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장기전

한달에 한번 글쓰기로 다짐하고 세달째다. 부디 계속할수 있기를. 사실 6월달에 내 머리와 가슴에 가득했던 다른 한가지 주제 – 성령 사역 (소위말해 카리스마틱 운동 (Charismatic movement)을 쓸 계획이었는데, 다른 주제가 치고 나왔다. 7월달에 내 머리와 가슴에 가득한 두가지 주제 (정의, 그리고 다음세대) 중 먼저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목차

글이 너무 길다는 피드백을 적극 반영하여 목차를 앞에 소개한다.

  • 들어가며: 지금은 정의의 시대이다
  • 정의 프레이밍 (너의 주장은 부당하므로 그만해)의 세가지 위험
    1. 대화를 종결시켜 공/과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해지고, 건전한 비판/진화를 봉쇄해 결국 타락한다.
    2. 정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나친 단순화는 성급한 판단으로 이어진다.
    3. 소셜미디어/이 시대의 정치/미디어의 속성이 내가 옳다는 확신 (자기만의 버블)에 빠지게 만든다.
  • 어떤 정의추구가 필요한가 – 장기전
    • 1. 끈질긴 소통 노력
    • 2. 관대한 정의 추구
  • 마치며: 어떻게 이런 정의 추구가 가능할수 있을까

들어가며: 내 생각은 정의롭다, 이시대를 도배하는 메세지들

정의를 원하는 신음이, 외침이, 한국 미국 할 것 없이 그 어느때보다 가득함을 느낀다. 소셜 미디어에는 온통 무엇이 맞는지에 대한 주장과 내용이다. 저마다 특정 주제에 대한 글이나, 말들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인다. 정의 (“Justice”)… 정의란 정말 무엇인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자살소식을 듣고 충격을 금할수 없었다. 내 눈을 의심했다. 안그래도 서로 내가 옳다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다 “불의”한 나의 적이라고 여기고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가 가중되고 있는 와중에, 이런 사건은 더 진영간 갈등과 혐오와 불신과 싸움만 키우지 않을까. 사회의 아픔이 더 커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 이런 글을 썼다.

마음이 많이 무겁고 아프다. 사회에 비극이 너무 많다. 이땅의 눈물과 혼란과 아픔이 들리는것 같다. 무슨 토시 하나 잘못 쓰면 누군가를 offend 할까봐 살얼음을 걷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 부합하지 않으면, 또는 나와 생각이 다르면, 비하하고 욕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해버리는게, 그런 글들, 말들, 생각들, heart를 보는게 일상이고 당연한게 되어 버렸다. 그런 문화와 세상 가운데 우리 모두 젖어들며 살고 있는게 아닐까. This is overwhelming…this is so sad…

아니나 다를까, 진보와 보수란 프레임 위에 남과 여 라는 프레임이 더해진 이번사건을 계기로 인터넷은 한층 더 뜨거워졌다. 박원순을 조금이라도 두둔하는 쪽은 정의롭지 못하다. 박원순의 공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쪽은 정의롭지 못하고 불순한 의도가 있다. 뭐 이런 류의 글들이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도배했다.

“당신의 생각은 정의롭지 못해” 란 말 안에 감추어진 위험

“당신의 생각은 정의롭지 못해” 라고 한마디로 압축하며 상대방의 생각/주장은 부당하므로 침묵하라는 것, 이것을 이하 “정의 프레이밍”이라고 정의하고, 이 정의 프레이밍이 위험한 이유 세가지를 아래 살펴본다.

1. 대화를 종결키시고 건전한 비판을 가로막아 정체/부패로 나

“정의 프레이밍”은 대화를 종결시키고, 상대방, 즉 불의의 세력을 즉각적으로 없애는데 모든 힘을 집중시키기에, 건전한 비판을 가로막아 엄청난 부작용을 야기할수 있다.

팀 켈러는 그의저서 “정의란 무엇인가 (Generous Justice)“에서 다음의 일화를 소개한다. 비영리단체 직원끼리 누가 기관을 대표해 중요한 집회에 참가할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한 진영에서는 연공서열이 가장 높은 여직원이, 다른 진영에서는 연공서열은 낮지만 대중앞에서 발표하는게 탁월한 젊은 직원이 나가야 한다고 격론이 벌어졌다. 격론 과정에서 점점 감정이 격해지다가 한 사람이 이렇게 소리질렀다.

“미안하지만, 이건 정의의 문제라고 (Sorry but this is the matter of Justice)”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고참 여직원을 보내는 쪽으로 정리가 됐다. 상대 진영은 강압적 분위기에 밀려 주장을 꺾었다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정의의 문제”라는 프레이밍이 일종의 핵폭탄처럼 논쟁을 종결시켰기 때문이다. 이 프레이밍에서 계속 주장하면 “불의”한 사람이 되는데 누가 그런 오명을 뒤집어 쓰겠는가.

