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소폭 바꿔봤다. 본인 소개를 하는 About San 을 만들었으니 처음 오시는 분이나 저를 모르시는 분은 한번씩 참고해봐 주시길. 그리고 블로그 글의 목차를 만들었고 블로그 글과 별개로 그때그때 ‘삶의 의미, 특히 신앙의 영역에서’ 내가 영감을 받는 내용들을 소개하는 뉴스레터도 새로 시작해볼 야심찬 계획이니, 모두들 구독을 부탁드린다.
이번글은 코로나-19와 신앙 – 어떻게 믿을것인가 2편이다. 원래는 상/하편으로,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 vertical alignment)로 앞선글 참고 – , 그리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 – horizontal alignment)로 정리할 생각이었지만 쓰다보니 내용이 너무 방대해 져서 본격적인 이웃사랑 이야기는 마지막 3편에 소개하고, 이번 2편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다시 돌아보게 되는 고통의 의미와 대처법을 주로 다루고자 한다. 고통의 문제는 사실 책 한권으로도 모자를 정도로 방대하고 어려운 내용이라 글 하나에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은 매우 제한적이겠지만 그래도 시도해본다. 부디 이 글이 크리스천 뿐 아니라 신앙이 없는 동시대의 이웃에게 한번쯤 질문을 던져보게 만드는 글일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로 아래 소개하는 내용의 상당수는 팀 켈러 목사님의 이 설교 – 고통과 불확실 속에서의 평화 (Peace in times of suffering and uncertainty)에서 발췌한 내용임을 알린다.
1. 세상은 Cov-19란 고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고통은 필연적이지도 않고 아무 의미도 없다 -> 고통 최소화 optimization
이 질문에서 부터 시작하고 싶다. 세상을 사랑하려면 일단 세상을 알아야 하겠기에. 세상은 – 특히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이 Cov-19라는 엄청난 폭풍과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고 반응하고 있는가?
인류가 또 얼마나 발전했는지 증명될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합니다.
코로나-19를 맞고보니 인간의 한계가 느껴지지 않냐는 질문에, 실리콘밸리의 한 스타트업 대표가 한 답변이다. 실리콘밸리의 생각을 너무나 잘 반영하는 답변이 아니었던가 한다.
신을 믿고 의지(?)하는 전통적인 신앙의 불모지로 알려진 실리콘밸리, 인류 기술과 문명의 최일선 실리콘밸리가 어떻게 코로나-19에 대처하는지 보면, 세상이 Cov-19란 고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대처하는지 실마리를 찾을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구체적인 대응들을 살피기에 앞서, 그 근간에 있는 정신부터 살펴보자.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물질문명과 현대문화의 ‘정신’을 내멋대로 요약해보자면
- 절대진리는 존재하지 않거나, 찾을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행복.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케어하며 행복을 최대화(maximize) 해야한다. 스스로의 발견 (Self-realization), Self care 같은게 매우 중요한 화두
- 과학과 기술에 의한 인류문명의 진보는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수 있도록 하는 파이를 키운다는 차원에서 ‘절대선’에 가깝다. 기술문명의 진보야말로 모두가 공감할수 있을만한 명쾌한 ‘선’이다.
- 따라서, 인류가 당면한 과제 – 그게 환경오염이든 (테슬라 전기차), 지구의 자원고갈이든 (스페이스X), 정보의 비대칭이든 (구글) – 를 극대화된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과 최대효율로 (Lean startup methodology) 계속 해결해 간다.
이 세계관에서 ‘고통’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행복을 앗아가는, 어떻게든 없애고 줄여나가야 할 악이며 그 자체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 각자는 개개인의 행복을 최대화 해야 하고, 그것은 동시에 개개인의 고통을 – 특히 이 세상에서 우리를 괴롭히게 하는 것은 무어든 (돈, 커리어, 관계문제 등등) 최소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통 대처법은 고통 최소화이며, 삶은 고통 최소화의 최적화 (Suffer minimizing optimization)로 나타난다.
