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 하나되기의 고통 그리고 고통끝에 열매맺는 사랑

블로그를 소폭 바꿔봤다. 본인 소개를 하는 About San 을 만들었으니 처음 오시는 분이나 저를 모르시는 분은 한번씩 참고해봐 주시길. 그리고 블로그 글의 목차를 만들었고 블로그 글과 별개로 그때그때 ‘삶의 의미, 특히 신앙의 영역에서’ 내가 영감을 받는 내용들을 소개하는 뉴스레터도 새로 시작해볼 야심찬 계획이니, 모두들 구독을 부탁드린다.

이번글은 원래생각했던 ‘코로나-19와 신앙 마지막 글 (이웃사랑)’이나, 이코노미스트 스페셜 리포트와 이번 선거결과, 그리고 코로나로 인한 세계의 주목을 두고 쓰고 싶었던 ‘대한민국에 대한 생각 (내가 보는, 세계가 보는, 주위가 보는, 선거결과가 말하는)’ 을 제치고, 생각지도 않았던 글이 나와버렸다. 지난 몇주일간, 아내와 하나되는 과정에서 겪은 진통과 아픔, 그리고 그걸 통해 느낀 것들을 나누고 싶다. 주위에 비슷한 경험을 하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힘과 위로가 될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는 영광이고 기쁨일 것이다.


들어가며 – 부부의 세계, 그리고 코로나-19

부부의 세계라는 ‘막장 (?) 드라마’가 그렇게 화제라고 한다. 난 안봐서 모르겠지만 우리 어머니도 보고, 장모님도 보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보면서 그 심리묘사에 놀라고 공감하고 그런다고 들었다. 비단 그런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내 주위에도, 한다리 건너서도, 언론에서도 조금만 찾아보면 힘들어하는 부부생활, 이혼 이런 소식을 흔치않게 접한다. 수면위에 들어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정말 많지 않을까. 심지어는 결혼생활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결혼하기 싫다는 친구들도, 부모님의 화목하지만은 않았던 결혼생활에 상처입고 가정에 소망을 버린 친구들도 꽤 봤다.

코로나-19는 그렇다면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코로나로 인해 가족이 더 하나되면서 단단해져 간다는 이야기들도 물론 있을거고 소셜미디어엔 넘치지만 (그리고 우리 가족도 처음엔 이 글 – 코로나 집에서 보낸 일주일 – 가족편 – 에 나온것 처럼 은근 잘지냈다. 더 돈독해 지는것도 많았고) 과연 그럴까. 누구에게나 힘든 이 시기, 캘리포니아에선 지난 4주간 작년 한달에 준하는 자살 시도가 있었다고 (관련기사) 하고, 락다운이 있었던 지역에서 전세계적으로 이혼이 급증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읽은것 같다. 안그래도 신음하던 가정들이 지금 더 신음하고 있지 않을까. 코로나는 마치 건강도를 평가하는 스트레스 테스트의 외부 스트레스처럼, 우리의 관계의 건강함을 테스트하고 약한 부분을 더 조망대 위에 올려놓지 않았나. (참고: 코로나바이러스가 스트레스 테스트와 같이 우리 삶의 곳곳을 재점검하고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는 글, 강추)

코로나-19에 어떤일들이 있었는지에대한 솔직한 나눔과 간증

위는 내가 한번도 본적 없지만 온라인으로 보고 팬이 되어버린 Korean American Christian들의 모임영상이다. 5월달에 모여서 코로나기간중 어떤일이 있었는지 나누는데, 정말 나눔이 너무 좋아서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목사로 이 그룹을 리드하고 있는 목사부부가 자기들이 코로나-19이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싸웠다고, 수많은 것들이 스트레스 였고, 그래서 더 같이 있는 시간에 하나되기 위해 핸드폰도 내려놓고 일도 내려놓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듬어 주기위해 힘들게 노력했다고. 부부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싸우듯이 전투적으로 접근했다”고 (그만큼 열심히 했다고), 그리고 돈도 아닌, 일도 아닌, 커리어도 아닌, 나의 가족을 (그리고 부부관계를) 자신의 삶의 요새로 더 굳건히 쌓는시기로 삼고 노력하고 있다고 솔직히 나눴다.

이 글도 정말 감명 깊게 읽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대략 이렇다.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는 이 시기에 (그게 경제적인 스트레스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든, 애들이 집에 있으면 일이 더 늘어났든, 그것이 무엇이든), 부부관계에도 그 스트레스가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스트레스에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 더 화를 내고, 더 컨트롤하려 하는 사람이 있는반면 (뜨거운 화), 문제를 회피하고 자기 동굴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차가운 화). 둘다 좋지 않다. 화보다 더 안좋은건 서로 누가 더 잘하는지 잘못하는지를 머릿속에 회계장부 쓰듯이 일일이 기록하고 있는 습관이다. 누가 지금 더 고통스럽다, 내가 더 애를 많이봤다, 내가 더 억울하다 등등 . 그리고 나서 어떻게 이런 시기에 부부로서 같이 이겨낼지 구체적인 방법들을 이야기한다.

하나되지 못해 힘들었던 우리부부

우리에게도 이 시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몇가지 힘들수 있는 객관적인 상황들만 아래 적어보자면

  • 아내가 셋째를 4월1일에 출산했고, 출산후 으레 찾아오면 호르몬의 영향에, 육체적/정신적/영적 피로도 많이 겹쳤다.
  • 2살과 4살 애들이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학교도 다 닫아서) 집에 계속 있어야 했다. (장모님이 종종 도와주셨지만)
  • 방두개짜리 집에서 어린애 셋과 살다보니 (그리고 아내가 막 출산했으므로) 부부간의 로맨틱한(?) 시간, 데이트나 이런건 구경한지 오래됐다 (잠도 잘 못자는데)

그렇다 보니 많은 분들이 애보느라 힘들지 않냐며, 잠은 잘 자냐며 걱정해 주었는데, 사실 진짜 힘든건 애들이 한번씩 말도안되는걸로 짜증내고 힘들게 구는것도, 두세시간에 한번씩 계속 잠에서 깨야 하는것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도 아니었다. 진짜 힘든건 아내와 뭔가 어긋나고 하나되지 못해서 감정소모를 했던 시간들이었다.

부부관계라는게 그렇지만 많은 경우 문제의 발단이나, 서로 다툼 또는 의견 대립이 있었던 그 일은 지나고 보면 너무나 유치한 것들이었다. 여기에 일일이 다 나누기도 민망할 정도로. 그래도 읽으시는 분들을 위해 조금만 말씀드리자면, 첫번째 단절은 아내와 하나되려는 시도가 내맘대로 자꾸 안되고 오히려 역효과를 빚자 꽁한마음이 들어와서, 두번째 단절은 마스크를 쓰고든 안쓰고든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만나는게 안전하냐 안전하지 않냐를 두고생긴 의견다툼에서였다. 이하 그 단절들과, 그 당시의 나의 심리상태를 나누고자 한다. 진짜 쉐어하기 좋아하는 나지만 이걸 구구절절 다 나누는건 참 민망하다. 부디 나의 유치한 마음수준을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너그럽게 봐주실수 있기를.

첫번째 단절 – 나는 한다고 하는데 안되잖아. 삐뚤어 질테야 (인타이틀먼트(Entitlement))

첫번째 단절때 나의 마음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인타이틀먼트(Entitlement)” 이었다. 이 단어는 사실 한국어로 정확한 번역이 없는 단어이다. 굳이 영한 사전을 찾아보면 ‘권리’ 란 단어가 나오는데, 인타이틀먼트는 Right (권리)와는 확연히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영어 사전에 여러 정의가 있는데, 아래 몇개의 가장 이 단어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는 정의를 가져온다.

  • 자신이 어떤 특혜나 특정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믿는 믿음 (belief that one is deserving of or entitled to certain privileges)

그래, 이 인타이틀먼트는, 나의 나 됨으로 인해, 또는 나의 어떤 행동이나 상태로 인해, 나 자신이 옳고, 그럼으로 내게 특정한 권리가 있다는 믿음이다. 많은 경우 내가 옳다고 생각할때 (the belief of having a right to something) 이런 감정이 우리 안에 생기며 이 감정은 대부분 ‘억울함’과 함께한다. 내가 ‘당연히’ 가져야 한다고 느끼는 무언가를 못가지고 있을때, ‘공정하지 않다’고 느낄때 우리는 주로 이 감정을 느낀다. 나에게 이 인타이틀먼트는 아래 소개할 몇단계로 나타났다.