하지만 이런식의 의사결정은 커다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서로의 다른 생각을 오픈해서 토론하며 의견을 좁혀가거나 건설적인 대화를 하지 못하게 하고, 상대방에게 “불의”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상황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정의 프레이밍으로 상대를 공격하기 시작하면 서로의 생각을 듣고 나누기 매우 어려워지며, 사회는 더 분열되고, 갈수록 대화는 종결되고 싸움과 불신, 반목, 혐오만 커져갈 수 있다. 그리고 이 프레이밍은 당장 주장을 관철시키는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상대방에게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심었고, 또 보다 나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 봉쇄시킬 수 있다. 이것이 더 나아가면 건전한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거의 필연적으로 (역사가 증명하듯이) 내부정체->타락으로 이어질수 있다.

공과 과에 대하여 한번 이야기해보자. 역사의 공과 과를 최대한 다각도로 균형적으로 봤을때 우리는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보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지혜와 반면교사를 역사에서 얻을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 프레이밍으로 대화를 종결시키면 공과 과를 균형있게 보는것이 불가능해진다. 박원순의 삶에는 분명히 공도 있고 과도 있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렇듯이). 공과 과 의 경중에 대해선 의견 차이가 있을수 있으나, 그의 삶과 궤적에 대해 한마디로 단정하고 다른 생각을 원천적으로 용납하지 않는 것은 위에 말했듯이 위험하다. 박원순을 무조건적으로 우상시 하면서 “박정희는 성상납을 받고 독재를 했으며 친일경력도 있는 역사의 오명”이다 라고 하는 사람이나, 박정희를 무조건적으로 우상시 하면서 “박원순은 위선자에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한국진보의 민낯이다” 라고 단정하는 사람이나, 어찌 보면 비슷한 사고프레임으로 주장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2. “정의” 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정의 프레이밍이 위험한 또다른 이유는 “정의”라는 개념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의 판단은 본질적으로 신념과 가치판단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내게는 너무나 직관적이고 명백한 정의/옳음이 상대방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왜 이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지 어떤 부분에 대한 가치판단을 서로가 다르게 하고 있는지 감정을 배제하고 명백하게 이해하는 데까지 가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정의 프레이밍이 남용될 경우 이런 노력 자체가 원천봉쇄될 수 있다.

“자유”란 개념을 예로 들어보자. 예를 들어 “인터넷 음란물”에 대해서 아주 엄격한 규정을 들어 불법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며 부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일견 일리있는 생각으로 들릴 수 있다. 누구도 야한책/영화를 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제각기 자발적으로 소비하고 즐길 뿐이다. “그런 사사로운 행동이 누구에게 해가 되나요? 오히려 사회의 범죄를 줄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라는 논리를 필 수 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음란물제작을 제한하는게 불의가 된다.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사회학적으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관점이라는 주장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사사로이 하는 행동에 따라 우리의 성품/가치 (character)가 형성되고, 이는 결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다 음란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허용되고 일어날 사회현상과,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곳에서 허용되고 일어나는 사회현상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합의할수 있는 법률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성범죄 형량기준이 국가간에 큰 차이가 나는것처럼).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음란물을 구입하면 자연스럽게 그 시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음란물을 절대 노출시키지 않고 싶은 시민들의 자녀들도 이 시장이 커질수록 음란물에 노출될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나의 사사로운 행동은 절대 결코 ‘사사로울’수 만은 없으며 상대방이 전혀 원하지 않는 환경에서 살도록 간접적으로 강요하는 결과를 낳을수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 ‘자유’라고 생각하는 상황이 한편에서는 ‘자유’가 아닌 ‘부담’이 되는 셈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3. 소셜미디어/개인화된 추천 알고리즘/자극적인 미디어와 정치진영이 내 생각을 고착시킨다.

정의 프레이밍이 어려운 세번째 이유는 소셜미디어와 정치/미디어의 속성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는 내가 라이크하고 좋아하는 사람/시각을 계속 추천하고 그 사고방식을 더 강화시켜준다. 자연스레 내가 정의의 편에 있고 상대방은 불의하며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시각이 강화되고 굳건해 질 수 밖게 없다.