그래서 유발 하리리는 2017년 본인의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의 후속작 호모데우스에서, 실리콘밸리 중심의 문명발전으로 인류는 전염병은 물론 죽음도 결국에는 극복해 갈 수있을거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그는 이번 코로나 사태에 대해 인류의 진보를 다시한번 요구하는 – 인류는 또하나의 위기와 전환점을 맞았다. 국가의 감시가 강화되고 있고, 전례없이 모든 국가들 – 부국/빈국 모두 – 이 동일한 상황에 놓여있다. 인류는 데이터와 의료 전문가의 의견을 중심으로 글로벌 연대를 통해 이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한다. 이건 인류에게 또하나의 시험지가 될 것이다 – 라는 차원의 글을 Financial Times에 기고했다. (원문링크). 맨 위에 소개한 스타트업 대표의 답변과 생각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찌보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 고통이 아픈것 빼고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당연히 고통을 최소화 해야지. 하지만 아래 소개할 다른 세계관들을 보면, 꼭 이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만은 아니라는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시 실리콘밸리 물질문명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세상이 보기에 코로나-19는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힘을 합쳐 싸워야할, 아무런 의미도 없고 우리의 행복을 앗아가기만 하는 전염병이란 괴물이고, 우리 인류 개개인의 역할은 스스로를 돌봐 가며 할수 있는 힘을 다해 이 괴물을 무찔러야 한다.
더 현실적이고, 더 노력하는 모습 – 더큰 폭풍이 와도 견딜수 있는 배를 만들자
자 여기까지 잘 따라왔다. 이제 실리콘밸리가 이번 코로나 사태에 반응하는것을 관찰해보자. 역시 내멋대로 크게 아래 네개를 발견했다.
- 기술기업 – 특히 Big Tech 들이 가진것을 활용하여 선행을 함 – 기업들이 엄청난 액수를 기부하고, 페이스북 구글에서 각자 프로덕트를 만들고 등등
- 인류문명의 발달에 많은 희망을 걸고, 영웅을 기대함 – 특히 이런 트렌드는 인플루엔서들이 주로 활동하는 트위터에서 매우 활발하다. 마크 주커버그는 $25M을 게이츠 재단의 코로나 액셀러레이터에 기부, 폴 그래햄(Paul Graham)이 $1M을 flexport에 기부해서 여길 통해서 구호물자 조달하고, 잭 도시(Jack Dorsey)는 $1B을 코로나 구호기금에 기부하겠다고 나왔다. 이런 몇몇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통해, 마치 어벤저스를 보듯이, 우리 인류가 얼마나 더 진보하여 이런 문제와 싸우는지를 응원하고 기대함
-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사회의 규칙과 예의 (Shelter in place)를 잘 지켜가며, 주위를 적극적으로 돕는 개인도 종종 보임
- 하지만 주식시장 폭락, 경제 먹구름 등으로 가중된 불안과 고통은 분명한 실재. 이 고통에 대응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요가, 명상등의 방법으로 마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 또 온라인 댄스파티, 술모임 (Virtual drinking, virtual party, etc) 으로 스트레스를 달래며 고통과 싸우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는 모습이 보임
그럼 이런 세상의 대응을 신앙 안에서의 대응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어느정도는 동어 반복이지만 위의 네가지가 크게 두가지로 줄어들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엄청나게 현실적이다. 내세를 믿지 않고 현세와 현실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보니 현실인식에 엄청나게 빠르다. 그래서 신앙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기도 하고, 더 고통을 없애는데 현실적이고 저돌적이다. 그게 본인의 고통인 경우 더할나위 없고 사회의 고통일 때도. (이 블로그 글이 대표적인 예. 요약하자면 – 제발 이제 괜찮다고 막연한 낙관론을 펼치지 마라. 괜찮지 않다. 이미 많이 죽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처해있다. 억지로 덮으려 하지 마라. 그런게 더 짜증나고 후지다.)