인타이틀먼트의 유혹에 빠져들다

코로나와 함께 더 은혜를 받았지만 아내와 한마음이 되지는 못했음앞선 글: 코로나와 신앙, 예배 에서 썼듯이 코로나 이후 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그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거의 매일 다양한 예배를 드리며, 집에서 일하면서 애둘 보는 시간에도, 그리고 셋째가 태어난 정신없는 와중에도 최대한 신앙생활을 유지하며 영을 깨울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아내와 하나되는것은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이유로 (출산, 호르몬, 육아 등) 아내는 지쳤있었고 그런 아내가 보기에 늘 새로운것을 갈구하고 무언가에 마음이 가있는 남편 멀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내와 소통시도가 역효과만 낳자 인타이틀먼트의 유혹에 빠짐 – 나도 아내도 핀트가 안맞는건 분명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는걸 분명 알고 있었다. 아내도 나에게 한두번 이야기했고, 나도 아내에게 몇번 이야기하며 소통을 시도해봤지만 그때마다 애들이 방해하거나, 뭔가 잘 되지 않았다. 아내의 마음이 닫혀있다고 느껴졌고, 소통의 언어를 잘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번 제대로 마음먹고 아내에게 마음을 나누며 손잡고 기도도 하고, 내가 더 신경못써줘서 미안하다고, 더 노력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뿔싸 – 결과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내가 기도할때 – 아내와 소통하는게 참 쉽지만은 않지만 – 이런 이야기를 한게 아내의 마음을 더 닫게 만들었다. 아내는 이미 많이 약해져 있었기에, 내가 억지로 본인에게 맞추려 한다는데에 마음에 더 상처를 받았다. 문제는 그 아내의 반응이 내게 상처로 다가오며 내 마음이 굳어버렸다는 것이다. 갑자기 내 안에 무언가가 훅 들어와서 확 샘솟았다

그땐 몰랐다. 그건 바로 인타이틀먼트 – 이렇게 나도 안간힘을 써서 스스로도 영적으로 서려하고, 아내와 소통도 시도하는데, 나는 할만큼 했고, 나는 이제 좀 삐뚤어지고 마음을 닫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 였다는걸.

인타이틀먼트의 늪의 시작단계

삐뚤어지기 (tilted heart) – 나의 첫번째 반응은 삐뚤어지기였다. ‘그래? 내가 신앙적으로 열심을 내는게 오히려 싫다 그거지? 그럴수록 간격이 느껴진다 그거지? 그래, 열심을 안내주지. 뭐’ 이런 유치한 마음으로 갑자기 맘에도 없는 넷플릭스를 켰다. 지난 6개월여간 아무런 미디어도 재미가 없어서 영화안편 안봤는데, 그날은 장장 6시간 이상을 몰아서 넷플릭스만 봤다. 나의 삐뚤어진 마음이 이런 행위를 통해 충족되자 묘한 짜릿함도 있었고 승리감도 있었다. 그 이상 아무것도 없는 그때뿐인 즐거움이었지만 삐뚤어지기로 마음먹은 내 맘에는 달콤한 유혹이었기에 맘껏 봤다 (indulge, binge watching)

상대하지 않기, 회피 (disengagement) – 두번째 반응은 회피, 상대하지 않기였다. 흔히 부부관계 가운데 남성이 많이 하는 반응을 회피 (stonewalling) 이라 한다. 잔소리하는 아내한테 대꾸도 안하고 TV리모콘이나 만지는 남편의 모습이 바로 그 전형일 것이다. 이 일 이후 며칠간 우리의 대화는 그전보다 더 줄었다. 매우 가벼운 이야기 – 농담따먹기나, 사무적인 이야기 – 애들이 어떻다 저떻다 – 하는 표면적인 평화와 대화는 있었지만 난 내 아내와 소통하려는 시도를 그만하기로 작정했고 아내와 충돌할 만한 그 무엇도 입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일하는게 이런 고통스런 생각안할수 있어서 일로 도피하기도 했다. 아내도 뭔가 상황이 더 꼬인것을 느끼고, 이미 지칠대로 지쳐서 싸울힘도 없는 터라, 굳이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표면적인 평화 가운데, 점점 더 속으로 상대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속으로 정죄 (secret judging) – 세번째 반응은 은밀한 정죄였다. 아 이게 제일 인정하고 싶지 않고 괴로웠지만, 때때로 샤워하거나 그냥 멍하니 있는 가운데 이 마음이 훅 들어오면 떨쳐내기 쉽지 않았다. 내가 소통을 여러번 시도했지만 아내가 거부한 장면들을 자꾸 묵상하며 그거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나름 힘을 내고 있는지, 이런거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상상이 됐다. 마치 내가 사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법정에서 변론하는 것처럼. 사실 머리론 아내가 잘못한게 아니며, 아내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고 회복이 필요하며, 내가 이런생각을 한다는것 자체가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생각을 고쳐먹고 아내입장에서 생각하고 아내를 연민으로 (compassion) 사랑하려고 계속 시도했다. 하지만 한번씩 이런 생각이 들어오는것을 막을수는 없었다. 속으로 정죄하는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더 회피하고 더 마음을 멍하게 하려고 시간을 쓸데없는데 (인스타그램보고 멍하니 있기 등) 보내는 시간 (2번 – 회피)도 늘어났다.

인타이틀먼트의 늪의 심화단계

감사와 기쁨이 없어지고 작은 것에도 화가남 (being triggered by small thing) –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기쁨과 감사가 사라졌다. 기도도 안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애들은 여전히 늘 짜증을 냈고 늘 문제를 일으켰고 늘 멋대로 (?) 굴었다. 당연하지 겨우 0살, 2살, 4살밖에 안됐으니까. 전에는 별거 아니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도 나를 트리거 했다. 전에는 감사하던 상황도 하나도 감사가 안나오고, 안좋은것만 보였다. 내 안에 여유가 없으니 사소한것에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갑자기 한번씩 애들한테 홧풀이를 하기라도 하면 아내와 그걸두고 싸우진 않았지만 (우리는 굳이 충돌을 회피하고 있었기에) 스스로에게도, 서로의 관계에도 안좋은 말뚝이 하나씩 박힘을 느꼈다.

모든 에너지가 없어지고 우울해짐 (lack of energy, wounded spirit, depression) – 잠이 많아졌다. 일어나기가 싫었고 그냥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서 틈만나면 자고 싶었다. 자도자도 피곤했고 아무런 의욕과 에너지가 없어졌다. 손가락하나 까딱하기 싫어지기에 이르렀다. 아내와는 소통을 당연히 할 수 없고, 이런 나의 상태를 이해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했다. 한번씩 애들때문에 화가 나고 화를 내고 나면 그런 스스로까지 미워지며 더 우울해 졌다. 아 이 우울증 – 전에 경험해본적 있는 그 끔찍한 그 느낌. 진짜 싫었지만 자꾸 빠져들었다. 아래는 내가 전에 자기연민의 바다에서 헤맬때 (관련글 참고) 그 느낌을 기록한 것이다. 이번에는 자기연민 우울증과는 달랐지만, 참 비슷했다. 결국 내 안이 나로 가득찬건 똑같기에. 내안에서 ‘나’를 묵상하는건 마치 목마른데 바닷물을 먹는것과 같다. 마실수록 목이 더 마르다. 그런데 마실게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계속 마시다 보면 사람이 미쳐버리고 견딜수 없게 된다.