이런 프레이밍 (상대방은 불의해)을 완전히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상대방의 의도가 지극히 불온하고 그 접근이 악의적이라는 증거를 확보했을 때이다. 이런 증거가 생기는 순간 상대방 진영이 불순한 의도와 불공정하고 악의적인 전술/접근으로 싸움에 접근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더 알고 상대방의 그런 부분에 속지 말고 확실하게 박멸해야 한다는 집단논리가 바로 모든걸 뒤덮는다. 그리고 더 강한 주장을 펼치고 통쾌하게 상대를 비판할수록 주목받는 정치권이나 미디어의 속성상 이런 주장 (상대방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으며 상대방이 반칙을 하고 있다)은 단연코 가장 인기있는 주제 중 하나이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차분하게 논리를 피며 다양한 생각을 아우르는 이야기 보다, 자극적인 프레이밍이 훨씬 더 많은 Like 버튼과 클릭을 유발하기에. 조선일보/재벌/기득권/적폐세력이 본인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모든걸 힘으로 찍어누르려 하고 부당하게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프레이밍과, 종북좌파세력이 좌파정치인들을 진두지휘하고 있고 국가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자는 위험한 사상과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프레이밍이 대표적이다. 미국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진영은 바이든이 치매라며, 위선자라며 다양한공격을 서슴지 않고, 바이든은 트럼프가 상종못할 인격파탄자이며 얼마나 부정과 비리로 얼룩져 있는지 집요하게 파해친다. 한번 이 프레이밍이 박히면 도저히 빠져나오기 어렵게 곤고해지는것을 많이 접한다.

나는 여기서 이런식의 사고에 아무런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 상대방 진영이 공정한 게임룰에 따라서 신사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찾을수 있다. 불순한 의도가 있는 세력이 배후에 있고 결탁이 있다는 것도 얼마든지 찾을수 있으리라.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설사 그런 증거들이 있다고 하더라고 모든 것을 하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앞서 이야기한 대화종결을 낳고 사회 분열을 낳는 지름길이다. 소셜미디어와 이를 둘러싼 정치/미디어로 이런 사고는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떤 정의추구가 필요한가? 장기전이 필요하다

이쯤와서 이렇게 질문할지 모른다. 정의를 이야기하지 말자는 거냐? 불의를 참자는 거냐?

정의를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이 전혀 아니다. 정의는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모두는 가슴깊숙히 정의를 갈망한다. 불의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자신이 불의의 피해자였을때 얼마나 아프고 분노했는지 되새겨 보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명제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위에 언급한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경계하며 신중하고 지혜롭게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정의를 추구해야 할까? 크게 두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1. 끈질긴 소통: 찬찬히 서로의 주장을 끝까지 듣고 토론하고 결과에 승복한다.

마이클 샌덜스의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준다

위 영상을 보면 정의가 얼마나 다양한 버전을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무엇이 옳다고 믿는지는 위에도 설명했듯이 가치판단이 들어가고, 따라서 서로 다른 가치를 전제로 하고 이야기하고 있으면 이야기가 겉돌수밖에 없다. 공리주의 관점에서 더 파이를 키우는게 옳다고 믿는 측과, 개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며 가장 낮은 환경에 있는 사람의 삶의 수준을 올리는것이 급선무라고 믿는 진영이 주장하는 정책과 지지하는 정당은 다를수 밖에 없다. 상호 비방하고 상호를 불의라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개별 사항에 대해서 왜 이것이 더 필요한지 자세히 설명하고 대화하며 소통하는 것, 그리고 결과에 승복하고 그 과정을 더욱 공정하게 가다듬으며 반복해 가는것이 성숙한 사회로 가는 길이다.

매우 민감한 쉽지않은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최근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있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차별금지법이 동성애 반대 처벌이 아니라는 JTBC의 보도

위 영상을 보면 도대체 상식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정도의 차별금지에 반대하는게 어떻게 가능하지 반문하게 된다. 고용/행정서비스/재화 등 공급이용, 교육훈련과 같은 기본적인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삶의 영역에서 조차 차별금지를 원칙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런 주장을 믿는 당신들이 믿는 정의는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이 바로 나온다. 동성애 반대를 무조건 외치고, 동성애=에이즈 등의 프레임을 가져오는 말안통하는 꼰대/위선/이기적인 교회의 모습과 이미지가 바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개인의 종교적신념을 바탕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으니 무조건 이런법은 안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에 대한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 헌법재판관이 말하는 차별금지법의 부작용/위험

위 영상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의견 중 내가본 가장 설득력이 있는 의견이었다. 전 헌법재판관은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포괄적”으로 성 정체성과 같은 “내적자아”와 연결되는 영역을 차별금지하고 있기에, 얼마든지 명예회손 등의 이유로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인 부작용 등을 언급하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수 있다는 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이런 영역은 포괄적으로 규제할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어떤 부분까지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허용하지 않을 것인지 충분한 담론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인종차별에 대해선 인종간 근원적인 차이가 있다라고 이야기하는것 자체가 포괄적으로 금지할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지만, 성정체성에 대해선 이성애자와 동성애 또는 성소수자간 근원적인 차이가 있다 (예: 성소수자의 성 정체성은 정상이 아니다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금지할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분명 법은 포괄적 규정 외에 구체적인 영역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행정서비스 이용 등) 입증차별이 차별당사자에 있고, 모호한 부분에서 명예훼손 등으로 얼마든지 고소할 법적 근거가 생기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모호한 부분에서 계속하여 표현의 자유 자체가 제한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독립적으로 헌법에 있는 근본법리 위에 포괄적인 법을 제정하기 보다는, 개별법 – “동성애/성소수자 차별금지법”과 같은 법을 제정하는 것이 법치적으로 합리적이란 주장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포괄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자유를 규정하는 포괄적 자유법 입법을 누군가 입법한다면 이런 법은 불필요하며 부작용을 낳을수 있다는 것이다. 상당히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금 미국에서 나오는 페이스북, 트위터, 유투브 등에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단체의 발언권을 보장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와도 연결된다. 인종간의 근본적 차이를 이야기하는 단체는 사회에서 발언권을 박탈하는게 “정의”로 사회에서 합의해가는 것처럼, 성정체성간의 근본적 차이를 이야기하는 단체의 발언권을 박탈하는게 “정의”가 될 수 있느냐 라고 반대한 진영에서는 문제제기를 한다.

