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글은 지난 글 – 우리는 더불어 살 수 있을까 – 에 이은 정치 관련 이야기이다. 이번에는 기필고 좀 비그리스도인도 접하기 쉬운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가슴에서 우선순위가 계속 밀린다. 다음번엔 그동안 계속 미뤄왔던 “한국의 스타트업은 강하다” 는 글을 꼭 써봐야지. 미국 대선에서 더욱 불거진 사회의 분열과, 교회/크리스천의 분열, 그리고 앞으로 우리앞에 펼쳐질 시대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것이 목구멍까지 올라와서 이렇게 나눈다. 워낙 민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 하다보니 많은 이들을 불편 (offend)하게 만들수 있으리라. 부디 너그럽고 관용적인 이해와 적극적인 관심을 부탁드리고 소망한다. 얼마든지 나와 생각이 다를수 있으리라. 답글 남겨주시면 겸허히 들여다 보고 또 고민해 보겠다.
이 글의 첫번째 독자는 크리스천이고, 두번째 독자는 정치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고, 세번째 독자는 이시대를 사는 한국인 모두이다. 내 가족과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써봤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모두에게 진정한 정의와 평화, 사랑을 가져다줄 진리되신 예수그리스도의 도가 임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이하 아래 네가지 큰 목차로 전하고 싶은 메세지를 적는다.
- 미국대선이 드러낸 사회의 분열
- 어떻게 미국의 교회는 정치화되고 정치적으로 패배했는지
- 영적 겨울이 오고 있다
- 이에 대처하는 크리스천과 교회의 자세
미국 대선이 드러낸것 – 사회의 분열
이번 미국 대선은 미국사회가 얼마나 극도로 분열되어 있는지 여실히 드러냈다.
도대체 맨정신으로 어떻게 트럼프를 뽑을 수 있어?
지각있는 지성인으로서, 트럼프를 어떻게 지지할 수 있느냐는 의견이 내 주위에 대부분이다 (특히나 소셜 미디어 등 밖으로 표출된 의견으로는). 이번 대선 결과(?)에 대해서 축하하고 기뻐하는 분위기가 대다수였다.
위는 금세 바이럴을 탄 반 존슨 의원의 바이든 당선 이후의 기쁨의 당선 소감이다. 이제 드디어 우리는 숨쉴수 있다고. 이제는 더이상 움츠려 들지 않아도 된다고. 나도 듣는 내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트럼프란 한 삐뚤어지고 문제많은 (tilted and broken) 리더가 대표(represent)하고 풍기는 독성 (toxic) 문화에, 미국도, 전 세계도 많은 악영향을 받아왔음을 부정하기 어려우리라.
복음주의의 거장, 존경받는 존 파이퍼 목사님도 본인의 블로그에서 한 리더가 대변하는 문화와 캐릭터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잘못된 정책보다 잘못된 캐릭터가 사회에 끼칠 악영향이 결코 더 작지 않다고 이야기함으로써, 트럼프를 지지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전문을 번역하고 싶을정도로 명문이었다. 아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악성의 자랑, 허풍, 파벌주의는 스스로에게만 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해친다. Flagrant boastfulness, vulgarity, and factiousness are not only self-incriminating; they are nation-corrupting
크리스천들이, 이렇게 사회에 전방위적 영향을 미치는, 리더로부터 온 죄악들의 해악을 가볍게 여기면서, 스스로가 인명을 구하고 자유를 진작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찌 황당하지 아니한가? Is it not baffling, then, that so many Christians seem to be sure that they are saving human lives and freedoms by treating as minimal the destructive effects of the spreading gangrene of high-profile, high-handed, culture-shaping sin?
난 크리스천들이, 나쁜 정책, 법, 판결이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문화를 오염시키는 허풍, 자랑, 폭력 부추기기와 같은 풍조가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보다 더 크다고 너무나 확고히 확신하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I find it bewildering that Christians can be so sure that greater damage will be done by bad judges, bad laws, and bad policies than is being done by the culture-infecting spread of the gangrene of sinful self-exaltation, and boasting, and strife-stirring (eristikos).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 만약 ‘어떤 사람이 되느냐’ 보다 사람을 살리고 자유를 보호하는 ‘어떤 정책이나 법’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거짓을 설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는 이런 거짓을 계속 선포하고 확산시킨 엄청난 댓가를 치루고 있고 계속 치뤄야 할 것이다. Therefore, Christians communicate a falsehood to unbelievers (who are also baffled!) when we act as if policies and laws that protect life and freedom are more precious than being a certain kind of person. The church is paying dearly, and will continue to pay, for our communicating this falsehood year after year.
낙태를 찬성하고 종교적 자유를 억압하는 민주당을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지지할 수 있어?
한편, 생명의 소중함과 자유의 절대적 가치를 아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인권이란 이름으로 생명을 빼앗고 (낙태 전면 합법화), LGBTQ 인권 등의 이름으로 종교적 자유를 억압하는 민주당을 지지할 수 있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절대 적지 않다.)
이 글은 2016년에는 트럼프를 지지할 수 없었다가, 트럼프가 어떤 정책들을 지지해 왔고 지켜왔는지를 보고 이번엔 트럼프와 공화당을 지지한다는 한 남침례교 목사님의 글이다. 주요 논지는 이렇다. 바이든과 해리스의 민주당은 공공연히 낙태 합법화를 주장하고 있고, LGBTQ 인권이란 이름으로 많은 종교적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반면 트럼프는 그 인격적 결함으로 많은 악영향을 끼쳤지만 그가 지지하고 보호해온 정책들을 보면 자유와 인권, 보수의 가치를 오히려 진작시켜 왔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트럼프를 지지한다.