자기연민 – self pity. 광활한 바다와 같았다. 무서우리 만치 넓고, 무서우리 만치 적막한, 그 어두운, 그 외로운, 그 적막한 심해 속에는 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속에서 나의 작고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만을 묵상하며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누구도 내 마음은 모를거야. 난 세상에 혼자 있는것 같아. 누구도 진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아니 나도 잘 모르겠어. 너무 비참하고 너무 괴롭고 너무 불쌍하고 너무 깊어서, 나도 감당이 안되는데 도대체 누가 날 이해하겠어. 누구도 상대하고 싶지 않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나도 감당이 안되는데. 이 넓은 곳에 나밖에 없어. 나를 꺼내줄 사람은 없어. 나에겐 절망과 비참함 뿐이야. 연민만이, 내게 남은 몇안되는 감정이야….자기연민의 심연은 또 늪과 같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드라마틱 해졌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주관적이 되었다. 점점더 빠져들고 나중엔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워졌다. 난 절대 나를 여기서 스스로 구할수 없었다…

유혹에 약해짐 (give into temptation) – 넷플릭스를 보다보니 갖은 자극적인 미디어가 넘쳐났다. 그리고 그 유혹도 그 어느때보다도 강했다. 어차피 아내와 로맨스, intimacy도 없잖아. 넌 어느정도는 즐기고 기분좋을 자격이 있잖아. 넌 지금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있잖아 이런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것 같았다. 안간힘을 쓰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 노력했고 참아냈지만, 정말 많이 약해져있음을 느꼈다.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면 아 이렇게 된거 될대로 되라지 하고 얼마든지 더 계속 유혹에 나를 던지고 (운동마찰력은 정지마찰력보다 낮다) 악순환이 반복될수 있었으리라.

두번째 단절 – 회피하기 (Cold Anger, Disengagement)

첫번째 단절을 어렵게 넘기고, 한 열흘쯤 지났을때, 다시한번의 단절/불협화음이 찾아왔다. (위에 첫번째 단절을 워낙에 구구절절하게 설명했으니 두번째 단절은 짧게 구술하고 넘어가려 한다.) 문제의 발단은 우리둘이 코로나 상황의 위험성에 대한 생각이 달랐는데 (아내는 나보다 훨씬 더 위험성을 걱정했고 나는 상대적으로 조심해서 나쁠것은 없지만 덜 걱정하는 입장이었고), 내가 사람을 만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고 아내가 느끼면서 시작됐다. 우리둘의 사랑 잔고가 많이 차있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이 문제를 두고 한두가지의 오해가 생겨나고 그걸로 또 상처받고 서로 마음에 간극이 생겼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아내는 상대적으로 그걸 그때그때 풀고 말로 하는 스타일 (Warm Anger)이고, 난 그걸 말로하진 않지만 속으로 삭히며 담아두는 스타일 (Cold Anger)이다. 그래서 아내가 이걸 문제제기 하고 나서 이번에 나의 대응은 회피하기/거리두기 였다. 이 문제를 생각하면 스트레스받고, 아내와 하나되려하면 또 스트레스받는 대화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그런 회피와 거리두기는 집안 분위기를 더 무겁게 했고 우리 관계를 더 단절시켰다.

하나가 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모난돌이 둥근돌이 되어가듯이 우리는 부딪히고 깍이며 성숙해가지 않을까

하나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서로 다른 돌이 만나서 깎이고 깎여서 둥글어져 가며 하나되는 것처럼, 서로다른 모난 조각들이 서로 깎여가며 딱 들어맞는 퍼즐이 되는 것처럼, 깎이는 과정 없이 하나됨은 없다. 특히 부부관계는 피해갈곳 없는 거울과 같다. 우리는 이 세상 그 누구와도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됨을 체험하거나, 그 누구와도 경험하지 못했던 반목과 대립, 단절을 경험할수도 있다.

금번 우리의 상황을 돌아볼때, 코로나-19라는 시기/환경의 특수성, 아이 출산의 특수성 이런것들이 더해져 우리관계에 다양한 스트레스를 가져오면서, 하나됨의 과제(challenge)가 도마에 올라왔다. 육아, 코로나 등 서로간에 마음다칠 구석이 너무많은 상황이었고, 바쁘고 힘들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지쳐있을때가 많았다. 그래서 하나되는 과정이 더 쉽지 않고 힘겨웠던것 같다. 서로간에 마음이 닫히고 오해와 상처가 생겼을때, 하나되는 것은 고통스럽다. 마음이 다쳤을때 하나되는것 보다는 그냥 떨어져 있는게 당장은 훨씬 더 편하다. 위에 언급한 나의 반응들 (회피 등) 도 이런 본능적인 기제의 발로였을 것이다.

아내 입장에서 하나되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았을지 상상해본다. 입장바꿔 생각해보자면, 민망함과 미안함이 몰려온다. 어머니가 되어가면서 임신, 출산, 육아를 겪는 아내의 어려움을 내가 어찌 다 헤아리리.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겪는 것 – 온몸이 늘어나고 찢어지고 그리고 나면 추스를 틈도 없이 또 계속 아이한테 내 몸을 내줘야하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나 어려운 이 고통을 절대 다 헤아릴수 없음을 고백한다. 아내야말로 인타이틀먼트를 느낄 이유나 본인의 방식대로 스트레스, 화를 분출할 이유가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것을 분출했을때, 아니면 분출하기도 전에, 남편이 그걸 받아주기는 커녕 본인의 방법으로 받아치거나 관계를 단절시킨다면 (인타이틀먼트, 회피하고 거리두기 등으로) 아내로서 손을 내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남편으로서 용기를 내어 고백하건데, 남자로서 하나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다. 부끄러운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추어본다면 남자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은 의외(?)로 단순할지 모른다. 오히려 그 어려움의 이유가 아내가 겪는 것에 비해 너무 단순하고 너무 작게 느껴지기에 어디가서 이야기도 못하고 (아내에게도 주위에도) 외롭게 더 혼자 코너에 몰리기도 하지 않을까. 다른 남편들은 어떻게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을까.잘하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나처럼 힘겨워하며 실수하고 넘어지고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 분들도 많지 않을까. 아래 내게 어려웠던 부분을 몇가지 나눠본다.

  • 아내와 멀어지고 아내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것 – 한 예로 임신/출산의 과정에서 대부분 부부관계가 (아니 어떨때는 부부관계는 커녕 어떤 터치와 우리만의 시간이) 적어도 몇달은 없다. 이게 참 고통스러웠다. 사랑의 잔고가 바닥나는것 같고 내 집이 내집같지 않고 외롭게 느껴지는. 같 태어나 울기만 하는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내는 아내가 존경스럽지만 부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한 복잡한 심정.
  • 일차원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것 – 아이들이 우는것 (난 소리에 매우 민감하고 스트레스를 잘받는다), 잠 잘 못자는것, 밥잘 못먹는것 같은것
  • 아내의 잔소리나 문제제기 – “왜 남편에게는 잔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가” 이런 책 제목을 어디서 본기억이 있다. 더 많은것을 헤어리는 아내의 눈에는, 특히 육아와 같은 순간에는, 아내 입장에선 남편한테 섭섭하거나 남편의 행동중에 눈에 걸리는게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미 1번, 2번이 진행된 상황에서 아내가 잔소리를 하기 시작한다면 코너에 몰린 남성들은 화를 내거나 매우 격하게 반응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나의 경우 아내가 워낙에 사려깊게 배려해줘서 이 문제가 크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이 완전 메말라있을때는 아내의 작은 커멘트도 견디기 힘든 소리들로 들렸던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 삶이 고통최소화가 아닌 사랑최대화라면? 하나됨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사랑의 참열매를 맺는다면?

그래. 이렇게 하나되기가 어려운데, 하나되기까지 서로 상처주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는데 왜 굳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코로나-19가 확실하게 알려준 것이 있다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것은 관계 (Relationship)다. 모든 것은 관계 가운데 의미가 피어난다. 내가 하는 일도 다른사람들에게 유익이 될때 그것이 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고, 내가 그림을 그리든, 이 글을 쓰든, 소셜미디어에 무엇을 포스팅하든, 그건 다 관계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돈을 벌고 건강을 다지는 것도 어떨때는 그게 개인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순수히 개인적인 추구는 거의 없고 얼마 가지 못한다. 관계가 없다면 ‘의미’도, ‘기쁨’도, ‘사랑’도 없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이 관계의 렌즈로 위 질문에 대답해보려 한다.

관계를 대하는 우리의 옵션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수 있다.