다만 여전히 반대진영의 논리는 다듬어지지 않았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한다. 위의 영상의 예를 들자면 마지막에 종교적 신념에 의거한 주장과 같은 부분을 더 줄이고, 과거 타 입법례나 해외사례 등을 들어서 어떤 부분에서 명예회손주장이 있을수 있고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는지 더 설명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강단과 소셜미디어 등에서 표현의 자유가 박탈당할수 있다는 주장도 실제 법에선 그렇게 규정하고 있지 않기에 더 구체적인 개연성 설명이 필요하다. 또 “표현의 자유” vs “차별받고 있는 인권보호”의 구도에선 인권보호가 더 중요하고 우선시 된다고 상식적으로 여겨지기에, 표현의 자유침해가 결국 어떤 사회적인 손실로 이어질 수 있는지 납득할만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번에 밀리면 결국은 미국처럼 남녀기숙사도 없어지고 초등학교에서부터 게이/레즈비언이 자연스럽다고 가르치고 사회는 더 성적으로 타락할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또하나, 그렇다면 반대진영에서 대안을 제시하는것도 좋은 (성숙한) 커뮤니케이션 중 하나리라. 이런 법을 제정하자. 이런 방법으로 성소수자/동성애자들이 사회에서 입을수 있는 부당한 차별을 보호하자 라는 대안 제시가 아쉽다.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장혜영 의원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주는 메세지

결국 이 논의는 당장 성소수자가 성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고 있는 부분을 시정해야 할 “정의”와, 이를 포괄적 입법을 통해 시정할 경우 침해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보호해야 할 “정의”의 다툼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근본에는 신념/가치판단의 차이가 근간에 에 있다. 이 법을 입법한 장혜영 의원은 분명하게 성 정체성의 문제를 개인의 자기다움에 대한 문제로 보기에, 개인의 성정체성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그것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는 것은 개인에 대한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믿는다. (즉, 인종, 여성, 장애인 등의 문제와 동일하다). 이에 반하여 개인의 성정체성은 주관적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내적자아의 영역으로서 성소수자의 성정체성이 정상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 (즉, 인종, 여성과 본질적으로 같은 영역이 아니다)에서 법적으로 어디까지 합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시각이 다를수 밖에 없다. 이런 신념으로 계속 대화하고 상대방을 불의하다고 몰고가면 대화가 겉돌고 소통이 불가능하다. 본인의 가치와 신념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되 그걸바탕으로 사회가, 사회구성원들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구체적으로 (수치화, 과거 사례 등) 소통을 시도해야한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 자유와 평등의 갈등도 마찬가지이다.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고 똑같은 룰을 모두에게 제공하는 것 (기회의 평등)도 정의이고, 과거에 압제당한 약자가 다시 일어설수 있도록 불균형한 추를 바로잡는 것 (실질적 또는 결과적 평등)도 정의이다. 상대의 주장은 정의가 아니니 주장을 그만하라는 공격, 상대는 불순한 의도가 있고 반칙을 한다는 공격 보다는 공개적인 장에서 충분한 담론을 거칠수 있도록 하는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성숙한 사회로 가는 길이다. 무조건적인 실력저지나, 특정 신념 (예: 위의 예의 경우 성은 주어진것으로 바꿔서는 안된다는 교회의 종교적 신념이나 성은 자기표현의 문제라는) 에 의거해 상대방의 입장을 비방하거나 혐오하는 태도는 지양하고 사라져야 한다. 위의 법의 예를 들자면 이러한 서로 다른 가치판단과, 그에 따라서 침해될 정의에 대한 양형 (크고작음)을 수치화하고 토론하는 과정 없이 이 법이 어느쪽의 실력통과 (찬성진영) 또는 실력저지 (반대진영)으로 끝날경우, 건강한 토론/소통을 통해 진화할 수 있는 사회의 근육은 퇴화하게 된다 (그리고 위에 이야기했듯 분열, 정체, 쇠퇴로 이어질수 있다) 우리는 끈질기게, 참을성 있게 정의를 주장하며 무엇이 우리사회에 더 필요한 정의/공의인지에 대해 건강한 ‘싸움’을 해야 한다. 건강한 소통을 해야 한다. 마치 부부관계에서도 잘 싸우고 잘 소통하는 것이 건강한 부부관계로 가는 지름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회에서 건강한 소통이 안될경우 계속 곪아갈 수 밖에 없다.