둘째, 어떻게든 고통을 빠른시기에 없애버리려고 노력한다. 라이프 해킹, 그로스 해킹으로 최선을 다한다. 전에 이글에 썼던 비유 – 인생을 망망대해를 항해하는것에 비유 – 를 빌리자면, 기존에 안전한줄 알았던 나의 배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전례없는 폭풍에 많이 부서지자, 여념없이 배를 보수하고, 더 크고 튼튼한 배를 만들어야 겠다고 단단히 다짐한다.
2. 세상의 접근법 무엇이 문제인가1 – 고통은 삶의 필연적인 동반자이다.
고통은 삶의 필연적인 동반자. 일회성 극복전략이 아닌, 현실적인 고통 접근법, 고통에 대한 설명 (Narrative)가 필요할 수 있다
이제 질문해보자. 도대체 이거말고 어떤 방법이 있다는 거냐? 세상의 접근법의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허황되고 뜬구름잡는 구원과 심판의 얘기면 나는 관심없으니 그런 얘기할거면 그만 읽겠다고 (하하). 고통에 대해서 뜬구름 잡는 접근을 하겠다는게 절대 아니니 그런 걱정하시는 분이 있다면 안심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고통은 실재이다. 그렇기에 매우 현실적인 접근법이 필요하고, 현실적인 접근법을 다룰 것이다.
세상의 고통 Narrative의 첫번째 오류는, 고통이 문명발전과 더불어 극복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서 온다. 난 기술문명 발전의 혜택이나 성과를 평가절하 하려는게 전혀 아니다. 분명 인류는 발전했고, 전쟁도 기근도 100년전과는 비교할수 없이 줄고 평균수명도 연장되고 전반적인 후생도 증가했다.
하지만 과연 고통을 객관화하여 수치화할 수 있을까. 부국은 또 부국나름의 엄청난 고통들이 있고 – 그게 우울증이든, 빈부격차에서 오는 상대적 빈곤이든 – 고통의 크기는 결코 평균수명이나 GDP와 정비례하지 않는, 훨씬 더 복잡하고 오묘한 인생살이의 실재가 아닐까. 경제와 행복의 상관관계를 봐도, 일정 빈곤선을 넘어갈때 까지는 경제가 발전할수록 행복도 증가하지만 그 이후엔 관계가 전혀 선형적이지 않은것처럼. 일례로 실리콘밸리의 중심 팔로알토 고등학교의 자살률과 우울증 발생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곳 사람들이 훨씬 경제적으론 풍족하지 않은 부탄이나 네팔사람들보다 훨씬 더 불행하게 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실제로 고통의 문제는 인류 역사상 늘 함께해온, 늘 익숙한 문제였다. 20세기 중후반부터 전쟁이 잦아들고 기술문명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마치 고통이 100%는 아니어도 상당부분 극복가능한 것처럼 여겨져 고통에 대한 논의와 담론이 상당히 생소하게 느껴지기에 이르렀지만 그건 절대 당연한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명상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실리콘밸리에도 널리 알려진 불교나 카르멘 사상계열도 그 뿌리를 보면 고통에 대해 확실한 의미를 부여하고 확실한 대처법을 이야기한다. 아래 소개한다.
불교는 고통에서 탄생한 종교이다. 그래서 고통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고통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고통은 집착에서 나온다. 일체무소유, 모든 집착에서 해방되고 열반/해탈에 이를때 우리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
한편, 힌두교 등의 윤회주의로 대표되는 카르멘 사상에서, 고통은 전생의 업보이다. 따라서 부당한 고통은 없다 – 모든 고통은 업보이고 이유가 있고, 따라서 그대로 신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번 삶을 선행으로 잘 살아서, 업보를 갚고 고통없는 다음생애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의 진짜 문제는 고통이 왔을때 사람을 어쩔줄 모르게 만드는 것이다. 고통이 나쁜것이고 극복가능한 것이라고만 배웠으니, 고통이 왔을때, 그리고 그 고통이 극복되지 않을때 그 부조화를 어쩔줄 몰라하게 만든다. 할수 있는 거라곤 더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인데 (더 큰 배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러다 보면 자포자기 하거나 상대적 빈곤감으로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고통은 삶의 필연적인 동반자이다. 일회성 극복전략이 아닌, 현실적인 고통 접근법, 고통에 대한 설명 (Narrative)가 필요하다. 이쯤에서 위에 아주 현실적인 현실주의자의 블로그 글 표현을 빌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한마디로 요약해본다.