  1. 옵션1: 다른사람을 이용하기 (사기 등)
  2. 옵션2: 무관심. 필요할때 필요한 사람만 상대하기
  3. 옵션3: 적극적으로 하나되기. 관계를 회복하기

만약 우리의 삶이, 우리삶의 목적이 고통 최소화라면, 옵션1이나 옵션2를 선택하는게 현명하리라. 만약 우리삶의 목적이 나의 당장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극대화하는거라면 역시 법의 테두리 안에서 (?) 옵션1과 옵션2를 적절히 병행하는게 현명한 삶이리라.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옵션1을 택하진 않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옵션2를 선택한다. 심지어는 가족이나 부부관계에서도 우리는 어떤 부분에선 마음을 닫아버린다. 상처입지 않으려고. 고통받지 않으려고)

하지만 만약 우리 삶이, 고통최소화나 욕구충족 극대화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사랑받고 사랑했느냐라면. 나중에 삶을 되돌아 볼때, 정말 삶에서 중요했던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이 성취했는지도, 내 욕구가 얼마나 충족되었는지도, 얼마나 고통없고 불편없는 삶을 살았는지도 아니고, 누구와 관계를 맺고 얼마나 사랑하고 사랑받았느냐면?

나는 더 충만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길은 고통 최소화나 일차원적 욕구 최대화가 아니라 사랑 최대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것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고통이 최소화되는 길이기도 하다. 고통 최소화나 일차원적 욕구 최대화를 위해 관계를 단절시키고 혼자될수록, 우리는 우울증, 자기혐오와 같은 고통에 더 노출될 위험이 크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를 돌아보라는 속삭임에 빠져 ‘나’라는 창살없는 감옥에 갖히면, 마치 목마른데 바닷물 들이마시는것처럼 마실수록 더 목마른 ‘자기사랑’의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반면 우리가 고통을 견디고 하나됨의 열매를 맺어 사랑안에 거할때, 기존에는 고통스럽던 환경이나 상황도 너끈히 견딜수 있는 멧집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줄게 된다. 이렇게 생각할때, 우리는 가능한 모든 관계에서 옵션3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고통스럽고 힘들겠지만 하나되기를 힘쓰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Andy가 이야기하는 이글에서 이야기하는 2×2

Praxis의 리더중 하나 Andy가 이번 코로나를 맞아 쓴 이글을 보면, 위와 같은 익숙한 2×2 그림이 나온다. 여기서 세로축 – 권위(authority)는 어떤 상황에 의미있는 행동을 취할 힘을 의미한다. 예를들어 갑자기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때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킬 경제적 상황적 힘이 있다면 세로축 위쪽에, 없다면 아래쪽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가로축의 개념 – 위험노출도(vulnerability)는 좀더 생소한 개념이다. 만약 내가 위험을 너무 싫어해서 모든 돈을 현금이나, 또는 금으로 전환해서 집에 가지고 있다면 그건 ‘재무적 위험노출도’가 극도로 낮은 상황일 것이다. 반대로 모든 돈을 가장 위험도 높은 비트코인(?) 등의 자산에 투자했다면 그건 오른쪽 끝에 위치한다고 보면 된다. Andy는 우리가 있을 곳은 우상향이라고 이야기한다. 고통최소화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위 좌표에서 오른쪽에 위치하는 삶을 불행하고 안타까운 삶으로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뭔지 아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한다. 관계 회복을 위해, 더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위험노출도를 높인다. 그러다보면 4사분면 – 고통 (suffering)에 잘못 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 없이는 1사분면 – 번영 (flourishing)에 갈 기회도 없어진다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상처입어서 닫힌 마음과 그로인해 단절된 삶. 그리고 회복의 과정을 너무나 잘 묘사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yRUAzGQ3nSY

애니매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도 이 회복의 과정을 잘 묘사한다. 새로운 곳에 와서 많은 상처를 바라면서 장난기많고 에너지많고 밝았던 라일리의 마음속 여러 중요한 나라 (가족, 하키, 친구 등)의 불이 꺼져버린다. 고통이 너무 강열해서 기억 자체가 아예 없어진다. 불이 꺼져버린다. 마음이 방어기제를 친 것이다. (위의 관계를 대하는 세가지 옵션중 옵션2) 당장은 그래서 고통을 덜 받는것 같지만 이런 마음속의 ‘나라’들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라일리는 우울증, 불만, 의욕없음 등에 시달리다가 상황을 비관하고 집을 떠나야 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이른다. 나중에 힐링이 일어났을때, 그건 무조건적인 기쁨만은 아니었다. 그건 꺼버렸던 기억을 꺼내서 다시 들여다보고 슬픔을 슬픔으로 인지하고 감싸앉는 과정이었고 그 감정들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아픔을 통해 성숙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마음속의 ‘나라’들에 불이 다시 들어온다. 기억이 다시 살아난다. 그렇게 상처가 아물고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고 내면의 평화가 찾아오며 우리삶은 다시 살아난다.

사랑있는 고생이 기쁨이었네

너무나 좋아하는 100세 살아있는 현자, 김형석 교수님의 “백년을 살아보니“의 두번째 챕터는 “사랑있는 고생이 기쁨이었네” 이다. 여기서 저자는 사랑없는 삶은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고독이라고 하며 이런 이야기들을 한다.

이기주의자들은 사랑을 못한다. 사랑할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다. 흔히 우리는 관계의 갈등을 성격차이로 돌리지만 성격은 같을수 없다. 달라야 하는것이 자연스럽고 다름을 통해 성장과 발전, 새로운 창출이 있다. 달라서 더 귀하고 행복한 것이다. 성격차이보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안고 있던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해서 관계가 틀어지고 가정과 사회에서 외면당하거나 자신도 남들과 벽을 쌓고 살게된다.

결혼은 사랑의 출발이다. 사랑의 나무는 조심스럽게 키워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결혼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결혼은 사랑의 출발이다. 사랑의 성장은 정성스러운 반성과 노력에서 이루어진다. 사랑의 나무가 자라는데 세가지 과정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애욕의 과정 (성적본능과 애로스), 둘째는 애정의 과정 (서로에 대한 사랑의 정이 쌓이는 과정), 셋째는 인간애의 과정 (타인의 짐을 떠앉고 타인과 사회를 사랑하는 과정)이다. 특히 인간애를 경험하고 나면 – 그것이 이웃의 환자를 위한 사랑이든,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의 봉사를 하며 감사한 것이든 – 인간애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녀를 키워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사랑의 짐을 져본일이 없기 때문에 사랑의 고귀함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사랑이 있는 눈물의 값이 귀한 것이다. 나는 자신과 부부의 즐거움을 위해 자녀를 낳아 키우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가정이 무엇인가를 완전히 체험하지 못하는 인생을 산다고 생각한다. 실연을 해도 사랑을 해보는 것이 귀하다. 인간적 성장이 더 귀하기 때문이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희생만큼 고귀한 사랑이 없다.

사랑의 나무에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자녀들이 바로 그 열매이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베푸는 사랑과 봉사가 그 열매이다. 나는 이런 인간애를 모르는 인생은 고귀한 삶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늙어서도 애욕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한 애정을 느끼지 못한 부부는 사랑을 모르는 빈 그릇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느껴기도 한다.

쇼펜하우어는 결혼을 거부했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했다.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자녀들이 없이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이라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계승한 니체는 정신병을 오랫동안 앓았고 가장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그를 사랑했던 여동생의 기록에 따르면 오빠가 정신병자로 지내면서 서산에 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한다. 고독한 천재가 지는 태양을 보고 있었던것이다. 두 철학자는 모든 사람이 누리는 평범하고도 따뜻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게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남녀는 인생의 끝이 찾아오기 전에 후회없는 삶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 있는 고생이다. 사랑이 없는 고생은 고통의 짐이지만, 사랑이 있는 고생은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 인생이다.

너무나 공감하고 읽었다. 소망과 힘을 주는 이야기들이다. 아 내가 겪는 나름의 고생이, 다음단계의 사랑으로 가는 과정이구나. 이제 우리부부는 애정을 더 쌓아가고 있고 우리 가정의 사랑도 우리 부부에서 우리 아이들까지 확장되고 있구나. 열매 맺고 있구나. 그리고 인류애의 단계까지 언젠가 더 갈수 있겠구나. 고생을 통해 고난을 통해 성숙해가고 있구나.