낙태, 종교자유 억압과 같은 신념과는 다른 이유로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층도 있다. 위 영상은 민주당을 지지하다가 민주당이 대변하는 위선과 파괴의 컬쳐에 환멸을 느끼고 민주당을 떠난 움직임 #Walkaway을 만들고 리딩하고 있는 브랜든 스트라카의 영상이다. 6분 밖에 안되는 짧은 영상이 정말 파워풀하다. 모두에게 권한다. 아래 주요 내용을 간략히 번역한다. (전문은 이 링크 참조).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스스로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브랜든이 진보진영을 떠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 – 진보진영이 그토록 내세우는 가치들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는 것 – 이 의미심장하다.
난 진보주의를 지지했다. 내가 지지하는 가치를 대변한다고 느꼈기에. 난 모든 인종차별을 거부한다. 난 성적 지향이나 성별로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난 진리를 억압하고 발언의 자유를 막는 거짓되고 날조된 이야기들을 만드는 시스템을 거부한다. 난 쓰레기 과학과 미신, 이데올로기 어젠더를 거부한다. 난 혐오를 거부한다.
이것들이 내가 진보주의가 된 이유이다. 그리고 그 똑같은 이유에서 난 이제 진보진영을 떠난다.
수년동안, 난 좌파가 참을성없고, 포용력 없고, 논리적이지 않으며, 혐오를 부추기고, 잘못된 정보를 전하며, 위선적이고, 악의적이고, 무지하며, 파시스트적행동과 설득을 해오는지 봤다. For years now, I have watched as the left has devolved into intolerant, inflexible, illogical, hateful, misguided, ill-informed, un-American, hypocritical, menacing, callous, ignorant, narrow-minded, and at times, blatantly fascistic behavior and rhetoric.
이하 중략.
정치적 분열은 그 어느때보다 심하다
소셜미디어 등의 미디어와 기술이 얼마나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갈라놓았는지 지난 포스팅에 언급한바 있다. 아래 그래프를 다시한번 가져온다. 2020년 선거결과는 더 나눠져있으리라. 트럼프를 찍은 공화당원의 80%가 선거결과에 불복하고 있다고 들은적이 있다. 선거가 투명했는지 오류나 부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게 아니다. 모든 정치적인 이슈가 – 그것이 락다운을 하느냐이든, 낙태든, LGBTQ인권이든, 조세든 간에 – 얼마나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지, 얼마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적으로 생각하며 싸우고 있는지를 직시하고, 우리가 사는 이 분열의 시대에 대한 경각심을 울리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의 정치화와 백인 복음주의 진영의 정치적 패배
이 분열의 한가운데에 교회와 크리스천이 있다. 이번 선거는 교회의 정치화를 여실히 드러냈고, 그 교회의 정치적 노선에 대한 묵직한 성적표 이기도 하다.
위 영상은 크리스천 컨텐츠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베지테일의 창업자 필이 운영하고 있는 Holypost.com 이란 채널의 한 영상이다. 어떻게 하다가 공화당이 백인 복음주의의 정당이 되고, 민주당이 흑인 크리스천 및 종교가 없는 사람의 정당이 되었는지 너무나 명쾌히 설명한다.
영상에 나오듯이 1960년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천은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에 표결을 했고, 어느 주가 항상 공화당을 지지하거나 항상 민주당을 지지해 오지 않았다. 이 사이트에 너무도 잘 나와 있지만 당장 1948, 1956년과 1960년만 비교해보자. 파란색 (민주당)과 붉은색 (공화당)이 계속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을 볼 수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1960년과 2020년의 미국지도를 보면 공교롭게도 붉은색과 파란색이 거의 바뀐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구도 – 중부와 남부의 백인 복음주의 진영이 낙태반대, 동성애 불인정 등을 내세운 공화당을 지지하고 태평양과 대서양 인근의 도시 주 들이 낙태찬성 (pro choice), LGBTQ activisim 등을 내세우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구도 – 는 지난 30–40년간 갈수록 굳어져 미국사회를 분열로 치닫게 하고 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 과정에서 교회가 얼마나 정치적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주와 아래 표의 무신론자 (Unaffiliated)가 많은 주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고, 공화당을 지지하는 주와 백인 복음주의 진영 (White evangelical protestant) 이 거의 일치함을 볼 수 있다.


그렇다. 트럼프 같은 리더가 나왔지만, 대다수의 (적어도 과반 이상의) 복음주의 백인 크리스천들은 여전히 공화당에 표를 던졌다. 존 파이퍼 목사님 같은 분은 특정 정책을 이유로 무조건 특정 정당에 투표하는 것에 대해 위에 언급했던 우려를 표했지만, 여전히 많은 크리스천들은 후보와는 무관히 (?) 공화당을 지지하고 있다. 이같은 교회의 정치화는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후술하겠다. 여기에서 전달하고 싶은 메세지는 이것이다 – 교회와 백인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이 정치화 되었으며, 이번 선거는 더이상 그런 백인 복음주의 진영의 정치적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는 미국 국민들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영적 겨울이 오고 있다
과연 이런 사회환경이 우리, 특히 크리스천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아래는 내가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고 있는 고1 남학생들에게 얼마전에 한 말이다. (참고로 내 클래스에 있는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바이든과 민주당을 열렬히 지지했다.)
미국 대선에 대해 관심 많지? 너네 인스타그램에서 너네가 얼마나 열심히 선거결과를 팔로우 하고, 때론 선거운동(?)까지 하고 있는지 잘 봤어 ^^. 세가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첫째, 난 너희와 마찬가지로 트럼프란 지지자가 물러나는 것을 기쁘고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해. 트럼프는 정말 크리스천으로서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인물이야. 그 사람이 한 말과 행동들, 그 사람이 대변하는 컬쳐, 그 사람이 리더로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내용들은 너무나 반 그리스도적이야. 아마 이런 이유로 너희들 대부분도 트럼프가 이제는 사라지기를(?) 바래온것 같아. 나도 이점 동감해.
