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한번 뉴스레터든, 글을 쓴다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란걸 실감한다. 6월달에 내 머리와 가슴에 가득했던 두가지 주제중 첫번째 –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촉발된 인종간 정의 회복을 촉구하는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아래 나눈다.
정의를 원하는 미국의 신음
아시다시피 미국땅은 지난 5월25일에 억울하게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의 사망사건을 계기로, 코로나에 더해,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고 있다. 여전히 각지에서 시위와 폭동이 일고 있고, 11월 미국대선을 앞두고 해당이슈가 정치진영싸움으로 번지면서 전에없는 갈등이, 혐오가, 분노가, 비방이, 아픔이, 반목이, 울부짖음이 느껴진다. 미국땅의 이슈가 이다지도 내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영어로 다섯편의 시리즈 글을 썼다. 아래 소개한다. 글 제목은 “미국 땅의 회복의 정의를 추구하다 (Seeking Restorative Justice in America)” 이다.
생소하고 쉽지 않은 주제에 대한 생각을 담다보니, 또 아래는 원래 영어로 쓴 글을 한글로 옮기다 보니, 그 과정에서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부분이나 오해가 생길수 있는 부분도 분명 있으리라. 읽다가 관심이 생기는 분께는 원문 링크로 가서 원문 (영어)을 꼭 한번 읽어봐 주시기 부탁드린다. 아래는 주요 내용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핵심 부분만 발췌해서 가져왔다.
한문단 요약
요약하자면 이렇다. 갈등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아래 소개할 사랑x정의의 두 축으로 설명할수 있다. 많은 경우 우리가 보는 것은 정의를 추구하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과 사랑을 추구하지는 않는 정의o 사랑x 의 모습이거나, 정의회복 없이 화합을 강요하는 정의x 사랑o의 모습이다. 하지만 갈등 회복을 위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정의와 사랑을 동시에 추구하는 모습이다. 그것이 사회에도, 교회에도, 정치에도 간절히 필요하다.
나에게 그건 어떤 모습이었나. 생소하기만 했던 인종갈등/차별문제를 기도하고 알아가면서 아래 내가 어떻게 사랑으로 정의를 추구했고 (humble justice seeking), 진실되게 사랑/화합을 노력하는지 (truthful love/unity seeking) 나눈다.
인종차별은 미국사회를 좀먹고 있는, 수세기에 걸쳐 사회전반에 공기오염처럼 스며들어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해 박멸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갈등을 온전히 해결하기 위해선 우리 모두의 노력, 정의와 사랑을 이루려는 각자의 싸움이 필요하다. 관련하여 하나의 영상을 소개한다면 공교롭게도 이 일이 있기 4년이나 전에 있었던 은혜, 정의, 자비에 대한 이 영상을 권하고 싶다. 성경에서 소개하는 정의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그런 정의를 이뤄갈수 있을지 집대성한 내용이다. 그래, 진심으로 내 몫의 “회복의 정의”를 위해 계속 싸우고 싶다고 소망한다.

시작하며 이 글을 왜 쓰게 됐는지를 말하고, 정의와 사랑의 두 축으로 갈등상황에서의 대응을 분석하는 모델을 소개한다. 아래 그림의 y축은 정의에 대한 추구이고 x축은 서로 의견이 다른 상대방과 사랑/연합에 대한 추구이다.
- 3사분면은 정의와 사랑 추구가 모두 없는, 상대방을 압박하고 상대위에 군림하며 부조리/불공정 등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상태로, 인종차별과 같은 행동이 이에 속한다.
- 2사분면은 정의의 회복을 추구하되 생각이 다른 상대방에게 관용/이해/용서와 같은 사랑/연합의 제스쳐를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복수가 여기에 해당하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나 폭동중 2사분면에 속한 경우도 종종 있으리라
- 4사분면은 정의의 회복은 추구하지 않되 생각이 다른 상대방에게 관용/이해/용서를 구하거나 권하는 상태이다. 본인은 인종차별을 당하면서도 자식들에게 “어차피 백인들과 싸워봐야 우리만 손해다. 그들을 사랑하고 이해하자” 라고 한다거나, 아니면 종교단체 등에서 인종차별이 만연한 상황에서 “인종차별은 나쁘지만 싸움은 나쁜거니 서로 이해하고 관용하자” 라고 아무런 정의회복에 대한 언급없이 화해/관용의 메세지만 이야기한다면 여기에 속한다고 볼수 있다.