제발 고통이 문명발전과 더불어 없어질것처럼 이야기하지마. 가장 잘살다는 실리콘밸리에 얼마나 많은 우울증과 자살이 있는지 우리모두 알고 있잖아. 고통은 그냥 돈좀 더 생기고 상황좀더 좋아진다고 없어지는 하는, 이 위기만 지나가면 더 나아질거라고 위안하고 넘어갈만한게 아니야. 그건 우리 삶, 인생의 실재야. 고통을 직면해야되. 무조건 나쁜거라고 넘어갈 생각만 하지 말고, 고통이 어떤 의미가 있는건지, 고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진지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어.
3. 세상의 접근법 무엇이 문제인가2 – 무엇이 고통을 낳았는가?
우리가 무엇에 묶여 있기에 고통이 오는게 아닐까?
세상의 접근법의 문제 두번째는 고통이 악이고 당장의 고통을 없애는데 너무 최선을 다하다 보니, 무엇이 고통을 낳게 했는지 고통의 근본 원인을 제대로 못보는데 있다.
코로나-19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다양하다 – (직접 코로나에 걸려서도 있겠지만 이건 논의를 위해 일단 별론으로) 주식시장이 폭락해서, 직장이 위태로워져서, 심지어는 전에 좋아하던 스포츠를 못보게 되서 고통을 느낄수도 있다. 여기에 대한 대처법은 더 돈을 많이 벌거나 투자를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것, 더 커리어를 안정적으로 다지는 것, 스포츠 뿐 아니라 게임 등으로 취미를 다변화 하는것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일까?
위 영상은 87년생, 만 33살의 영국출신 인플루엔서 Jay Shetty의 인터뷰이다. 승려를 따라 엄청난 수행을 통해 도를 터득했다는 Jay는 자기 도의 핵심을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 지는 것 (being able to detach) 이라고 한다 (바쁘신 분은 영상 약 18분 정도를 보시길).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고통은 필요이상의 집착에서 온다. 따라서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당장 눈앞의 고통을 없애고 극복하는 것도 있지만, 그 집착을 제거하는데 있다.
코로나의 예로 돌아가서, 만약에 내가 돈이나 커리어나 스포츠 같은 취미로 부터도 자유로웠다면? 많이 가졌던 적게 가졌던, 환경이 좋든 어렵든 감사하며 자족하며 자유로울수 있다면? 그래도 우리에게 (Again, 직접 아픈 경우는 제외한다) 동일한 수준의 고통이 찾아올까?
내가 좋아하는 비유 – 인생을 망망대해를 항해하는것에 비유 – 를 빌리자면, 세상의 접근법은 위에 소개했듯이 더 큰 더 튼튼한 배를 짓는 것이다. 기존에 안전한줄 알았던 나의 배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전례없는 폭풍에 많이 부서지자, 여념없이 배를 보수하고, 더 크고 튼튼한 배를 만들어야 겠다고 단단히 다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문제가 그게 아니라면? 어차피 폭풍은 계속 올거니, 배를 보수할게 아니라, 잠수복을 준비하고 서핑하는 법을 배우는게 훨씬 더 현명한 대처법이라면? 물을 한방울도 안맞으려고 어떻게든 꽁꽁싸매는게 아니라, 물도 삶의 한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 물을 맞고도 아프지 않을 수 있게 내실을 다진다면?