둘째, 앞으로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을 지키고 살기 더 어려워 질거야. 그래서 기뻐할 수 만은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진보진영에서 인권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어젠더를 밀어붙이고 있는것 알지? 이제는 성이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은 반인권이란 이름으로 캔슬될수 있어 (이미 되어가고 있을수도 있고). 낙태를 반대해 시술을 거부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을 수 있어. 크리스천이라는 신념을 옹호하는게 점점더 어려워질거야. 너네가 자라나는 세대에선, 신앙을 지키기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워질 것 같아.
셋째, 세상은 너희를 필요로해. 그걸 잊지마. 그래서 난 지금 이시간이 너무 소중해. 너희 세대에는 더욱더 빛이 억압받고 영적 어둠이 커질수 있어. 은혜로 빛을 입은 우리가, 너희들이 그래서 더 이 사명을 알고 깨어 있어야해. 하나님의 빛을,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자가 없어지면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믿어. 그걸 잊지 말자.
그래 겨울이 오고 있다. 영적인 겨울이. 정치화된 교회가 영적 도덕적 권위를 잃은 자리를, 진보진영이 내세우는 인권 (Human right)과, 인본주의, 사회적 정의 (Social Justice)의 메세지가 채우고 있다. 이 새로운 정치적 영적 지형이 가진 긍정적인 부분도 매우 많을수 있겠지만, 폐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데, 그 중 대표적인 두가지 영적 폐해만을 꼽아 보겠다.
1. 외면의 부조리와 문제에 집중하여, 내면의 부조리를 등한시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선 앞선글 – 우리는 더불어 살 수 있을까 – 에 자세히 다뤘다. 사회의 부조리에 집중하는 진보주의는, 회개와 자기부정 없는 “해방”을 내세우는 것에 경계해야 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볼때,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더 정의로운 사회제도, 법, 관습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진정한 해방은 우리 스스로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지하고 구하는 내면의 고백에서 나온다. 우리모두 피해자 정체성에서 벗어나고, 판단자와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올 때 온다. 앞으로 올 사회에선, 내면의 부조리를 돌아보는것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인권과 자기사랑, 소셜미디어로 대표되는 이시대의 컬쳐는 갈수록 부조리와 혐오를 부추기고, 오히려 내면의 고백과 각성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적인 겨울을 부추긴다.
2. 정의의 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다보면 발언의 자유를 없애고 자기 정체와 폐해에 빠질 수 있다. 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말하는 “캔슬 문화 – Cancel culture” 일 것이다.
정의의 칼을 맘껏 휘두르는 것의 위험성을 이 글에서 설명한 바 있다. 위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가 HBO에서 인종차별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사라진, 캔슬된 것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캔슬 컬쳐 – 온라인에서 다른 사람이 정의에 어긋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온라인에서 낙인찍고 (online shaming) 캔슬시켜버리는 것 – 은 이 시대의 새로운 문화이자 화두이다.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것이 곧 인종차별, LGBTQ 혐오를 지지한다는 것으로 바로 번역되어 캔슬되는 것이 우리 다음세대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렇게, 기독교 (Christianity)도 인권의 이름으로 계속 캔슬되어 가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올 시대에 종교적 신념으로 낙태를 거부할 수 있는가? 종교적 신념으로, 성이 주어지는 것이며, 성은 성적 정체성에 의해 자기가 선택한다는 교육을 거부할 수 있는가? 성정체성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성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유투브채널이 허용될까? 다원주의가 곧 진리인 시대에 예수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메세지가 회사 HR에서 허용될까? 기독교를 자유롭게 전도하는것도 다양한 이유에서 (포용적이지 않다 등등) 대학교 등에서 계속 불법이 되고 있음을 들었다. 크리스천임을 고백하는 것이, 내가 LGBTQ 라고 커밍아웃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세대가 이미 오지 않았는가. 기독교적 가치는 이미 반 인권적이고 혐오와 위선의 가치라는 브랜딩과 프레이밍이 되어가고 있다.
위는 얼마전에 소천한, 변증학 (apologetics)의 거장 라비 제카리아가 왜 본인의 신념이 LGBTQ 인권운동을 지지하지 않는지 설명한 영상이다. 그는 크리스천으로서 모든 종류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것은 ‘피부색’이 하늘로 부터 온 것 (divine)하다는 신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같은 이유로, 그는 성별이 하늘로부터 온 것 (divine)을 믿기에, 그것을 바꾸려 하는 온갖종류의 운동을 지지하기 어렵다고 본인을 대변했다. 마치 흑인으로 태어났지만 본인이 백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피부색을 바꾸려 한다면 그것이 정상이 아니며, 그것이 축하받고 장려받을 일이 아니며, 학교에서 피부색과 인종은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가르치지 않듯이, 성을 바꾸거나 본인이 결정한다는 것도 피부색을 바꾸는 것과 다르게 볼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다. 앞으로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것 자체가 어려운 시대가 오는게 아닌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각자체가 캔슬될 수 있을 것이다.
위 영상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지금 미국에서는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ly Correct, PC)란 미명하에, 종교에 대해 언급하는걸 극도로 자제하고, 서로의 다른 생각을 무조건 존중하는게 옳은거라는 상대적 다원주의가 역설적으로도 절대적 진리가 되고 있다. 크리스천임을 이야기하고 살아내는게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런데 영국은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간것 같다 (미국도 곧 이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예상되고 우려된다). 교육부 홈페이지에서 성은 각자가 정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그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단체를 모두다 “영적 학대”, “부당한 차별을 할 우려” 등의 이름으로 캔슬시키는 것 – 거리 전도자가 체포되고, 크리스천의 성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병원에서 직장을 잃고 하는 – 이 현재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이다.