쉽게 얻어진 것은 쉽게 나가기 마련이다. 로또로 벼락부자가 되거나, 아무 노력없이 큰 돈을 가진 사람은 그 가치를 충분히 모르거나, 그걸 제대로 관리하고 사용할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독한 식단조절과 운동으로 몸을 만들어본적 있는 사람은 그게 고생의 과정을 통해 얻어졌기에 더 값진 것을 안다.

관계는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고통없이 하나되고 지속되는 관계는 보지 못했다. 서로다른 남녀가 만나 하나되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 여성의 경우는 자기몸이 늘어나고 찢기고 하는 과정을 통해, 남성의 경우는 수많은 본능적 욕구들이 충족되지 못하는 과정을 통해, 그리고 거의 평생에 걸친 보살핌과 짝사랑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보내고 가족이런 울타리를 확장해간다. 고통스러웠기에 더 다듬어지고, 더 깍이고, 더 하나되고, 더 사랑할수 있다는게,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모두가 세상에 나왔다는게, 참 아이러니하고도 신비롭다.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을 견딘 사랑의 열매로 이 세상에 나왔고, 우리가 고통을 견디고 또 열매를 맺을때 새로운 생명이, 새로운 관계 안에서 사랑과 회복이 일어난다.

많은 식구를 품는 삶과 혼자되는 삶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왜 아버지들이, 어머니들보다 자녀와 가정을 버리거나 하나되지 못하고 겉돌거나 떠는 경우가 많을까? 사실 남자라면 누구나 왼쪽 사진처럼 대가족의 할아버지가 되며 나이들어 가는 삶을 꿈꿀것이다. 누구도 오른쪽 사진처럼 혼자 외롭게 살다 죽고 싶지는 않을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버리고 떠난 남자, 아버지 없는 가정, 아니 가정에 있다고 해도 사실상 가정을 외면한 남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주위에서 너무나 심심치 않게 접한다. 왜 남자들은 이렇게 한편으론 아버지/할아버지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가 되는걸 아버지로 사는걸 힘겨워할까. 왜 여성에 비해 남성은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하나됨의 고통을 더 힘겨워할까.

그것은 덜 아팠기에, 하나됨의 고통에 준비되지 않아서, 그 임계점을 못넘어서가 아닐까? 여성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고통을 통해서 이미 엄마로서 다시 태어나며 아이를 사랑할수 있을만큼 성숙한 반면 (이 노래 –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 – 폭풍감동의 노래이다), 남성은 그런 직접적 고통과 인내의 과정이 없었기에, 아빠로서 성숙하기가 더 시간이 걸리고 더딘게 아닐까. 이렇게 볼때, 임신과 출산의 직접적인 고통이 없다는게 남자에게는, 아버지에게는, 득이 아니라 독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해본다. 남자들이여, 우리는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통계적으로 우리는 가정과, 타인과 하나되지 못하고 외로운 수컷이 될 확률이 더 크다.

우리관계는 더 단단해질 수 있다

초사이어인은 거의 죽었다 살아나면 전투력이 뛴다. 오른쪽은 벽돌공사에서 틈을 메꾸는 과정

위기는 곧 기회다. 관계가 삐걱거린 부분을 방치하면 상처가 곪아서 터질수 있지만, 상처를 잘 수술하면 우리는 더 건강해질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함께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함께하는것이 많아지고, 관계의 건강도 구석구석이 현미경위에 오른 이때가 오히려 관계를 더 다지고, 더 하나되고, 더 단단해질 때일수 있지 않을까. 마치 거의 죽고 살아나면 전투력이 오르는 사이어인처럼, 금간 부분을 메꾸고 보수하는 벽돌공사처럼, 문제가 드러났을때 그 문제를 헤쳐가는 고통을 극복하고 정면돌파함으로써, 우리는 관계의 – 가정, 사회, 어느공동체든 – 성을 아주 단단히, 견고히 (resilience) 쌓을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한번씩 관계의 갈등이 터질때마다 우리부부가 더 견고해짐을 느꼈다. 이번에 우리가 경험한 첫번째 단절을 통해 “인타이틀먼트”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 가운데 있을때 아무런 기쁨과 평안이 없는것을 확실히 알았고, 내가 인타이틀먼트의 유혹에 빠질라 치면, 거의 스스로 뺨을 때려서라도 그 유혹을 거부하고 억지로라도 관계에 다시 나와야 한다는걸 배웠다. 두번째 단절을 통해 난 내가 하고 있는 패턴 – 나의 차가운 화 – 가 관계를 얼마나 해치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매우 어색하고 나의 본성에 거스른다고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내가 사소하게 느끼는 마음에 걸린것 하나하나를 미주알고주알 꺼내서 상대를 비방하거나 감정에 격해지지 않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소통하는 근육도 길렀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더 단단해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 (Lovability)가 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 먼저 내 응어리를 풀어주고 사랑해주고 격려해주며 용기주는 그 사랑이 필요하다

내 안에 나만 있을때, 관계 회복과 하나됨은 요원하다. 많은 경우,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 는 가시나무 가사처럼, ‘나’ 안에 갖혀 있을때, 이 안에 평화와 감사와 기쁨과 사랑은 없다. 묘한 자기만족과 자기사랑, 현실부정, 일시적이고 지속되지 못하는 값싼 안락(comfort)이 있을 뿐이다.

하나되기 까지는 많은 지혜와 성숙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고, 우리는 서로 소통하는 방법과 언어를 계속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과 이야기들은 일단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다 – 또 할 기회가 있으리라. 이 글에선 가장 첫번째 순서 – 하나되는 자리로 나오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하는 것이 고통스럽기에, 상처입은 마음을 딛고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절대 쉽지 만은 않다. 그 첫걸음을 내딛기에는 많은 용기와 격려, 그리고 사랑이 필요하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나’의 독방에서 꺼내서, 하나되는 자리로 초대할 수 있을까?

첫째, 무조건적인 공감과 동정 – 이건 그때 한순간은 좋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친구들한테 연락해서 맘껏 아내 뒷담(?)을 하며 순간 기분좋을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인타이틀먼트 (entitlement)나 나의 심리상태를 부추기고, 관계를 더 악화시킨다.

둘째, 충고나 처방 – 이건 경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진짜 별로다. 누가 나한테 이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정상적인 상태라면 받아들일수도 있지만 받아들이기 참 어렵다. 왜냐고? 나라고 모르는게 아니고 나라도 시도안한게 아니니까. 내가 마음을 닫기까지 나도 할만큼 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해주는 충고를 들을 마음은 전혀 없다. 역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셋째,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인타이틀먼트(Entitlement)를 부추기지 않는,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주며 더 잘할수 있다고 격려해주는 사랑 – 이게 최고다. 이게 필요하다. 누군가 대신 나의 마음을 알아주면서 이걸 풀어준다면, 나는 그 사람과 다 풀고가서 실제 관계를 회복할수 있으리라. 만약에 나와 비슷한, 아니 나보다 훨씬 더한 고통을 다 겪고, 그걸 이겨낸 나를 잘 아는 사람이 – 그게 아버지든, 형이든, 친한 친구든 누구든 –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먼저 내 입장에서 공감해주고, 나를 잘 다독여준 다음 – ‘산아, 하지만 너도 알지? 지금 니가 하는 생각이나 마음이 너에게도 가족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거? 민경이가 많이 힘들수 밖에 없는 상황인거 너도 알지? 내가 아는 백산답게 아내를 잘 보듬어 줄 수 있지?’ – 이렇게 나를 믿어주고 격려해준다면? 그래. 이런 격려와 사랑이 있을때 우리는 관계 회복을 위한 에너지와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법정을 나가야 한다. 자유의 몸으로, 온전히 다 풀고 – 그래서 최고의 변호사와 판사가 필요하다

법정 – 판사, 검사, 변호사, 피고인, 원고인

관계에서 상처가 생기고 단절이 일어났을때, 우리는 법정에 있다. 상황이 자기에게 불공정하다고 인식했을때 우리는 법정을 찾는다. 우리는 피고석에 선 자신이 억울하다며 사실 자신은 피고가 아닌 원고가 되야 한다고, 상대가 피고가 되야 한다고 법정을 찾는다. 그리고 상대한테 상처받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열심히 스스로를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기도 하고, 열심히 상대방의 죄와 잘못을 고발 (accuse)하는 검사가 되기도 하고, 그리고 판사가 되어서 이 모든 상황을 판단하기도 한다. 이 안에 평화는 없다. 법정 안에선 모든 사람이 날이 곤두서 있다.