- 1사분면은 정의의 회복과 상대방과의 사랑/연합을 동시에 추구하는 상태이다. 이 대응은 본질적으로 어려운데, 갈등상황에서는 정의의 추구와 사랑의 추구가 공존하기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의 압제에 대항하면서도 비폭력으로, 그리고 억압하는 상대를 무조건 누르고 비난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껴앉으려 하는 태도, 넬슨 만델라가 수십년간 자신을 감옥에 가두고 흑인을 억압한 백인 지배 계층을 껴앉고 화해/회복 (reconciliation) 을 이룬 것이 이런 대응에 해당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천으로서 추구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1편에 소개한 정의 x 사랑의 두 축으로 미국사회, 미국교회, 그리고 미국 정치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응을 분석한 글이다. 아주 간단하게만 아래 주요 내용을 정리해보자면
- 사회: 2사분면의 대응이 많이 보이고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도 그럴것이 엄청난 부조리가 수면위로 올라왔을때, 가장 당연한 반응은 “관용은 무슨, 정의를 쟁취하자” 이기에. 하지만 사회 각지에서 1사분면의 대응도 보인다. 흑인으로서 이 사건과 지금 상황이 설명할수 없을만큼 아프고 힘들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혐오에 자신을 던지지도 않고, 사랑과 연합과 정의의 회복을 위해 계속 당당히 스스로의 존엄과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이 흑인 래퍼의 글이 가장 와닿았다. 관심있는 분은 꼭 읽어보시길.
- 교회: 교회, 특히 백인 교회나 이민교회는 인종차별 이슈와 같은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으로 대응해왔다. 그 이유는 다양한게 있겠지만, 위 모델에서 잘못하면 4사분면에 빠지기 쉽다 (정의 x, 사랑/관용 o). 다행스럽게도, 1사분면의 모델로 대응하는 교회와 크리스천도 정말 많이 접했다. 위에 소개한 영상이 대표적인 케이스. 교회의 리더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이 사건에 대해서 진심을 담아, 정의의 회복을 염원하며 그렇지만 사랑과 관용과 겸손의 마음으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서로를 보듬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 정치: 미국 정치가 갈수록 뜨겁다. 한국에서만 막장드라마를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미국이 더하지 않나 싶다는 생각이 든다. 트럼프의 대응이 뭇매를 맞고 있는데, 대응의 잘잘못과 트럼프의 인성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트럼프와 현 행정부의 대응은 2사분면의 대응 (폭동진압과 질서회복만을 외치지만, 시위하는 세력과 공감하려는 시도 없음)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고 민주당에선 1사분면의 대응을 하느냐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조 바이든과 다양한 민주당 후보도 각종 비방과 선전으로 정치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어 다른 방식의 2사분면 대응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내가 본 가장 시원한 (refresh) 정치인은 뉴욕의 쿠오모인데, 이 사람의 배경이나 정치적 색은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이 정치인으로서, 리더로서 보여준 커뮤니케이션은 정말 높이 평가하고 싶다. 1사분면 대응의 전형이 아닐까. 궁금하신분은 이 영상을 참고

3편은, 나의 개인적인 묵상, 그 첫번째, 정의 추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에게 있어 ‘겸손’하게 정의를 추구하는 모습은 어떤 과정들이었는가.
- 어떻게 반응할지 고민하고 생각하기: 첫단계는 일단 행동하기에 앞서서 마음을 다잡는 단계였다. #Blacklifematters 해쉬태그 달기 전에, 이 문제가 내게 진짜 와닿는 문제인지 고민했고,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질문했다. 이문제에 관심을 계속 가질지 여부도.
- 듣기/배우기: 관심을 가지고 충분히 이 문제에 대해 알아보기로 마음이 정해지고 나서, 최대한 다양한 각도의 의견을 듣고 공부하고자 했다. 소셜미디어는 내가 당장 동의하기 쉽고 동의하고 싶은 의견만 받기 쉬운관계로 최대한 다양한 미디어와 원 내용을 습득하고자 했다. 내가 보는 미디어들이 정치지형도에서 어디에 위치했는지도 확인하며 좌표를 확인하고자 했다. 특히 인종차별에 대해선 워낙 경험도 부족하고 아는것도 없어서 최대한 많이 읽고 들었다. 특히 인종차별에 대한 이 설교 시리즈가 가장 와닿았다.