크리스천 본인의 신앙을 지키기 어려워 지는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예배와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이다. 예배가 폐해지고 복음전도가 박해받을때, 세상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느끼고 접할수 없어진다. 사도바울은 이야기한다. 전하는 자 없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다. 교회는 정치화됐고 외면당하고 있다. 신앙은 다시금 다양한 압제를 맞을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영적인 겨울이 오고있다. (The time is coming for the spiritual oppression)
영적 겨울, 박해의 시대를 크리스천과 교회는 어떻게 맞아야 할까
아래 세가지 이야기를 하려 한다. 들어가기에 앞서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교회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건물로서의 Church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연합 (Ecclesia) 라는 것이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도 다른 글에서 또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에 대한 관념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이 시기에 교회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분께 이 Podcast를 추천한다. 크게 교회를 1) 예수그리스도의 몸 2) 성전의 모임과 모퉁이돌 위에 살아있는 돌들 3) 언약관계 하에서 예수그리스도신부 4) 가족 (영적인) 으로 설명한다. )
첫째, 교회는 특정 정당을 교회차원에서 지지하는 등의 정치투쟁을 경계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정치적 문제들을 상대하며, 무엇보다도 교회의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영적 탄압과 압제는 오고 있고 올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많은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본인의 신앙과 보수정당의 정치적 노선을 동일시하며 이데올로기의 투사가 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지금 교회의 역할일까? 나는 교회차원에서 특정정당을 지지하거나, 특정 정당/정치적 노선이 하나님의 뜻 (또는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나 행동주의(activism)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 아래 두가지 이유를 들겠다.
1. 복음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크리스천 보수주의자들 증에는 지금의 시대를 부당한 압제에 맞서 굳건히 싸울 시대라고 규정하고, 거의 모든 메세지에 기승전 권력투쟁 (한국의 예), 기승전 공화당 (미국의 예)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대응에 대해 이미 이 글에서 우려를 표한 바 있다. 그건 복음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배척하면서 정치운동을 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몰라도 교회 차원에서 하는 것은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압제에 맞써 싸우는 전사가 아니기에. 압제에 실력을 행사하는 정치단체가 아니기에.
정당한 정치적 권리 행사나 저항을 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보수 연방대법관으로 막 지명되어 이미 보수적인 판결을 내린 배럿 대법관이나, 연일 진보여당의 가슴을 서늘하게 할 발언을 서슴치 않는 국회의원 윤희숙 같은 정치인의 정치행동은 정당하며 필요하다. 단 교회차원에서, 정치적 메세지가 복음을 넘어설때, 이데올로기가 우상이 될 때, 특정 정치인과 정당을 지지하는 것 또는 배척하는 것과 신앙을 동일시 하거나 연결할 때, 그것은 본질이 전도된 모습이며 득보단 실이 더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아래 이상호 목사님의 글을 보자.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장 – 성경의 정치운동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선에 그쳐야 하는 겁니다 – 가 마음을 울린다.
미국 대선이 시끄럽네요. 바이든도 그렇고 트럼프도하나님의 사람은 아니죠.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런 언행을 할 수는 없죠. 근데도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걸 보면서 ‘우상’이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경에 나오는 고레스로 생각하는데-저도 그가 고레스같은 왕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그의 행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하면 고레스는 될 수없고 벨사살일 수는 있죠(다니엘5장). 하나님이 벨사살에게 주신 “메네 메네 데게 우바르신”의 글처럼 하나님의 저울로 재면 심판을 면할 수 없죠. 그래서 더 걱정이 되요. 트럼프가 ‘부족해서’ 제거될까 걱정인 거죠. 사실 대선 이전부터 트럼프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길까 긴장했는데 다행히 조용하네요. 트럼프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미국은 내전에 휩싸이고 그 영향이 우리나라에까지 미치면서 한국도 하룻만에 통제사회-전체주의의 전단계로서-가 될 거 같은 겁니다. 트럼프의 당선을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은데, 지금은 그런 기도를 할 때가 아닙니다. 트럼프를 지지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거죠. 다시 성경과 성령으로 돌아가 캄캄한 미국사회의 빛이 되는 거죠. 미국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배척하면서 ‘정치운동’을 하는데 그리 성경적이지 않죠. 성경의 정치운동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선에 그쳐야 하는 겁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한국도 미국 못지 않게 많이 악해졌어요.
위 존 파이퍼 목사님도 지금의 시대에서 어느 정당이나 지도자를 지지하는지를 밝히고 명확히 하라는 것은 “본인의 소명” 이 아니라고 말하며, 현재 공화당의 정치적노선을 문화오염 (cultural corruption), 민주당의 정치적노선을 영원한 파멸 (eternal ruin)에 비유했다. 마지막 두 문단의 내용을 일부 발췌 소개한다. 너무나 동감한 말이다. 우리의 소명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순교하는 삶이다.
목회자들이여. 미국이 붕괴한다고 가정해보자. 혼란과 폭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종교적 자유가 사라졌다고 가정해보자. 크리스천에게 남은 것이라곤 박해와 추방, 순교의 길일 뿐이라고 해보자. 과연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진짜 크리스천을 만들고 있는가? May I suggest to pastors that in the quietness of your study you do this? Imagine that America collapses. First anarchy, then tyranny — from the right or the left. Imagine that religious freedom is gone. What remains for Christians is fines, prison, exile, and martyrdom. Then ask yourself this: Has my preaching been developing real, radical Christians? Christians who can sing on the scaffold,
난 좌우 누구를 찍는게 차악인지 계산해서 그 결과를 공유할 마음이 없다. 그건 내 의무가 아니다. 나의 소명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이다. 죄 용서에 대한 믿음, 예수님을 세상 그 무엇보다 더 높이기, 예수님의 도와 가치를 드러내는 삶, 사랑과 거룩함을 높이는 삶을 살 수 있게 돕는것이 내 소명이다. 그 소명은 문화적 오염의 길이나, 영원한 파멸로 몰아갈 그 어느방향을 서포트 하는 것과도 충돌된다. I will not develop some calculus to determine which path of destruction I will support. That is not my duty. My calling is to lead people to see Jesus Christ, trust his forgiveness for sins, treasure him above everything in this world, live in a way that shows his all-satisfying value, and help them make it to heaven with love and holiness. That calling is contradicted by supporting either pathway to cultural corruption and eternal ruin.
