 뭐하고 놀까. 애들이 또 어떤것으로 우리부부를 웃게 만들까. 아내는 또 어떤 마법을 부리려나. 이런걸 생각하니 참 기쁘고 감사하다.

워낙에 이 시대가 절대적인 기준을 거부하고, 각자가 기준을 세우도록 장려하고 권장하다 보니 이게 옳다 저게 어떻다 이야기하는게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내가 직접 경험하고 내가 주위에서 본 바로 몇가지 동의할만한 결론 (agreeable consensus)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남긴다.

첫째, 우리 모두에겐 사랑하고, 주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트위터에서 한명이 집앞 산책나갔다가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사방팔방에 전화해서 강아지 입양했다고 했을때 수만명이 라이크를 누르고 답변을 달았던게 아닐까.

3천명 이상이 라이크하고 수백명이 리트윗한 폴 그래햄의 블로그글http://www.paulgraham.com/kids.html

둘째, 아이를 낳는게 그렇게 힘들기만 하거나 나쁘거나 겁먹을 일은 아니다. 폴 그래햄의 이 블로그트윗은 실리콘 밸리 테크 업계 – 일과 커리어가 기본적으로 삶의 중심이고, 애를 낳는 것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상당히 큰 희생인것 처럼 여겨지고 있는 문화에 –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게 아닐까. 많은 부모들이 공감하겠지만 내가 준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받는다. 세상에서 그 누가 나에게 이만큼 열렬한 사랑을 표현하고 (때론 엄청 과격하고 대부분 너무나 귀여워서 가슴이 녹아내리게) 맹목적으로 내게 의지했나 싶은 기분이 종종 든다.

셋째, 내가 정말 좋아하는 김형석 교수님이 100년을 살아보니 란 책에서 한 말 – 고통과 함께한, 수고와 함께한 사랑이야 말로 삶을 살아보니 남는 거더라. 그냥 쉽게 얻어진 것들은 쉽게 가고, 진짜 사랑하지 않은 것들도 쉽게 가더라 이런 말씀을 남겼다. 너무나 공감한다. 가족, 애들 키우는건 정말 내 아내앞에서 내가 할말은 없지만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시기에 너무나 더욱 느낀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준 예상치 못한 소확행이다. 가족과의 시간.

5분만 눈을 떼고 있어도 허허
애들이 사랑하는 인디안 텐트
우리 하루의 시그니쳐 표정
요놈은 그냥 존재 자체가 재밌고 웃기다

About sanbaek

늦깍이 크리스천 (follower of Jesus), 우렁각시 민경이 남편, 하루하율하임이 아빠, 둘째 아들, 새누리교회 성도, 한국에서 30년 살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거주중, 스타트업 업계 종사중. 좋아하는 것 - 부부싸움한것 나누기, 하루하율이민경이랑 놀기, 일벌리기 (바람잡기), 독서, 글쓰기, 운동, 여행 예배/기도/찬양, 그리고 가끔씩 춤추기. 만트라 -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6 comments

  1. J

    산님, 안녕하세요. 자주 와서 글 읽었지만 댓글은 처음 남깁니다. 이 글은 그냥 ‘행복’ 그 자체네요. 머릿속에 딱 그 한 단어만 떠오르더라구요.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주셨던 은혜, 매일 변함없이 부어주시는 사랑과 인도, 공급하심이 산님의 삶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을 봅니다. 좋은 글로 행복의 향기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든 시기지만 산님, 가족 모두 건강하세요.

    • 안녕하세요 J님, 네 진짜 은혜로 지내는 요즘이고 나날이 은혜가 더하네요. 제가 한두문단 더 넣었는데, 실상은 늘 조금만 벗어나도 또 갈등이 있고, 눈앞의 환경은 만만치 않을때도 많지만, 그때마다 개입하시는 은혜를 너무나 많이 체험합니다. 따뜻한 커멘트 진짜 감사드려요! J님도요

  2. 정혜수

    안녕하세요 산형제님 – 예전에 네이버 블로그하실 때부터 올리신 글을 자주 읽다가 블로그를 잊고 지내왔는데 오늘 새누리교회 십이시 기도회 채팅창에 쓰신 글을 읽고 성함이 익숙해서 혹시나 하고 찾아왔는데 맞으셔서 혼자 너무 반가웠어요^^ 제가 블로그 글을 읽을 때는 타주에 살고 있었는데 2018년 말에 산호세로 오고 새누리 교회 청년부에 다니고 있어요. 그동안 올리신 글들을 하나씩 읽을 생각에 기대됩니다. 민경자매님과 새로 태어난 아기 모두 건강하길 소망합니다. 하나임! 승주찬!

    • 오 그렇군요 네 정말 환영해요 너무 반갑습니다. 교회에서 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겠네요 하하. What a small world. 교회에서 언제든 보면 인사해주세요 곧 뵙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하나임 승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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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Pingback: 2021년을 맞으며 | San's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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