우상으로부터의 자유 – 고통의 싹을 잘라버린다
기독교는 고통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까? 기독교는 이 모든 고통의 시작과 근원을 관계의 단절에서 찾는다. 처음 온전했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세상에 수많은 고통이 찾아왔다. 그래서 이런 고통들은 우리 삶의 관계단절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첫번째 고통에 대한 Narrative도 위의 예와 맥을 같이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줄때, 그 첫번째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였다. 여기서 다른 신, 기독교적 표현으로 우상 (Idol)은, 우리가 주로 쓰는 말로 바꾸자면 ‘집착’ 과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우리의 중요성과 안전을 (Significance and security) 만약 그 어떤 세상의 것에 두고 있다면, 그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보기에 절대 좋은 모습이 아니다. 그렇기에 Christianity는 그 모든것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참고로 명상 등으로 대표되는 정념/수행과 그 지향점은 비슷하지만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불교/명상은 참선과 수행을 통해 모든걸 비워서 그 경지에 이르는 반면, Christianity에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아무런 나의 노력 없이 그 모든 집착에서 해방된다)
성경의 일관된 스토리는 단절된 관계를 회복(Redemption, Restoration, Reconciliation)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예수님을 통한) 이다. 위 영화 – Beautiful Boy – 마약중독에 걸린 아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아버지의 사랑이야기다.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아들의 절규를 아버지는 도저히 들어줄수 없다.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아들을 중독시킨 마약을 너무나 미워하고, 그거에서 아들을 떼어놓기 위해 감금도 시도하고 전화도 도청하고 별의별짓을 다한다. 바로 이것이 건강치 못한 집착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기독교는 이야기한다.
실리콘밸리에서도 각종 명상으로 정념의 상태를 찾고, 나와 상대방을 비교하지 않으며, 커리어나 돈과 같은 데에서 자유로워 지자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워낙에 커리어나 돈, 그리고 기술문명의 정점에서 오는 영향력과 명예가 엄청나서 이런 이야기는 또다른 성공스토리에 곧 묻혀 버리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한 물질세계에의 집착이 고통의 근본원인중 하나가 아니냐는 질문은 계속해서 나올 것이라고 나는 본다. 왜냐고? 그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 본능이기에. 더 많이 가지는 것으로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한때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벤처캐피털 중 하나였던 소셜 캐피털의 창업자 차마쓰가 이 성공의 쳇바퀴, 조금만 더 올라가자의 체바퀴에서 벗어나기까지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토로하는 아래 영상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러번 반복된 메세지지만 너무나 중요한 메세지이기에 다시한번 다른 영상을 소개한다. 아래 연대 교수님은 서로 비교하고 결과에 목을 매는 현대문명은 ‘능력주의’와 ‘세속주의’ (가치보다 결과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라며, 그런 사회에서는 결국 행복이 있을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만약 나의 고통이 내가 엄청나게 애지 중지하던 이 세상의 어떤 것의 상실에서 왔다면, 그리고 이 고통이 내게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라면, 기독교는 세상과 달리 이렇게 이야기한다.
더 큰 배를 만들때가 아니야.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안전한 커리어를 만들고 더 꽁꽁 보호막을 만들때가 아니야. 오히려 그 보호막에서 해방될 때야. 이게 축복일수 있어. 이제는 헛된 집착에서 벗어날때야.
4. 기독교에선 도대체 고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대응책을 주는가? What can Christianity offer in a time like this?
지금까지 현대 서구문명에서 고통에 대처하는 자세의 문제점들을 살펴봤다. 오해는 마시라. 난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세상의 대처법에 정말 존경받을 만하고 배울점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한다. 단 앞서 이야기한 이유들에 의해, 이 방법이 결코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도, 그리고 우리 각자를 준비(equip)하고 무장시키는 현실적인 방법도 못될수 있다는것을 지적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러면 기독교가 제시하는 고통의 Narrative는 무엇인가?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집착과 우상으로부터의 해방? 무슨 말인지는 알것 같지만 여전히 어렵고 와닿지 않는다. 나는 엄청난걸 바라는게 아니다. 난 그냥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을 뿐이다. 어느정도 돈있고 커리어 안정되고 고통받지 않는거 – 이게 뭐가 나쁜가? 이걸 뭐라고 하는거냐?