당신은 충돌되지 않게 특정 정당이나 지지자를 서포트하는 방법이 있다고 이야기할지 모른다. 당신이 그렇게 믿으면 꼭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란다. 난 그 길이 보이지 않는다. You may believe that there are kinds of support for such pathways that do not involve such a contradiction — such an undermining of authentic Christian witness. You must act on what you see. I can’t see it. That is why I said my way need not be yours.
나의 선택과 소명에 대해서 사람들이 물을 것이다. 하나님이 물을 것이다. 내 양심이 물을 것이다.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가? 난 기쁜 마음으로 내 소망과 믿음을 이야기하겠다. 왜 예수그리스도의 도가, 낙태와 교만으로부터의 죽음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하겠다. 그리고 낙태와 교만의 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용서받을 수 있음을 말하겠다. 그리고 난 그 질문자에게, 추방자와 순교자의 삶, 흔들리지 않을 하늘나라의 시민의 삶으로 초대하겠다. 미국이 새로운 창조의 시대에 하나의 주석으로 남는 그 시대가 오더라도. I will be asked to give an account of my devotion to this life-giving calling. The world will ask. And the Lord of heaven will ask. And my conscience will ask. What will I say? With a cheerful smile, I will explain to my unbelieving neighbor why my allegiance to Jesus set me at odds with death — death by abortion and death by arrogance. I will take him to Psalm 139 and Romans 1. And if he is willing, I will show him how abortion and arrogance can be forgiven because of Christ (Ephesians 1:7). And I will invite him to become an exile — to have a kingdom that will never be shaken, not even when America is a footnote in the archives of the new creation.
2. 특정 정치적 노선이나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 본래 지지했던 가치수호와 이어지지 않을수 있다.
교회와 크리스천이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교회차원에서 종용하거나, 신앙인으로서 해야할 당연한 도리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또다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런 정치적 지지가 정작 크리스천이 지지하는 가치수호로 이어지지 않을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의 삶과 정치의 문제는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보수 국회의원 윤희숙은 얼마전 페이스북에 이글을 올리며, 신공항 타당성을 검토해야 한다는 본인의 주장에 무조건 “지역주의 정쟁화”를 이야기하는 민주당 의원들이 질문과 논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며 패러디했다. 참 허를 찌르는 비판이 아닐 수 없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똑같이 대답하며 모든걸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가치에 유리하게 프레이밍 하면 정치가 발전할 수 없다. 성급한 단순화와 일반화의 오류는 이렇게 무섭다.
공교롭게도 크리스천과 교회들은 지금 이런 과오 –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 범하고 있다. 아래는 내가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온누리교회의 이번주 설교 영상이다. 이기복 목사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는 주제로 낙태가 죄이며 태아도 생명임을 명확히 했다.
교회가 생명의 중요성을 설교하고 크리스천들이 신앙적 양심과 동기로 Pro-life 운동을 벌이는것은 바람직하며 장려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것이 특정 정당을 하나님의 뜻 또는 그것에 거스른다고 단체로 주장하는 정치운동으로 이어지거나, 이 이슈 하나로 모든 정치판단을 하는 행태로 이어질 때이다 (아래에서 이야기하는 한 이슈 투표 (Single Issue vote – 낙태라는 살인을 찬성하는 정당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도 낙태합법화를 이야기하는 민주당 (그것이 한국이든 미국이든)이 정권을 잡은것이 더 많은 태아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즉 낙태율을 높이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하다.
위 영상에서 낙태에 반대하는 크리스천 인권 변호사인 데이빗은, 낙태합법화 찬반을 바탕으로 특정정당이나 대표를 지지하는 것이, 정치적인 술수(레토릭)에 넘어간 것이며, 많은 잘못된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낱낱이 드러낸다. 진짜 낙태를 줄이는 것은 특정 정당도, 특정 법안도, 대표도 아니고, 훨씬 더 복잡한 이슈 (입양을 쉽게 한다든지, 피임교육을 높인다든지, 여성의 의료혜택을 증진시킨다든지 등) 임을 데이터로 이야기한다. 만약 크리스천으로서, 난 도저히 낙태에 찬성하는 민주당을 지지할 수 없다고 한다면 (또는 반대의 이유로 공화당에 무조건 투표한다면) 그건 정치적 술수에 놀아나는 행태라는 것이다. 가슴이 서늘한 메세지가 아닐 수 없다. 데이빗의 직접적인 표현을 아래 인용하겠다.
당신이 프로라이프 라면 기뻐할 부분이 있다. 태아의 생명을 살리는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신의 지역사회 정치, 공동체 내에서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 대통령이나 국가 차원의 정책은 실제로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프로 라이프 운동은 반대로 해왔다. 우리는 대통령 선거와 법안 입법여부에 가장 큰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옆동네에 있는 위기여성들을 외면해 왔다.