- 기도하고 슬퍼하기: 크리스천으로서 갖는 가장 큰 특권중 하나는 기도할수 있는것. 그리고 기도를 통해 나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여겨졌던 문제도 내 문제가 될 수 있고, 잘 몰랐던 ‘남’도 ‘이웃’이, ‘형제/자매’가 될 수 있고, 그들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그 결과 같이 비탄해하고 슬픔을 나눌수 있는것이다. 인종차별으로 대표되는 미국땅, 미국인의 아픔을, 신음을 알아가고 그걸 기도하는 과정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미국이 진정한 내 형제자매가 됨을 경험할 수 있었다. 미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 회개하고 삶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작은변화를 만들어가기: 이글을 한창 쓰고 있는 중간에, 미국판 배달의 민족으로 점심을 배달시켜 먹으면서, 배달부로 온 흑인 아저씨를 마주치게 됐다. 매우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한국에서 30년을 팁 없이 살던 사람으로서 미국의 팁문화는 매우 생소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아깝게” 느껴질때가 많아서, 이날도 박하게 팁을 책정했었는데, 힙합음악을 틀고 낡은 차를 몰고 내 음식을 배달해주며 활짝 웃는 나이 지긋한 흑인 아저씨를 보면서, 내가 사회의 정의 회복을 말로는 하면서 실제로 얼마나 실천하는 것이 없는지 회개하게됐다. 결코 팁을 적게하는 행동이 인종차별이었다거나, 팁을 많이 하는게 인종차별 문제에 도움이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다. 단지, 삶의 아주 개인적이고 작은 부분에서 부터, 사회의 정의 회복을 위해, 내가 싸울수 있는 싸움을 매우 미약하나마 싸우기 위해, 할수 있는 것들을 하나 깨달았다는 것을 나누고 싶었다.

4편은, 나의 개인적인 묵상, 그 두번째, 사랑/연합 추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에게 있어 ‘진실’되게 사랑을 추구하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이 시리즈 중 가장 긴 글이고, 가장 논란이 될 수 있는 글이다.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기도 하고, 아직 생각이 다 정리되지 않은, 계속된 기도와 고민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독자분을 불편하게 만들것을 각오하고 아래 나의 생각들을 소개한다. 왜냐고? 이건 결코 논쟁을 하거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함이 아니다. 나의 목표는 그것에 있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다른 의견/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이야기하고 서로 사랑과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 아래 내 생각을 나누는 것은, 바로 이것이 나와 생각이 다를 수 있는 사람들과 사랑과 연합을 추구하고자 하는 나의 “진실된 시도” 이다.
1. 아시아 이민교회에 (우리교회를 포함)
내가 속한 교회를 비롯, 많은 아시아 이민교회는 이 문제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대응을 보여왔다. 아시안은 흑/백으로 대표되는 인종 갈등에 상대적으로 직접적인 이해관계자가 아니었던점, 한국계 이민자의 경우는 92년 LA폭동때, 흑인들의 시위과정에서 삶의 현장과 생명을 송두리째 잃은 경험을 한점 등 (루프탑 코리안, Let it fall) 이 인종차별과 갈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렵게 만드는 면이었으리라. 또 교회의 역할과 자리는 신앙/믿음과 직접 관련된 자리이지, 사회정의실현이 아니라는 신학적 논리도 있음을 충분히 인지한다.
이런 모든면을 다 감안하더라도 나는 이 사회문제를 어떤방식으로든 교회에서 이야기하고 기도하며 인게이지(engage) 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아래 이유에서
- 1) 성경은 정의에 대해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강조하고 있고, 예수님도 사회 부조리/부정의를 직접 타파하신바 있다. 관련 설교가 궁금하신 분은 이 링크에 있는 6월7일자, Social justice and the way of Jesus 설교를 추천한다.
- 2) 지금까지 아시안 이민자들은 미국사회의 객체/손님처럼 있었다면 이것은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할 기회이다. 이 포인트를 그대로 드러내는 김영봉 목사님의 이 글 – 모범적 소수인종, 그 부끄러운 이름에 대하여 을 소개한다.