관계가 깨지고 나중에 텅빈 법정에 혼자 남게 됐을때에도, 이 법정은 계속된다. 피고가 된 상대방은 이미 관계가 깨져 자신을 떠났는데, 계속 상대를 피고에 앉히고 상대를 고발하며 원고 승소 판정을 내리기도 한다. 자기사랑과 자기연민이 그것이다. 또 심지어는 자신을 피고인자리에 앉혀놓고 스스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발하는 검사가 되기도 하고, 판사가 되서 자신은 실패자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우울증과 자기혐오 같은 감정이 이런 것이다. 아무도 없는데 계속 법정 망상을 펼친다. 그건 앞서 말했듯 바닷물 들이키기 같은거다. 그 고독안에서 승자는 없고 결국 타는듯한 목마름만 남는다.

하나가 되기 위해선 법정을 나가야 한다. 평화와 안식, 그리고 회복과 사랑으로 가려면 우리는 법정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내 마음에 있는 응어리는 누가 풀어줄 것인가? 내가 경험한 부조리는? 이 깨진 약속과 신뢰를 놔두고 어떻게 다시 시작하라는 것인가? 그건 불가능한 요구처럼, 그리고 매우 공격적이고 불쾌한 (offensive) 주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판결을 보고 나서야 법정을 나설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최고의 변호사와 판사를 만나야한다. 우리의 억울한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우리의 응어리를 다 풀어주는. 그리고 최고의 판사를 만나야 한다. 우리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논리와 시각으로 상황을 반전시키고 나도 상대방도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 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리고 우리가 잘못한 그 수많은 것들을 한방에 다 용서해주는. 그런 존재를 만날때 우리는 기꺼이 변호사, 검사와 판사의 자리에서 내려온다. 우리는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변호해주는 변호사를 만나고 마음을 연다. 그리고 우리의 이기적인 고발이나 주장에도, 우리가 잘못했던 수많은 부분에도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해주고 받아주는 사랑과 은혜 그 자체이신 판사를 알게된다. 그리고 나의 모든 부족함을 용서받은 감격에 벅찬 마음으로, 나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받아준 그 사랑과 격려에 힘입어, 상대방의 잘못도 용서할 용기를 얻는다. (성경에 나온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의 비유가 바로 이것) 그건 정의를 회복하지 않고, 그냥 무조건 상대방이 어떤 행위를 하건, 어떤 상처가 생기건 다 받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적극적으로 정의를 계속 회복해서 서로 어떤 앙금도 남지 않게 한다는걸 의미한다. 최고의 변호사와 판사를 믿고, 다툼이 있으면 작은거라도 법정에 가서 해결하고 옴을 의미한다. 인사이드 아웃의 예를 빌자면, 마음속에 꺼진 구슬 하나도 없이, 모든 core memory가 빤짝빤짝 빛나는 빛을 다시 회복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회복의 길이다. 법정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자유로운 몸과 마음으로, 회복되어, 초사이어인처럼 더 강해져서, 사랑받고 사랑하는 자리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최고의 변호사와 판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돌이키고 (성경적 표현 – 회개하라), 고아처럼 혼자 모든걸 해결하려 하지 말고, 꼭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고 우리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우리의 마음을 만져줄 수 있는 존재를 만나야 한다.

나는 우리는 어떻게 회복했는가 – 최고의 변호사를 만나 먼저 이해받고 사랑받기, 그리고 용기를 내서 싸우기

맨 아래 부록에 쓰겠지만, 우리 부부의 관계회복에는 위에서 얘기한 세가지 방법 중,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사랑과 격려가 절대적이었다. 최고의 변호사를 만나서, 나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넣고 먼저 ‘누군가 나를 전적으로 받아줌’을 경험했기에. 그리고 혹시 내가 잘못한게 있어도 그 모든 잘못과 빚을 나 대신 갚아줄 대속자 (redeemer)를 만났기에, 이것이 나에게도, 내 아내에게도 있었기에, 우리 관계는 또 회복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우리 둘다 나와 상대를 모두 사랑하여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결론을 내줄 판사를 알고 신뢰하기에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결론짓고자 법정에 함께 나갈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워낙에 신앙적인 용어들이 많아서 첨부로 남긴다.

관계 회복과 소통의 자리로 나왔다고 문제가 한방에 해결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벽을 쌓고 있을때보다 소통을 시도할때 그 순간은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상처를 감추고 괜찮은든 살때보다, 상처를 꺼내놓고 후벼파는 수술대에 올려놓으니 더 아픈 것처럼. 이때 “전투” 적인 마음자세를 가진 것이 많이 도움이 됐다. 앞서 소개한 이 영상에서 한달간 매일 부부싸움 했다는 남자가 관계 회복을 위해 ‘싸웠다’ 고 이야기했는데 그 말이 그렇게 와닿을수가 없었다. 그래, 이건 그냥 앉아서 맘가는대로 내버려두고 있으면 지는 싸움이다. 싸워야 한다. 자꾸 그냥 편한 관성대로 가려는 마음을, 자꾸 아내와 담을 쌓고 멀어지려는 마음을, 자꾸 나 좋은대로 인타이틀 되려는 마음을 싸워야 한다. 그런 용기를 많이 받았고 더 용기를 냈다.

그래서 진짜 싸웠다. 크리스천으로서 기도할때도 소리내서 스스로 듣게 스스로한테 큰소리로 되내이기도 했고, 아내와 억지로 앉아서 매우 자연스럽지 않고 매우 하기 싫었지만 내가 왜 마음이 속상한지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하며 아내 이야기도 듣고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노력해보기도 했다. (이건 그냥 문제를 회피하기 좋아하는 나로선 정말 자연스럽지 않고 힘든 행위였다. 이런걸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자신이 너무 쪼잔하고 작아보이는…) 싸운다는 마음가짐이 없었으면 포기하고 그냥 쉬고 싶을때도 많았다. 이 마음가짐이 많이 도움이 됐다.

우리가 다른편이 아니라 한편이라는 인식도 도움이 많이 됐다. 한편이라는걸 계속 되뇌였다. ‘나’를 생각하면 내가 상처입었던 부분이 자꾸 생각나서 마음이 아리고 관계 회복이 싫어졌다. 하지만 ‘상대’를 생각할때 상대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자꾸 들었고 (compassionate), 상대도 상처받았으며 우리는 한팀이라는것이 많이 위안이 됐다. 이 영상에 보면 부부가 사이좋게 사는 비결로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꼽고 있다. 이번에 확실히 더 이해됐다. 내 아내는 오죽할까. 그런 마음이 도움이 많이됐다.

우리는 아군인가 적군인가. 내편한테 총질하고 있지는 않는가

마지막으로 우리의 관계는 결국 회복될것이라는 믿음, 소망이 있었다. 상처입은 ‘나’를 바라보면 부러진 약속과 깨져버린 신뢰가 보인다. “난 억울하다. 난 이렇게는 하지 않았다. 이건 내게 불공평한 상황이며, 난 할만큼 했다. 상대가 신뢰를 져버렸다. 우리의 약속이 어그러졌다. ” 이런식으로. 하지만 내가 결혼서약에서 한 것처럼, 이 약속이 나나 상대가 부술 수 없는 약속이라고 생각한다면? 한발자국 더 나가, 우리의 창조주가 계시고 그 창조주가 우리를 묶으셨으며, 우리 관계를 책임지고 더 하나되게 하실거라고 믿는다면? 지치고 낙담이 될 때 마다, 이 믿음이 있어서 소망을 품고 힘을 낼수 있었다. ‘나’를 볼때 깨진 관계가 보이지만 ‘그분’을 보고 ‘약속’을 기억할때 깨질수 없는 약속, 그리고 믿음과 소망이 살아났다.