이런 질문에 대해 기독교는 결코 쉬운길을 택하지 않는다. 종교는 과학과 달리 미신적이며 허황되고 값싼 구원상품(?)을 판다는 일부의 비판과는 달리, 기독교는 오히려 세상이 제시하는 레서피(Recipe)보다 – 고통은 극복가능하며 이번 고통이 지나가면, 조금만 더 준비가 되면,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고통이 줄어들 것이라고 – 훨씬 더 어려운 길을 이야기한다.
Christianity 는 우리에게 정공법을 택할 것을 주문한다. 어렵지만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 보자고, 그냥 반창고만 붙이지 말고 우리 내면의 목소리, 우리 정신과 영의 소리에 깊숙히 귀기울여보라고. 도려내야할 곪은 상처가 있으면 확실하게 도려내고, 완전 대수술을 해서 체질 개선을 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어떤 고통에도 대처할수 있도록 아래 네가지를 이야기한다.
1. 온전한 자유를 바라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 가슴에 귀기울여 보자. 세상의 것은, 그게 아무리 지금 나에게 달콤해도 – 그게 돈이든 명예든 심지어는 가족/친구 같은 인간관계든 – 절대적으로 내게 행복을 줄 수 있는게 아니란걸 느낄수 있을것이다. 이것은 이미 위에서 충분히 이야기했으니 넘어가겠다.
2. 직접 세상에 오셔서 고통받은 신
우리 가슴을 들여다보자. 고통당할때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가장 큰 힐링을 주는가. 우리 고통에 같이 눈물흘리며 함께해주고 공감하며 본인이 고통당함에도 그걸 대신 떠앉아 주는 사람이있다면 그보다 더한 힐링이 있을까? 그게 바로 예수님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세계 종교에서 유일하게 직접 이땅에 오셔서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을 겪은, 아주 개인적이고 우리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 하나님과 관계가 생기면, 그분은 절대 ‘흙수저’를 이해 못하는 ‘금수저’가 아니다. 그냥 백신 주고, 그냥 돈 떨어지면 돈주고, 그때 그때 문제를 쿨하게 해결해주는 백마탄 왕자님도 아니다. 그분은 오셔서 같이 아파하시고, 대신 고통받으시고 그 고통을 다 떠앉고 해결해주신 세계 종교에서 유일한 고통받은 신이다.
3. 사랑가득한 영생
우리 가슴을 들여다보자. 우리 모두는 사랑을 꿈꾼다.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꿈꾼다. 코로나-19때문에 뉴욕에서 입양견이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모두가 집에 있으니 누군가와 교제하고 싶고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서 개를 앞다투어 입양한 결과라고 한다. 그게 우리다. 조금만 우리의 가슴에 귀 기울이면 알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먹고 살고 사랑할때 – 사랑을 주고 또 받을때 가장 피어난다는걸.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 팍팍한 현실만을 이야기하는 물질문명과, 또 우리 모두 자연으로, 열반으로 들어가 큰 강물에 합쳐지는 이슬과 같이 될거라는 불교와는 달리, 기독교에선 개개인의 존재 그 자체가 영원이 살아남아서, 사랑의 하나님과 접붙여져서 사랑하고 사랑받는데 거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마치 나무가 물과 닿아서 계속 자라고 피어나는 것처럼, 우리또한 사랑이신 그분에 접붙여져서 끊임없이 피어날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과 접붙여져서
4. 부활과 정의의 회복
우리 가슴을 들여다보자. 우리 모두는 정의를 꿈꾼다. 고통가득한 이 세상에 뭔가 분노를 느끼고 뭔가를 하고 싶어한다. 세상/실리콘밸리에서 대처하는 자세 중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것, 힘을 합쳐 고통을 해결하려 하는것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 우리의 가슴이 그걸 원하고 있다.