이는 필연적으로 장기전이다. 어떨때는 양보할때도 있고 어떨때는 진보가 더디거나, 억울하게 졌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끈질긴 소통의 노력이 없다면 정-반-합으로 나가는 사회의 건전한 진화는 불가능하다. 이 글 맨 말미에 코로나를 맞아 불거진 등록금 반환 논쟁 (관련기사)에 대한 한 교수님 (내가 잘 아는 형)이 남긴 글이다. 이런 담론이 너무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관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앞선글에서 소개한 정의 x 사랑의 2×2 메트릭스 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대한 정의는 1사분면의 정의를 이야기한다. 더 궁금하신 분은 앞선 글을 참고하시길.

정의’ 는, 그 단어와 그 생각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정의가 아닌 세력을 다 태워 없애기 전까지 정의는 온전히 정의가 될수 없다. 이런 칼을 휘두를 경우 많은 경우 우리는 2사분면 – 복수와 심판의 칼날을 휘두르게 된다. 이때 우리의 목표는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고, 나는 정의의 편에 선 정의의 사도가 된다. 스스로가 정의의 편에 섰다는 생각은 자기의 (Self righteousness)로 이어지게 되고, 위에서 언급한 정의프레이밍의 다양한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관대함 (자기반성, 성찰, 상대방에 대한 이해/관대함, 용서 등, 위 표에선 사랑/연합에 대한 추구로 표현된 X축)이 필요한 이유이다.

관대함이 없는 정의의 무서움은 상대를 가리지 않을수도 있다. 즉, 심지어는 정의를 주장하는 그 세력도 자칫 잘못하면 본인이 주장하고 사용하던 정의란 칼에 다칠 수 있다. 이 글 서두에 언급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자살이 대표적인 예일수 있겠다. 박원순이란, 평생 정의를 부르짖고 약자를 생각하고 그 편에서 그들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하던 한 삶의 생명을 이렇게 앗아간 것도, 그가 그토록 쫓고 또 사용하던 정의란 칼이 아닐까… 내가 그 정의와 어긋났을때 나또한 베어 없앨수 있는게 관대함이 없는 정의일 것이다. 내가 나 스스로를 도저히 용서하거나 납득할수 없을때 극단적인 선택이 이 자기분열을 없앨수 있는 선택지로 들어올 수 있다.

관대한 정의추구는 “가해자 감정이입”과는 다르다. 두가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 솜방망이 응보로 이어지는 가해자 감정이입에는 정의가 없다. 위의 축 중 4사분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가해자에겐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필요하다. 관대한 정의도 ‘정의’이다. 불의를 그냥 넘어가서는 정의가 될 수 없다. 부부싸움을 예로 들어보겠다. 남편이 아내에게 언어폭력을 행했다고 가정하자. 2사분면은 아내가 남편에게 그에 상응하는 폭력을 가하며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거나 관계를 절단해버리는 것이다. 3사분면, 또는 가해자 감정이입은, 남편입장에 감정이입하거나, 그런 묵언의 압박 때문에 참고 사는 것이다. 1사분면의 관대한 정의 추구는 절대 불의를 그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아내는 남편눈을 똑바로 보고 그 불의가, 그 폭력이 얼마나 자신과 관계를 상처입히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절대로 이 불의를 그냥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남편에게 반성하고 뉘우치고 자기 잘못을 보응/보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는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먼저 뉘우치고 눈물로 회개하며 용서를 빌때 이런 관대한 정의추구가 일어난다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비는것이 마땅하다). 때로는 이런 방식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관대함’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사치이거나 불가능할 때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한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이런 방법은 상생과 화합, 힐링을 가져오는 유익이 있다.