마치며 – 정의의 회복을 넘어, 관계의 회복으로

세상에 부조리가 넘친다. 인간관계도 힘겨울때가 한둘이 아니다. 그렇게 닫히고 상처입은 마음은 속삭인다. 굳이 하나되지마. 넌 할만큼 했잖아. 억울한 상황이야. 힘들고 지쳤잖아. 그냥 본인을 돌봐. 그리고 그 속삭임은 놀랄만큼 은밀하고 놀랄만큼 달콤하며 놀랄만큼 부드럽다(?). 의식도 못한채 빠져들만큼. 그리고 어느새 늪처럼 ‘나’ 만이 가득한 바다로, 늪으로 나를 옥죄맨다. 거기에서 잘못 발을 디디면 난 우린 점점더 빠져들고 더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물론 정의의 회복은 필요하다. 우리는 부조리를 그냥 받아들일순 없다. 우리가슴은 정의를 원한다. 정의의 회복을 위해 잠시 분리되어 권리의식을 주장하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정의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때로는 법과 제도가 바뀌어야 하고, 때로는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이런 분리됨과 권리의식이 있기에, 피해받는 측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여기서 나온 문제의식이 때로는 사회가 더 건전하게 바뀔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사회에도, 개인관계 (부부관계를 비롯) 공정과 정의의 회복은 필요하다.

하지만 분리 | 단절은 결코 우리의 최종 지향점이 될수 없다. 정의의 회복은 결국 우리의 최종 지향점 – 관계 회복으로 가기 위한 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왜 그런가? 그것은 1) 관계의 회복이라는 지향점 없이 공정, 정의를 주장할때, 우리는 by default, 분리로 가게되기 때문, 그리고 2) 그렇게 되었을때 우리는 더욱더 ‘나’ 안에 갖혀서 고독과 외로움이란 고통안에 거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가 서로의 권리를 주장할때 우리는 화합과 상생보다는 상호 비방과 분리로 갈 확률이 훨씬 높다. 우리의 시각은 ‘나 중심적’ 이고, 중립적인 상황에도 우리는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고 서로 상처입고 멀어지기 때문이다. 아래는 얼마전 너무나 감명깊게 읽은 세습중산층 사회에서 가져온 표이다. 여기서 3점 이상이면 나의 상황이 상당히 공정하지 않다는 인식을 한다는 의미인데 (1점(매우 공정하다) – 5점 (전혀 공정하지 않다)), 20대 남성, 여성, 30대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소득 수준을 막론하고 3점 이하로 가는 경우는 없는것만 봐도 우리의 생각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이 얼마나 주관적인지 알 수 있다. 지금 사회에서 발생하는 남혐, 여혐 처럼 극단의 대립이 생길우려마저 있다.

‘세습중산층사회’ 발췌. 현재 상황이 공정한가 (3점=대체로공정, 5점=매우불공정)란 질문에 모든 연령대와 성별에서 다 본인 상황이 불공정한 상황이라고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계의 회복 없는 정의의 회복은 최종지향점이 될수 없다는건 ‘가정’과 같은 개인적인 영역을 보면 더욱 명확하다. 관계의 회복없는 정의의 회복이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수 있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했듯이 부부관계는 ‘관계’의 중요성을 집중조명하는 플랫폼과 같다. 우리는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됨의 풍성함을 경험할수도, 분리됨과 단절의 소외를 경험할수도 있다. 가장 최소한의 룰 (법과 제도) 만 만들고 상대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도 큰 불편함 없이 살수 있는 사회에 비해 (물론, 이 경우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회적 신뢰와 관계회복 없이 분리와 단절로 간다면 결론은 똑같다고 본다) 가정에서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서로 맞춰가야 하나될수 있다. 모든 것을 법대로 할수 없다는걸 경험한다. 공정의 잣대를 모든 곳에 들이대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가 보는 ‘옳음 (what is right)’ 의 시각이 결코 똑같을수 없음을 경험한다. 양보하고 희생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더불어 살수 없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도 그렇게 되었을때, 덜 행복할줄 알았는데 (양보하고 희생했기에) 더 행복하고 풍성해짐을 체험하기도 하다. 반면 모든 곳에서 ‘정의’의 회복만을 주장할 경우, 각자의 입장에서 봤을땐 그것이 옳았을지라도 결국 외롭게 떨어져서 둘다 소외와 피폐함에 거하는 딜레마를 경험하기도 한다. 부부관계에 잘못된 변호사/판사/검사가 들어와 ‘정의/공정’을 들이밀때, 예를 들어 이혼 법정에 들어가 싸우거나 이혼 변호사가 걸리는 경우 그나마 괜찮던 관계도 얼마나 틀어질 수 있는지 Marriage story 여기서도 잘 보여주지 않는가. 우리 부부가 경험한 것을 보더라도, 궁극적인 목표는 누가 더 잘못했고 누가 더 억울하며 무엇이 가장 공정한 해결인지가 아니다. 정의의 회복없이는 관계의 회복도 없을수 있지만, 관계의 회복이라는 목표 하에서만 우리는 모두를 살리는 방향으로 정의를 회복할 수 있다.

관계가 회복되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되는 과정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관계 회복의 자리로 나올수 있어야 한다. 앞서 몇가지 대안과 한계를 살펴봤다. 치에 비유하자면 무조건적인 공감, 동조, 그 인타이틀먼트를 부추기는게 일부 진보진영의 접근 – ‘억울한 사람 다 나와. 억울하지? 그래 맘껏 주장하고 맘껏 개혁하자’ 이라면, 무조건적인 충고와 공허한 바른소리는 일부 보수진영의 접근 – ‘원래 세상이 불공평한 부분이 있고 파이가 커지면 더 나아질수 있으니 자꾸 불만제기하지 말고 좀 참아. 너만 억울한거 아니야. ‘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지 않을까. 그 둘다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과 공감, 그러면서도 나에게서 나아가 상대까지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상생과 화합으로 이끌어주는 한차원 높은 접근이고 가치이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사회의 차원에서도.

상처받고 아파서, 무너진 신뢰와 관계가운데 나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그들에게 충고하려는게 전혀 아니다.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느끼고 공감한다. 나도 많이 실수하고, 그런 유혹에 빠지고, 내게도 관계를 회복시키는게 절대 쉽지만은 않다고 고백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같이 울고, 같이 아파하고, 그 관계를 회복시키는데에, 그 자리로 나오는 데에 필요한 용기와 격려와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참고로 이글에 보면, 깨진 약속으로 인해 실추된 신뢰와, 그로인해 단절된 관계를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리뎀티브 리더십 (Redemptive leadership)에 대해 말한다. 모두에게 일독을 강추)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들어준 지난 몇주일이었다. 3R – (Redemption, Restoration, Reconciliation) – 내가 경험한 힐링의 과정이다. 혼자 꽁해 있는, 내 마음이 만든 작은 감옥같은 그 창살없는 방으로 와서 내 대신 값을 치루시고 (Redemption), 나를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Restoration), 나와 아내의 관계를 회복 (Reconciliation) 주셨다. 나를 구하신 그분의 사랑이 이 글을읽는 모든분께도 임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부록1 – 가족사진과 큰애 넷을 입양한 가정 (인간극장) 영상

우리가족이 다섯이 되기까지, 참 많은 깎임의 과정이 있었다. 더 성숙하고 더 하나되고 더 사랑가운데 거할수 있기를.
최근에 본 큰애 넷을 입양한 가정 이야기 (가평별곡) – 인간극장에 나온. 강추다. 유투브 가평별곡채널도 있다.

부록2 – 나의 회복기

이하는 나의 회복기 – 어떻게 내가 이 인타이틀먼트의 늪 – 함정에서 빠져나왔는지이다. 크리스천으로서 나의 경험을 솔직하게 쉐어하자니 다양한 크리스천 용어가 나오게 됨을 미리 크리스천이 아닌 분께 양해말씀을 구한다.

기도 중에 힐링을 경험하기 – 여러번의 기도 힐링이 있었지만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그 인타이틀먼트의 한가운데 있을때, 잠시 자동차를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정비소를 찾았다. 차를 맡기고 잠시 기다릴때 찬양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기도할 힘도 없어서 뭐라고 할지도 모르겠었지만 그래도 기도하고 싶어서 눈을 감고 그분을 찾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자 거짓말처럼 아래의 일들이 일어났다.

파트1 – 휴식 (Rest) 

무슨 찬양을 들을까 하다가 – 주가 필요해를 선택했다. 그만큼 주가 필요했기에. 그걸 듣고 있는데 예수님의 따스한 허그가 느껴졌다. 그분이 내 어깨를 뒤로 누이고 편히 쉬게 하심이 느껴졌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시는게 느껴지며 그냥 그분 안에서 아무생각안하고 쉬었다. 아 진짜 오랜만의 오아시스 같은 쉼이었다. 내게 너무나 필요했던.