- 3) 우리의 영적 형제자매인 흑인, 더 나아가 백인 들과도 더 연합되고 하나될수 있는 기회이다. 이 링크에 있는 아시아 라이징 단체의 대표 제이슨의 기도를 추천한다. 이 예배도 정말로 강력했다. 교회가 사회를 대표하여 어떻게 화해와 화합을 영적으로 소망하고 기도하고 이뤄갈수 있을지 지금까지의 경험을 소개하고 오늘날의 그 화해와 화합을 예배가운데 추구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2. 무조건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는 크리스천 친구/형제자매들께
사실 많은 크리스천이, 특히나 보수적인 개신교/복음주의 진영에서는 밖으로 적극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을지 몰라도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영적 문제를 “성혁명”으로 보고 있고, 지금의 트럼프와 공화당 정권이 그 혁명에서 사회를 막고 있다는 점에서 공화당과 트럼프에게 거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낸다 (최근에는 트럼프가 워낙에 다양한 부분에서 민심을 잃으면서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도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난 이 견해에 충분히 동감하고, 특히 ‘정의와 사랑’ 이라는 이름의 ‘성 혁명’이, 마치 공산주의가 ‘정의와 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무장해 사회에 파고든 것처럼 공기처럼 사회에 파고들고 있다는 부분에 동감한다. 위에는 이런 역사관/세계관을 누구보다도 꿰뚫고 잘 설명한다고 보는 김성원 대표의 강연이다. 궁금하신 분께는 일독을 권한다.
다만, 이 모든것을 다 고려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트럼프/공화당에 지지를 보내는 크리스천 주위 형제자매 분들께 아래의 내용을 생각해보시라고 권하고 싶고, 같이 고민해보자고 초대하고 싶다. 내가 보는 관점은 이렇다. 지금의 트럼프 정권이 지금까지의 리더십에 대해 좀더 겸허히 부족했던 점을 시인하고, 1사분면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사회에서 촉구하는 ‘인종문제의 정의’를 제대로 세우는 것은 고사하고, ‘성혁명으로부터의 사회 보호라는 정의’또한 지키지 못할지 모른다. 전략/전술 수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교회의 정치참여문제나, 교회가 희망을 세상의 리더십에 두는것이 성경적인가 이런 논쟁은 여기에선 차지한다.)
3. 모든 생명은 소중해 (Alllivesmatters)라며, 이 문제는 인종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께
이런 이야기를 하는 주위분들께, 먼저 인기없는 주장을 꿋꿋이 펼쳐주는 점을 인지하고 박수를 보낸다는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관련된 주장 –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이 인종때문이 아니라는 이 케이든스 오웬스의 비디오 등 – 을 다양한 경로에서 보고 들었음을 알린다.
이런 부분을 다 감안하더라도 이 포인트를 이야기하고 싶다. 모든 생명은 소중해라고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유방암극복을 위한 마라톤을 뛰면서 “모든 암을 극복해야지”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지금은 인종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적기가 아닌가 한다. 인종문제가 정치적으로 활용된다는 문제제기 관련은 다음 포인트에서 이야기한다.
4. BLM나 인종차별 철폐를 촉구하는 움직임을 지지할수 없다. 반성경적이고, 정치화되어 있기에
이 견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내가 동의하는 부분도 많이 있다. BLM을 이야기하는 단체가 반성경적인 다양한 가치관을 지지하고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도 들어서 알고 있다. 2사분면의 정의 추구 (사랑과 화합 추구 없는)는 결코 성경적인 정의 추구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동감한다. 이 움직임이 정치화되어 경찰에 가는 예산을 삭감시키고 하는 모습을 지지하자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좌 성향의 정치세력이 이 움직임과 모멘텀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충분히 인지하고 동감한다.
이 모든것을 다 감안하더라도 아래 포인트를 이야기하고 싶다.
- 1) 교회는 사회의 부조리의 짐을 같이 지고, 대신지는 곳이다. 교회는 사회정의를 위해 싸울 책임 (corporate responsibility for the justice) 을 가지고 있다. 팀 켈러 목사님의 이 글을 추천한다.