둘째, 관대한 정의추구에서의 ‘관대함’은 불의를 행하는 (좀더 엄밀히 말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불의를 행한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가치에의 지향에서 나온다. 여기서 더 큰 가치는 “상생”을 향한 믿음, “화합”을 향한 믿음, 인류 안에 양심과 기본적인 정의에 대한 공감대가 있을것이라는 믿음 등과 연결되어 있다. 마틴루터킹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마틴루터킹이 비폭력이란 방식을 선택한 것은 그가 폭력을 동원할 힘이나 방법을 몰라서도, 불의 (인종차별정책, 차별주의자)에 감정이입을 해서도 아니다. 그는 더 큰 가치를 믿었고 품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당장 테러를 하고 맞폭력을 행사하고 그런방식이 아니라, 본인이 암살당할때까지 상대방의 가슴에 호소했다. 그의 그 유명한 설교 I have a dream은 그의 가치를 잘 보여준다. 이런 가치가 있었기에 관대한 정의추구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 정의 추구또한 필연적으로 장기전이다. 당장 상대를 제압하고 없애버리는 2사분면의 접근에 비해 약하고 더디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정의와 관대함이 함께할때 사회가 얻게되는 유익은 그 반대를 훨씬 상회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반성, 성찰, 상대방에 대한 관용, 용서 등을 바탕으로 정의를 추구할때, 그 당사자는 자기의에 빠지는 대신 더 겸손하고 더 예의바르고 더 절제될 수 있다. 테레사 수녀 등이 삶으로 보여준 모습, 자신의 삶과 신념이 일치하고, 그 신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당당하지만 결코 자기의에 빠지지 않는 그런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정의가 있을때, 마틴루터킹, 넬슨만델라, 간디 등이 보여줬듯이 사회에 화합이 일어나고 모든 구성원이 한차원 더 진화하게 된다. 당장 폭력이나 실력 행사로 상대를 제압하며 자신의 정취를 쟁취한 방법이 아닌, 지속적으로 상생의 희망을 잃지 않고 관대한 정의추구 (비폭력, 대화시도 등으로) 가 있었을때, 사회는 결국 반성과 치유, 화합,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명백한 불의를 대상으로 했을 때에도 (인종차별, 식민지배 등) 이런 결과가 일어났다. 다양한 이해당사자간 서로다른 ‘정의’에 대한 가치판단에 따른 복합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민주주의/다원주의 사회에서는, 관대한 정의추구를 통한 사회의 진화/화합 (reconciliation) 이 더욱더 필요하고 더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매우 길게 느껴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빨리 가는 길이라도 생각한다. 때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정의에 의한 심판이 (2차대전 이후 수많은 식민지에서 수탈세력과 결탁한 지배계급을 숙청하고 만인이 평등한 사회주의 사회로 간 것, 문화혁명, 기독교 정의론에 의한 십자군 전쟁 등) 얼마나 사회를 후퇴시켰는지 보면 충분히 이런 예를 찾을수 있으리라.

마치며: 어떻게 이런 정의 추구가 가능할까?

이런 질문을 할 지 모른다. 끈질긴 소통? 관대한 정의? 난 그런 한가한 정의타령 할할 시간도 에너지도 없다. 상황이 얼마나 불의한지 봐라. 웰컴투 비디오의 손정우가 1년6개월형 살고 나오는 상태고 성추행 현행범 안희정이 여전히 엄청난 건재를 과시하며 피해자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세상이고 친일파의 후손과 과거의 적폐 세력이 여전히 부동산 수십채씩 돌리며 서민의 등골을 빨아먹고 있을때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오냐.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충분히 일리있는 지적이다. 실제로 불의에 고통당한 기억을 상기해 보면, 참을성있는 끈질긴 소통이나 관대함 (성찰, 용서, 관대함 등) 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정의는 보상이 필요하다. 값을 치뤄야 한다. 빚이 탕감되려면 누군가는 보상을 해야한다. 300년동안 갖은 압제로 인종차별이 있었다면 추를 바로잡는 법적인 노력과 함께 진정어린 사과와 용서를 비는 과정이 필요하다. 여성이 수십년 또는 수세기 동안 (아니, 역사 내내) 성적으로 유린되고 착취되어 왔다면, 이를 바로잡는 법적인 노력과 함께 진정어린 사과와 용서를 비는 과정이 필요하다. 분노와 상처를 녹일수 있는 희생이, 약자의 편에서 같이 공감하고 아파하며 용서를 비는 눈물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없이 참을성과 관대함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가능”하다.

하지만 양보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추가 온전히 바로잡아지는 것 – 모두가 보기에 온전히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 – 를 달성하기 어렵다는게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도 없다. 당장 눈에띄게 기울여진 추를 조금만 다잡으려 해도 수많은 반대에 부딪히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격한다. 그래서 상대방의 추를 짤라 없애버리고 내것만 남겨놓고 싶은 유혹에 휩쌓일 때가 너무나 많다. 추는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다고 느껴지고 신뢰가 바닥일때, 우리 사회는 분열과 극단적인 선택으로 간다. 이래선 장기전을 할 수 없다. 장기전을 하려면 체력과 기본적인 신뢰가 필요하다. 일단 이게 1회성 게임이 아니라는것만 서로 공유되기 시작하면 변화가 일어난다. 이번에 밀리면 무조건 죽는다가 아니라, 우리는 오래 서로볼 사이 라는 암묵적 프레임이 형성되면, 내쉬균형이 1회 게임일때와 무한게임일때 완전히 달라지듯이 (링크참고), 우리 사회는 정-반-합의 진화와 상생을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희망한다.