한곡을 다 듣고 쉬고나자, 예수님이 자신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어떻게 쉬고 해주고 계신지 보여주셨다. 정말 셀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분안에서 쉬고 있었다. 보는 것 만으로도 힐링이 됐다. 

파트2 – 비전 (Vision)

한참 나를 휴식시키시고, 주위의 사람들을 휴식시키는걸 보여주시고 그분 – 예수님이 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본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게 보여주고 느끼게 해줬다. 삶의 현장에서, 나의 약함을 거리낌없이 나누면서 (extreme vulnerability로), 사람들을 휴식시켜주는, 예수님과 함께 사랑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다시금 힘을 주고 생명수를 전달하는 나의 비전을 보여주셨다. (조금더 구체적인 비전도 보여주셨지만 일단 생략)

그러면서 그분이 말씀하셨다 – “산아, 힘들었지? 쉬니까 좋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보이니? 느껴지니? 그래. 먼저 들어주자꾸나. 보듬어주자꾸나. 섬기자꾸나. 서로 생각도 의견도 성격도 백그라운드도 다르다고? 괜찮다. 공감하고 동의할수 있는 부분에서 시작하자.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마음껏 자기 뜻을 펼칠수 있는 운동장(Playing field)을 만들어줘라. 힐링이 너의 직업이고 역할이다. 너의 전투는 힐링이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자. 사람들은 다 우리의 아군이야.  

파트3 – 아내와의 관계 회복 (Reconcile with my wife)

파트2를 마치고 나자 내겐 새로운 힘이 샘솟았다. 그분의 사랑이 내 가슴과 영에 전해지자 다시금 난 그분을 예배할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예배하겠다고 하자 예수님은 잠깐, 그전에 할게 있다고 하면서 월요일의 그 장면 – 내 마음을 꽁꽁 닫게 만들었던 아내와의 대화의 장면으로 나를 데려갔다.

1. 다 퍼부어라 just let it go – 그리고 예수님은 먼저 내게 다 퍼부으라고 말씀하셨다. 맘속에 있는거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아내한테 퍼부으라고. 그래서 해봤다. 나도 할만큼 하고 있다 뭘 더 바라는 거냐 등등

2. 내가 어디에 있는지 봐라 showing Jesus in the picture – 그리고 예수님은 내 눈을 뜨게 하시며 자기가 그때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셨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내 아내 안에 있었다. 거기서 나의 그 인타이틀먼트에 의한 공격을 다 받고 계셨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렇게 그분은 내가 다 받을게 내가 다 이해한다고 하면서 나의 공격을 받고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3. 자 이제 내가 어딨는지 다시보고 다시해봐라 – 그리고 예수님은 갑자기 부활하신후 내 몸속으로 슥 들어오셨다. 그리고 내게 물으셨다. 이제 다시해봐라. 어때, 이번에는 다르게 해볼수 있겠니?  

파트4 – 예배 (Worship)

여기까지 기도가 되자 입이 떡 벌어지고, 하나님께 맘껏 예배하고 찬양하고 싶어졌다. 그때 예수님이 갑자기 말씀하셨다. 산아, 내가 어떻게 아버지한테 예배하는지 보여줄까?

1. 예수님의 예배 – 예수님은 본인이 지금 내게 했던 그 단계 – 휴식시키고, 그 죄를, 그 억울함을, 그 응어리를 다 앉고 대신 십자가를 지고, 그걸 대속한 후에, 부활의 영으로 다시금 그 사람을 살리는, 그리고 그 살아난 사람들이 하나님께 찬양하게 한 후에 또 새로운 영혼을, 잃어버린 양을, 상하고 지친 심령을 향해 가시는, 계속해서 그걸 반복하며 하나의 영이라도 더 구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 본인의 예배를 보여주셨다.  

2. 하나님의 사랑 –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대속과 구원받은 영혼을 사랑하는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만들기 위해 성화시키고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pruning), 가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아버지(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향한 사랑.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정말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었다.

3. 나의 예배 –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자 봤지? 이제 니가 예배해볼래? 이 사람들이 보이니? 싸우고 상처받은 사람들. 혼자 하는게 아니야. 부활한 내가 니 몸에 있으니 나와 함께 하는거야. 한사람 한사람을 안아주고, 상처 받아주고, 사랑해주고, 그래서 이 사람들이 새로워질 수 있게. 아까 봤지 너의 비전? 하나씩 해보자…

이렇게 기도로 많은 힘을 얻었지만 여전히 쉽지 않았다. 여전히 자기 연민, 자기권리주장 (인타이틀먼트)에 빨대 꽂고 계속 들이마시고 싶은 유혹이 매우 강렬했다. 부추기는 목소리도 계속 들렸다. 늪이 나를 빨아들이는것 같이 느껴지고, 애들을 계속 내 신경을 건드렸다.

그럴수록 약해지지 않겠다고 기도했고 (기도할 힘이 이제는 조금 낫기에), 스스로 듣고자 그분의 선하심을, 그리고 내 마음을 지켜주실 것임을, 나는 사랑하고 섬기는 자리로 갈것을 선포했다. ‘나는 사랑하기로 선택한다. 나는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서를 빌수 있게 지음받았다. 그렇게 다른 존재로 변화받았다. 이미 이긴 싸움이다. 지금 내 귓가에 들리는 달콤한 속삭임은 거짓말이다.’ 이런식으로. 그리고 나자 조금씩 힘이 더 생기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잘하고 있다. 그렇게 나오려무나. 온전히 너를 내려놓고 도움을 요청하려무나. 그리고 아내와 함께 내게 나오거라.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고, 겸허히, 간절한 마음으로 같이 나오려무나.

그래서 매우 민망하고 어색했지만 기회를 봐서 아내와 대화를 시도했다. 아내는 오히려 아이들과 함께 몸도 마음도 회복되어가고 있어서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그리고 같이 기도했다. 맘껏 나의 작음을 나의 잘못을 회개하고 나의 능력없음을 고백하고 그분의 개입하심과 인도하심을 구하자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손잡고 우리를 누구보다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잘못을 다 대신 갚아주신 대속자 (Redeemer)의 은혜에 힘입어, 모든 것을 사랑과 공의로 주관하시는 판사 앞으로 나갈수 있었다. 그리고 더 새로워진 마음과 온전히 납득된 결론으로 손잡고 법정을 벗어나 다시 우리 본연의 자리에 올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난 1년여 중 가장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무너졌던 이 터널을 벗어났다.

About sanbaek

늦깍이 크리스천 (follower of Jesus), 우렁각시 민경이 남편, 하루하율하임이 아빠, 둘째 아들, 새누리교회 성도, 한국에서 30년 살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거주중, 스타트업 업계 종사중. 좋아하는 것 - 부부싸움한것 나누기, 하루하율이민경이랑 놀기, 일벌리기 (바람잡기), 독서, 글쓰기, 운동, 여행 예배/기도/찬양, 그리고 가끔씩 춤추기. 만트라 -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8 comments

  1. 대섭

    아멘.. 진심으로 기도하고 축복해요 형. 그 entitlement 와 self pity 는 사단이 이용하는 가장 효율적인 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매일의 삶을 함께하는 부부사이에서는 더더더욱. 예수님이 아내 안에 계셔서 그 퍼부음을 받고 계셨다는 것이 너무 마음에 와닿고, 저의 행동도 돌아보고 회개하게 되요. 앞으로 아내 안의 예수님을 보고 그 사랑 앞에 저를 변화시키기를 기도합니다!

    • Thank you brother. 진짜 그 장면은 비현실적이었음.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혐오하고 찌르고 그럴때 그걸 다 받고 피흘리고 그 피로 다시 우리를 감싸 안으시는, 먼저 사랑해서 회복 시키시고 그래서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그리고 부러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장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It’s all grace. 매일을 함께 하는 부부사이가 격전 장이라는데에 100% agree. What an insight 🙂 Grateful for our friend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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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Kyong Hi Bea

    부부의 신뢰회복에 대한 글을 검색하다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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