- 2)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다. BLM 움직임 또한 교회의 참여와 영향력으로 인도 (Redeem) 되어야 한다.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할때, 이런 움직임은 더욱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심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혼생활 가운데, 수세대에 걸쳐 가계를 따라 전해 내려오는 어두운 과거, 저주와 같은 아픔과 상처의 잔재를 본적이 있는가? 난 보고 경험했다. 우리 가계 가운데 전해온 ‘화’ 라는 상처와 잔재 때문에, 나는 ‘화’라는 감정에 어떻게 대처할지 몰랐다. 그 감정이 상대방에서 보이면 피하거나 굳어버렸기에, 아내가 조금이라도 내게 화를 내면 마음이 차갑게 얼었다. 그리고 그건 아내와의 관계를 차단하는 ‘차가운 화’로 이러졌고, 우리 관계에 많은 악영향을 미쳤다. 문제의 본질을 알고 그걸 온 힘을 다해 같이 싸우고 뿌리까지 뽑아내야지만 온전히 우리 부부관계가 더 하나되고 화합될수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걸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
인종차별 문제는 미국사회에 바로 그런 커다란 말뚝과 같다고 생각한다. 미국 탄생에서부터 함께한, 수세기동안 계승되고 전해지며 박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하늘을 덮은 초미세먼지 처럼 모두의 건강을 좀먹고 있는. 너무나 오래되고 익숙해져서 마치 있는줄도 잘 모르는 그런 공기오염처럼.
정의와 사랑을 같이 추구하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다. 매우 더디게 느껴질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화합과 회복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또는 이들을 대표하는 대표그룹들이) 진심으로 이 문제를 고민하고 애쓰고 자기몫의 정의x사랑을 위해 온힘으로 싸우고 노력할때 이뤄질수 있지 않을까. 이건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이기에, 그리고 우리는 원래 하나되게 지음받은 형제자매이기에.
성경은 정의, 은혜, 자비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특히 정의에 대해). 그리고 우리는 정의회복을 위해 어떻게 싸울것인가. 아래 영상을 모두에게 추천한다. 진심으로 내 몫의 “회복의 정의”를 위해 계속 싸우고 노력하고 싶다.
안녕하세요 백산님 그동안 잘시내셨나요?
이번에 올려주신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표를 이용해서 조지플루이드 사태에 대해 상세하게 잘 써주신것같습니다.
문득 테레사 수녀님의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내가 아픔을 느낄만큼 사랑하면 아픔은 사라지고 더 큰 사랑만이 생겨난다” 내가 사랑하는 이웃, 가족, 주변인 등등… 좀 더 사랑하고 아끼면서 서로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고 스쳐 지나가더라도 따뜻한 말한마디 해주는게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전에 말씀해주신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도 한번 다 읽어봤는데요. 책 내용에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서 인용된 말들이 좀 보이더라구요. GDP 증가율보다 투자로인한 수익률이 더 현대에는 크다. 이건 정말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에 자본의 굴레에서 엄청난 모순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좋은책 추천해주셔서 틈틈히 읽었는데 큰 도움 된것같습니다.
7월 미국도 서서히 여름으로 다가갈텐데, 건강 유의하시구 다음에 또 좋은글 기대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답변이 늦었습니다. 늘 관심가지고 따뜻한 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큰 힘이 됩니다. 네 테레사 수녀님 말씀 정말 공감가네요.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이건 사실 직접 읽어보지도 못하고 추천사만 링크건거라. 저도 언제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 겠네요. 네 크리스천이 할 일이 분명 있을것 같습니다. 네 힘내서 또 글써보고 할게요. ^^
안녕하세요 백산님 일전에도 코멘트 남겼던 (Watchmen for nations) 형제입니다! 가끔 블로그 방문하여 쓰신 글 잘 읽고있습니다. 아직 수험생 신분이라 매번 코멘트를 달지는 못하지만 쓰신 글 읽으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1사분면의 상태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길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살아내는게 늘 어려운 것 같습니다. 백산님도 아시겠지만 한국 중대본에서 발표한 교회 소모임 대책과 관련해서도 참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깨어서 기도해야할 때임이 분명해 보이네요. 백산님도 건강 유의하시고 또 좋은 글 써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네 코멘트 감사드려요. 참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네요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 누리며 기도하고 서로 용기내서 담대하고 강건하게 계속 정진해봐요. 넵 언제든 또 이렇게 교제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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