그게 기독교가 약속(?) 하는, 이야기하는 세상이다. 이땅은 불완전하며, 그렇기에 수많은 고통이 있지만 결국 정의가 회복될 것을.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이 없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정의와 회복의 부활의 세계가 있음을.
5. 마치며
코로나-19는 많은 이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초래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또 힘을 합쳐서 이 고통을 빨리 없애고 고통에 빠진 사람을 도우며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세상 – 서구물질문명 – 실리콘밸리의 대응은 모범사례이며, 미국이 보여주는 많은 시스템적 결함에도, 실리콘밸리 만의 특유의 힘 (resilience, innovation)을 보여주고 있어 귀감이 된다.
하지만 이 기회를 맞아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갔으면 한다. 과연 코로나가 지나고, 우리가 조금더 전염병과 잘 싸우면, 우리가 조금더 삶의 안전망을 갖춰놓으면, 인류가 더 진화하면, 고통은 과연 극복가능한 것인가? 좀더 본질적으로 고통을 야기하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고통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
Christianity는 이야기한다. 고통은 관계의 단절에서 왔으며, 그 관계가 회복될때, 고통을 야기하는 수많은 집착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더 사랑하고 사랑가운데 거할수 있으며, 이 모든 고통이 없어지는 날이 온다고. 허황되 보인다고? 글쎄, 고통에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내가 우리가 조금만 더 힘써서 문명을 진보시키면 고통이 없어질것이라고 믿는게 더 fake promise가 아닐까? 그렇게 질문하고 싶다.
끝으로 말콤 글래드웰 (다윗과 골리앗, 아웃라이어, 티핑 포인트, 블링크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이 한 말을 소개하며 마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영의 세계가 있냐고요? 당연히 있죠. 눈에 보이는 세계만 있다는게 더 믿기 어렵지 않나요? 당장 우리가 매일하는 인터넷 통신만 해도 눈에 보이지 않죠. 우리의 정신이나 마음은 또 어떤가요? 세상엔 온통 눈에 안보이는것 투성이 입니다. 조금만 귀기울이고 생각해보세요.
다음글에선 코로나-19와 같은 시기에 할 수 있는 이웃사랑, 고통을 같이 나누고 사랑을 전하는 방법에 대해서 써보겠다.
고통과 관련한 신앙인의 자세가 참 어려울때가 많습니다.. 나의 자녀가 죽었을 때 내가 고통스러운 건 내가 자녀에게 묶여있기 때문인건지.. 우리 뜻을 넘어선다는 전능하시고 허락, 섭리의 하나님의 의미를 찾는 것도 지칠 때가 있고, 그저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시다는 방관+주변인적인 하나님을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현 상황, 나의 삶에서 중요하다 생각하는 세속적이고 유물론적인 개념들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들이 오히려 참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이 드네요.. 코로나, N번방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위로를 전합니다..
네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모든걸 설명하려는 시도는. 욥기에서 보듯 한가지 성경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가 모든걸 일수는 없다는것. 그래서 믿음으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시련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나갈 수 있을지 – 희생과 헌신과 사랑의 자세로 – 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닐까, 그리고 성경은 그걸 우리 힘으로 하지 않고 도와 주시는 분이 있으며 모든게 회복될 날이 있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게 아닌가 싶네요. It’s definitely not easy. Pray that he gives us the strength to endure and a new heart to hope&love.
백산님 한국은 코로나가 점점 줄어드는 중인데, 미국은 사망자도 많고 계속 증가하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가정과 가족이 있고, 위생상태에 집중적으로 신경쓰셔서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이 또한 고통을 동반하겠지만 스쳐지나가길 기도합니다.
이번에도 좋은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따뜻한 답글. 네 고통이 적기를 기도하지만 고통의 크기를 떠나 그 고통에 대처하는 자세가 부끄럽지 않기를 그리고 지나가고 더 성숙해 있기를 기도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