그래서 우리사회에는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추를 바로잡기 위해 값을 치룰 용기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더 많은 눈물과 사과가 필요하다. 장기전을 할 수 있도록, 서로 꽁꽁 얼어있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녹아내릴 수 있도록. 평생 갈것 같은 얼음왕국에 언젠가 봄이 올수도 있다는 희망의 빛을 비춰주기만 하면 변화가 생길수 있다. 마중물이 필요하다. 자신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관여되었던 “불의”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관여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불의에 뛰어들어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희생하며 값을 치르는 노력 (이글 마지막 부분 참고) 언젠가 이것에 대해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당장 이 주제에 대해 더 궁금하신 모든분들께 팀 켈러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Generous Justice)” 를 자신있게 추천한다. 아래 추천사 참고

진보와 보수, 빈과 부,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등은 진정 대립하고 갈등해야만 하는가. 교회와 사회, 성경과 삶, 영성과 사회참여,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신앙과 신학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나날이 심화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양극화의 틇 안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정의에 대한 신앙적 통찰과 선교적 실천 단초를 제공함으로써 신앙의 정체성과 사회적 책무를 함께 수행하는 길을 제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어, 아주 미약하지만, 나의 시간을 이 추를 바로잡는데 할애할 것을 약속한다. 부끄럽게도 난 내 삶을 살아가고 앞으로 나가는데 몰입하느라 사회의 약자나 소외된 계층을 적극적으로 돌아본 적도 별로 없고, 그들이 당하는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 대변하는 정의를 추구한 경험은 더더군다나 없다.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바꿔보고 싶다. 매우 부족하고 미약하지만 1주일에 한시간을 이 추를 바로잡는데 쓰고 싶다.

시간 공짜로 사기 (대화 신청하기)

토요일 저녁 한국시간 10-11시 pm에 저와 대화하고 싶으신 분, 제가 도움될 부분이 있으신 분은 누구나 이 링크를 통해 내용을 남겨주세요. 제가 연락드려서 시간 잡고 저의 시간과 제가 가진 부족한 것들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부록: 코로나 시대에 등록금 반환 요구에 대한 정-반-합 아이디어

<초짜 교수의 아이디어 하나: 등록금 반환에 관한 생각>

– 이 아이디어는 모든 학과에 적용될 수 없으며, 모든 학교에 적용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가능한 한 많은 학교 및 학과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방안을 고려해보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적어본 글입니다.

코로나 이후로 많은 산업이 어렵다. 기존에 주고받던 가치들이 언택트 상황에서는 100% 전달되지 않는 산업들이 더더욱 코로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중에서도 코로나 시대의 대학교육은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핵심 논쟁은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일부 반환해야 하는 가에 관한 것이다. 등록금을 반환해야 한다는 학생측 의견의 논거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온라인 강의의 질이 오프라인 강의의 질에 비해 떨어진다.

– 학교의 시설들을 이용하지 못하였다.

둘 다 맞는 얘기이다. 등록금을 반환하기 어렵다는 학교측 의견의 논거 역시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교수들은 온라인 강의를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더 많은 준비를 하였고 더 큰 노력을 하였다.

– 기존 학교 시설비는 거의 유지되며, 온라인 수업을 위한 시설투자가 크게 이루어졌다 (비대면 강의를 위한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투자). 즉, 온라인 수업 시설 역시 학교 시설이다. (기존 학교 시설을 사용하지 않음에 따라 줄일 수 있는 비용은 사용하지 않은 시설에 대한 관리 및 청소 용역 비용 정도일 것이다. 현 코로나 사태에서 그들을 희생시키는 게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비용절감을 통해 학생들에게 반환할 수 있는 비용은 얼마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역시 둘 다 맞는 얘기이다. 코로나로 인해 최적의 교육방법이 막혔기에 차선의 교육방법이 선택됨에 따라서 학생들 입장에서는 교육의 질이 떨어졌지만, 학교 입장에서는 (일반인들은 믿기가 쉽지 않겠지만) 비용증가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번 학기는 학생도 학교도 모두 코로나 사태에서 피해를 본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등록금 반환에 대한 논쟁이 지금처럼 평행선을 걷고 있다고 본다.

이 평행선을 그냥 유지하며, 서로의 입장만 되풀이하며 감정싸움만 할 것인가? 기존의 관습을 깨고 온라인 교육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다면, 양 진영이 어느 정도의 타협점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에 관련하여 초짜 교수의 엉뚱한 생각을 한번 적어보고자 한다. 이 아이디어의 전제는 다음과 같다 (틀릴 수도 있는 전제이다. 학교 행정을 해 본 적이 없으므로)

1. 학교에서 가변비용의 가장 큰 부분은 교수 월급이다.

2. 교수의 역할은 크게 교육, 연구, 그리고 학사 행정으로 나뉜다.

그렇다면, 교수의 월급을 줄여야 학교의 비용을 절감하여 등록금을 조금이나마 낮출 수 있다. 그렇다고 오프라인 수업 때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교수들에게 갑자기 월급을 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들의 수업을 줄이면서 학생들의 온라인 수업 질을 높일 수 있다면?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비용의 절감을 통해 등록금도 일정 부분이나마 반환할 수 있고, 학생들은 수업의 질이 높아진다면, 등록금 반환의 요구도 적어질 것이다.