위에 소개한 이 영상의 후반부에 보면 본인들의 삶과 배경에 따라 얼마나 똑같은 시대를 다르게 해석할수 있는지가 소개된다. 백인 복음주의는 1960-80년대의 미국을 회상할때 공립학교에서 기도하고, 모두가 교회를 다니고, 성 역할이 분명했다며 이 시기의 미국이 “하나님의 나라”에 훨씬 가깝다고 한다. 하지만 흑인 크리스천은 동일 시대를 회상하며 인종차별, 압제, 학교에도 갈 수 없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학교에서 기도를 할 수 있게 허용하는 공화당이 하나님이 뜻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서 공화당을 뽑은 결과가, 더 많은 교육의 불평등과 이로인해 공립교육이 하나님의 나라와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토록 우리의 삶의 문제와 정치의 세계는 복잡하다. 성급한 일반화를 절대 경계해야 한다.


크리스천의 정치적 행동은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이 두가지가,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신념을 세상의 특정 정당과 동일시 해서는 안되는 대표적인 이유이다. 크리스천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절대 특정 정당이 우리를 온전히 대표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맞게 지킬것은 지키고 (보수주의) 개선할 것은 개선해야 한다 (진보주의). 특정 정책에 대해 성경적인 가치에 비추어 의견을 명확히 내는것은 얼마든지 바람직할수 있다. 하지만 낙태를 반대하고, 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명확하게 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교회나 교단 차원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특정 정당이나 지도자를 지지하거나 배격하는 것은 맞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않은 처사라고 생각한다.
우리 한국사람들, 특히 크리스천들에겐 특유의 강점과 약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강점은 열정적이라는 것, 단점은 정답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특정 정치적 이슈를 영적 전쟁이라고 명명하며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바친다. 예수그리스도를 섬긴다는 마음으로 정치싸움을 한다. 실제 정치 이슈는 위에서 본것처럼 복잡하고, 실제 영적 전투의 현장은 특정 정당이나 법에 반대하는것이 전혀 아닐 수 있다는걸 명심해야 한다. 정치에 무관심하자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다. 정치적 문제를 신앙을 내세워 접근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복잡한 정치적 술수에 휘둘리지 않도록 공부하고 배우자는 것이다.
그럼 정치적 행동을 하지 말자는 것이냐. 바보같이 당하고 있으라는거냐. 아니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밍숭맹숭 크리스천이 되라는 거냐.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전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위에 언급했듯이 개개인의 정치참여와 정치행동은 민주시민의 정당한 권리의자 의무이다. 밍숭맹숭 크리스천이 되자는 것도 절대 아니다 (이건 후술하겠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뜨거운 가슴을 가지되 뱀같은 지혜로, 차가운 머리로 가자는 것이다. 무조건 적인 종교적 열심과 영적 전쟁 프레이밍으로 정치행동을 나서는 것은 적그리스도적 영적 세력이, 정치적 세력이 가장 원하는 반응일 수 있다. 정치적인 압박이 올때 바로 정치적 대응을 단결해서 하지 않고 바보처럼 당하는 것이 바보같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영적인 역사는 바보같은 방법으로 움직였다. 느리고 어리석다고 생각한 길이 가장 빠른 길일지 모른다. 종교적 영적 열심으로 정치행동을 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 내가 가는길이 맞다는 확신이 생기기에. 매 사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빠르고 명확하고 즉각적인 정치적 대응을 자제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지금의 시대는 크리스천들이 더 어려운 일을, 더 차가운 머리로, 더 날카로운 지성과 영성으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좀더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겠다. 성의 거룩함과 순수성을 보호하기 위한 교회의 싸움은 차별금지법 실력저지, 결사반대, 정의당 앞 시위가 아닐수도 있다 (이 부분은 참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충분히 존중한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교회의 소명은 낙태법 결사반대 기도모임이 아닐수도 있다. 한국교회는 단결 정치행동에선 크리스천 역사상 A+를 받을정도로 잘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어디서 낙제점을 받고 있는지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 운동경기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작금의 교회의 정치운동을 보자면, 마치 이건 상대방 (세상)의 악랄한 반칙과 술수에 휘말려 경기가 말리고 있자, 이젠 우리편도 전투모드,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전원 공격을 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반칙 (심판 안볼때 우리편을 때린다든지) 하는 것에 엄청나게 과민반응하거나 대응하고, 결사 전투모드로 임하고 있는 듯 하다. 이러다가는 경기가 더 말릴 수 있다. 상대방의 술수에 더 놀아날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가 할 일은 상대방의 전술에 휘말려 전원공격이나 악랄한 반칙 하나하나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는게 아니라, 차분히 바보처럼 당하는 것 같은 허허실실을 하면서, 다음 세대를 키워서 연장전에 내보내거나 다음게임에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략으로 경기를 완전히 역전시켜 버리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겸허히 시대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받아들일 때가 아닐까. 지난 수십년간 수많은 교회가 정치화 되어 크리스천은 오직 보수주의, 보수정당 만을 지지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해 오지 않았는가. 결과는 젊은세대의 외면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외면, 교회의 영적 도덕적 권위의 추락, 교회가 발가벗겨지고 정치적으로 박해받는 현실이다. 우리 크리스천은 더욱더 구별된 삶으로 나가야 한다. 그 구별됨과 “복음”을 등에 업은 교회와 교단 차원의 적극적 정치행동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특정 사안에 대해 (예: 낙태, 차별금지법 등) 성경적 가치관에 비추어 명확한 시각을 갖는것과, 교회차원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특정 정당이나 지도자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거나 배격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정치적 프레이밍이야말로 이시대의 가장 악랄한 영적 공격이 아닐까. 그것을 교회가 뛰어넘어야 다음세대도 세상도 예수그리스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크리스천은, 교회는, 지금부터라도 뱀처럼 지혜롭게 (또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정치적 지형을 잘 내비게잇하고, 특정 정당과 우리의 정체성을 연결하는 것을 끊어내야 한다.
우리가 싸울 것은 교회의 연합 (unity)이다
정치적 정답은 나도 모른다. 정치적인 정답은 사안마다 다를수도 있다. 없을수도 있다. 정치적 정답 찾기보다 우리에게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의 연합이다. 우리는 정치적 어젠더가 교회를 분열시켜 초점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 우리는 연합을 위해, 하나됨을 위해 피흘려 싸워야 한다. 단순히 건물로 대표되는 로컬교회내의 연합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내에서 부부끼리, 부모자식 세대간에, 서로다른 종파끼리의 연합이 필요하다. 분열된 세상은 연합된 교회를 필요로 한다. 참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할 연합된 교회 없이는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사명감으로.
둘째, 다음세대의 가슴을 얻을 수 있는 창의성을 회복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교회는 도저히 다음세대의 가슴을 얻을 수 없다.
진보진영에서 이야기하는 인권, 평등, 사회적 연대와 같은 가치들은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우리의 가슴은 그런 정의와 평등을 요구한다. 인종차별 압제에 대한 반대,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투쟁, 이런것들의 근저에 막시즘이 있다고 일단 배척하거나 경계하기에 앞서, 과연 교회는,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사회적 약자에게 나가고 있는지,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메세지가 진정 젊은 세대의 가슴을 울리는지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우리 다음세대는 그런 가슴뛰는 진정한 정의를 꿈꾸고 있다. 진정한 사랑을 꿈꾸고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꿈꾸고 있다. 그것이 다음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이다. 정권퇴진을 외치며 코로나 시대에 단체로 버스타고 가서 집회를 열고,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며 정의당 앞에가서 시끄럽게 찬양하며 시위하는 모습에서 젊은 세대는 교회를 떠난다. 본인의 종교적 신념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특정 정책을 목숨걸고 반대하면서 사회에 허풍과 허영, 거짓과 음모라는 오염을 끼치는 지도자를 지지하며 이에 대해 주위가 납득할만한 설명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젊은 세대는 교회를 떠난다. 도저히 본인의 가슴이 원하는 본연의 아름다움, 정의와 포용, 연대와 사랑의 가치와 교회의 그런 모습을 연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북한에 가서 선교를 한 선교사님의 선교간증을 들으며 느낀 것이 있다. 바로 사람 나고 일이 낳지, 일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에 있는 20년동안 안해본 일이 없어요. 염소 농장, 비료 공장, 봉제 공장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밥먹고 살게하는게 목표였으니까,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늘 고심하고 찾았죠.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는 이것이 뒤바뀌어 있다. 가장 많은 이윤, 가장 큰 수익을 주는 것으로 모든것이 집중되어 있다. 그렇게 구조화된 사회에서, 인간소외, 빈부격차, 기후변화 같은 문제들이 계속 일어날수 밖에 없다. 이런 문제들을 아우르는 진보진영의 메세지가 젊은 세대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교회들이 건물짓고 점점더 내부의 종교적 열성에 빠지는것에 집중하고 부패하고 이기적이며 위선적이 되어갈때, 사회적인 강자들이 더 교회에 많이 있고 약자들은 교회 밖에서 방치되어 있을때, 젊은 세대는 그런 교회를 떠날수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낮은자, 가장 소외된 자에게 가신 분이다. 가장 포용적인 분이다. 진보진영의 성소수자관련 인권법이 그들에게 “법과 제도”란 이름으로 포용과 사랑, 인정과 존중을 이야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사람들의 한 부분 – 성 정체성이라고 표현되는 – 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 전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을 변혁키시며 구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는 가장 진보적이며 가장 포용적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막시즘 정신이 근간에 깔린 가짜 인권을 뛰어넘는 진짜 인권을 보여줄 수 있을까. 어떻게 알맹이 없는 ‘자기사랑 – self love’ 의 메세지를 뛰어넘는 예수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그 창의성이 절실하다.
다음세대에 다가갈 수 있는 창의적인 접근이 너무나 신선했다.
셋째, 가장 진보적인 세상보다 더 혁명적이고 정의로워 져야 한다.
세번째 이야기는 교회가 진보진영에서 배워 그리스도 없는 진보를 뛰어넘어야 할 부분에 대한 이야기다. 이 Podcast에서 존경하는 Reality SF의 Dave Lomas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마틴루터킹 목사의 설교집을 묶은 Strength to Love에 보면, 마틴루터킹 목사가 막시즘 (Marxism)과 자본주의 (Capitalism)을 동시에 비판한 것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본인의 부에 취해 가난을 돌아보지 않는다. 막시즘이 인간이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라는걸 망각한다면, 자본주의는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살고 연대를 이루며 살아간다는걸 등한시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인 인간과 사회적인 인간을 아우른다.
마틴 루터킹 목사님이 전하는 공산주의에 대처하는 크리스천의 자세
그래서 접하게 된 마틴루터킹 목사의 Strength to Love의 “크리스천은 공산주의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를 보면서, 이 시대의 거장, 영적인 어른의 가르침이 지금의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명문이다. 그는 공산주의는 1) 유물론적 무신론에 기반하고, 2) 모든 도덕을 상대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짓 유토피아를 선동하며, 3) 궁극적인 가치를 사람이 아닌 연방에 부여함으로써 기독교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기독교의 주적”임을 분명히 한다. 여기까지는 많은 기독교 보수주의 우파 전사(?)들과 인식을 같이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크리스천이 공산주의에 대응하는 방법 세가지를 제시한다. 이 세가지 모두 기독교 보수주의의 방법론과 다르다.
첫째, 크리스천은 사회정의(Social Justice) 의 문제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커뮤니즘은 사회정의 (Social Justice)의 문제를 더 전면으로 부각시키는 기능을 한다. 교회의 역할은 영혼구원 뿐 아니라, 구원받은 영혼이 살아가는 사회에 하나님의 뜻을 회복시키는 데에도 있다. 사회정의에 무관심하고 영적인 구원만을 이야기하며 때론 사회부조리를 재생산하고 확고히 한 그 책임을 확실히 물어야 할 것이다. 아래 원문 일부를 번역하여 소개한다.