약간의 발칙한 상상력이 더해진다면, 대학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대학/학과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일부 대학/학과만 가능한 방법이다. 다만, 이러한 발칙한 상상을 해봄으로써 무언가 실타래를 풀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적어본다).오프라인 수업에서는 보통 교수 대 학생 수가 중요한 지표 역할을 한다. 이는 교수와 학생들 간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학생들 간의 토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지적 능력이 한 강의 학생 수에 따라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 경영대의 전공 필수 과목들의 경우, 한 학기에 같은 제목을 가진 수업이 6~7명의 다른 교수에 의해서 가르쳐지는 경우가 많다.하지만 온라인 수업에서는 이와 같은 교수 대 학생 수의 제약이 거의 사라질 수가 있다. 어차피 학생들 간의 토론은 어려워지며, 교수도 학생들과 토론을 하기 보다는 학생들의 질문에 답해주는 수준에서의 한정된 Interaction만이 가능하다 (다만, 학생들이 질문을 하기에는 온라인 환경이 훨씬 더 좋다. 대화창에 자기가 원하는 질문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아무 때나 질문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제약이 사라진다는 전제라면, 굳이 강의 당 학생 수를 50명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을까? 7명 중에서 수업에 대한 열정이 있고 강의를 잘하는 분들 1~2명이 대형 온라인 수업을 도맡고 수업보다는 연구에 집중하고 싶은 분들은 (저는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 수업에 해당하는 만큼의 연봉을 반납하면 어떨까? (물론 오프라인 강의가 가능해지면, 다시 원상태로 복구해야 한다. 그게 현재까지는 최적의 교육 방법으로 생각되니 말이다).

교수의 역할은 강의를 통한 지식의 분배만큼 중요한 부분이 연구를 통한 지식의 창출이다. 연구 성과를 더 중시하며 수업에 열정이 덜 있는 교수님들 입장에서는 수업 및 준비 시간을 아껴서 연구에 집중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될 것이며, 학생들 입장에서는 더 열정이 있고 수업을 잘 하시는 분의 수업을 들을 수 있으니 교육의 질은 더 올라갈 것이다. 수업을 맡은 교수님들 입장에서는 시험 및 채점 부분에서 좀 더 시간과 노력을 들이실 수 있으나 수업을 안 맡으시는 조교(Teaching Assistant)의 도움까지 받는 다면, 50명 강의를 할 때에 비해 큰 추가 노력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게 가능하다면, 수업을 맡지 않은 교수님들의 수업료 일부 반납분을 학생들 등록금 반환에 사용할 수 있음과 동시에 학생들 입장에서는 교육의 질이 더 높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많은 가정을 기반으로 한 발칙한 상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가능한 학교/학과는 학생수가 많고 교수당 학생수가 적었을 경우로만 제한된다. 다만, 무의미한 소비적인 논쟁만을 지속하기 보다는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방법을 찾아보면, 완벽하진 않아도 차선의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글을 적어본다.

About sanbaek

늦깍이 크리스천 (follower of Jesus), 우렁각시 민경이 남편, 하루하율하임이 아빠, 둘째 아들, 새누리교회 성도, 한국에서 30년 살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거주중, 스타트업 업계 종사중. 좋아하는 것 - 부부싸움한것 나누기, 하루하율이민경이랑 놀기, 일벌리기 (바람잡기), 독서, 글쓰기, 운동, 여행 예배/기도/찬양, 그리고 가끔씩 춤추기. 만트라 -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5 comments

  1.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응원합니다^^

  2. CS

    이번만큼은 정말 탁상공론이네요. 그냥 여허 TA에 나눠서 수백명 퀴즈 중간 기말시험 채점하고 참여점수며 발표점수며 채점 다 하라는 건지요? 그냥 값싼 노동력 활용하자는 이야기일 뿐.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있는 피드백도, 공정하고 세세한 평가도 제공 불가한 단순한 인터넷강의와 무엇이 다릅니까.

    • 그렇게보시는군요. 생각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죠. 여기까지 와서 읽고 답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1) 한국의 교육분야는 제가 가장 잘 아는 분야가 아니고 2) 이 글의 핵심 논지도 이 예에 있지는 않습니다. 뭔가 CS님을 불편하게 만드는 포인트가 있는것 같은데, 조금더 나눠주시면 저도 더 생각해서 답변을 드릴수도 있을것 같아요. 궁금한것은 1. 제 전체 글에 뭔가 불편하신게 있으셨던 건지 2. 아니면 마지막에 들은 예가 특히 불편했던 건지 3. 그렇다면 혹시 CS님이 생각하신느 솔루션이 있으신지요.

  3. Pingback: 우리는 더불어 살 수 있을까 | San's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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