기독교의 고귀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너무나 자주 사회정의 이슈에 대해 외면, 적절치 못한 입바름, 또는 감성적이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는 태도로 대해왔다. 미래의 희망에 매몰되어 현재의 악을 등한시 여겨왔다. 우리는 크리스천 복음은 두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는 내면의 영혼구원 문제, 둘은 사회환경을 변화시켜 구원받은 영혼이 사회에서 기회를 가지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문제이다. 영혼구원 문제에만 관심이 있고 사람들을 압박하는 사회적 경제적 환경에는 무관심한 종교는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인민의 아편” 이라는 딱지를 뗄 수 없을 것이다. In spite of the noble affirmations of Christianity, the church has often lagged in its concern for social justice and too often has been content to mouth pious irrelevances and sanctimonious trivialities. It has often been so absorbed in a future good “over yonder” that it forges the present evils “down here”. We must come to see that Christian gospel is a two way road. On the one side, it seeks to change the souls of men and thereby unite them with God; on the other, it seeks to change the environmental conditions of men so that the soul will have a chance after it is changed. Any religion that professes to be concerned with the souls of men and yet is not concerned with the economic and social conditions that strangle then is the kind of Marxist describes as “and opiate of the people”.
둘째, 크리스천은 전통적인 자본주의의 약점을 면밀히 관찰하고 보완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약자를 소외시키며, 물질만능주의를 만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근간 – 개인의 이윤추구가 – 경제의 유일한 시스템이 될때, 이는 살벌한 경쟁과 이기심, 개인주의를 부추겨서, 자본주의가 그토록 막고자 한 공산주의의 물질주의를 현실에서 구현하기에 이를 수도 있다. 아래 원문 일부를 번역하여 소개한다.
우리는 진리는 전통적 자본주의와 막시즘 모두에서 찾을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공동체안에 있는 진리를 찾지 못해왔고, 막시즘은 개인안에 있는 진리를 찾지 못했다. 다시말해,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에 내제한 사회성을 등한시 했고 막시즘은 인간의 삶에 내제한 개인성을 무시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에 대한 것만도, 공동체에 대한 것만도 아니다 – 그 둘 안에 내제한 진리를 아우르고 화합하는 것이다. We must honestly recognize that truth is not to be found either in traditional capitalism or in Marxism. Each represents a partial truth. Historically, capitalism failed to discern the truth in collective enterprise and Marxism failed to see the truth in individual enterprise. Capitalism failed to appreciate that life is social and Marxism failed to see that life is individual and social. The kingdom of God is neither the thesis of individual enterprise not the antithesis of collective enterprise, but a synthesis that reconciles the truth of both.
셋째, 크리스천은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에 모든걸 다 바치는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모든것을 바쳐야 한다. 과연 공산주의자들의 유토피아를 향한 불타는 열정보다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크리스천의 열정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열심과 열정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는 사랑과 거기에서 나온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삶의 방식 – 그것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우리의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다. 우리의 무기는 전쟁이 아니다. 우리는 초기 교회처럼, 적대적인 세상에 혁명적인 복음으로 맞서야 한다. 그럴때, 비로서 우리는 공산주의가 자라는 수많은 사회의 부조리를 천국의 정의와 공의로 잠재울 것이다. 아래 원문 일부를 번역하여 소개한다.
커뮤니스트들은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데 열정을 다한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그런 열심이 있는가? 크리스천이 충분히 크리스천이 되지 못했기에 세상에 아직도 공산주의자들이 있는게 아닐까? 우리는 우리자신을 다시한번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고 서약해야 한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정신과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게 공산주의에 대한 최선의 방어이다. 전쟁은 답이 될 수 없다. 공산주의는 무력이나 힘으로 누를 수 없다. 오히려 그런 토양은 공산주의에 득이된다. 우리는 반공산주의로 맞설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긍정적 동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것이 공산주의에겐 가장 큰 공격이 된다. 초대교인처럼 적대적 세상에 혁명적인 복음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가 공산주의의 공격을 열정과 용기로 막아낼때, 공산주의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우리는 민주주의와 예수그리스도의 사람들을 구해낼 것이다. Communist have a sense of purpose and destiny, and they work passionately and assiduously to win others to Communism, How many Christians can match the zeal of Communist? Is Communism alive in the world because we have not been Christian enough? We have to pledge ourselves anew to the cause of Christ. We just recapture the spirit of the early church. This is our best defense against Communism. War is not the answer. Communism will never be defeated by force. We must not engage in a negative anti-Communism but rather in a positive thrust for democracy, realizing that our greatest defense against Communism is to take offensive action in behalf of justice and righteousness. Like the early christians, we must move into a sometime hostile world armed with the revolutionary gospel of Jesus Christ. If we accept the challenge with devotion and valor, the bell of history will toll for Communism, and we shall make the world safe for democracy and secure for the people of Christ.
공산주의에 대처하는 크리스천의 자세는 첫째, 사회의 부조리를 없애기 위해 싸우며, 둘째,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고, 셋째,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큰 열심으로 그리스도의 도를 쫓으며 싸우라는 것이다. 앞으로 올 영적 겨울의 근저에는 무신론과 인본주의, 상대적 도덕론 (다원주의), 가짜 인권과 인간이 손으로 만드는 유토피아를 내세우는 막시즘이 그 큰 사상적 흐름으로 깔려 있다는 점에서 마틴루터킹 목사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세가지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삶은 가장 진보적인 좌파보다 더 진보적이다. 교회가 가장 진보적인 세상의 좌파보다 더 진보적이고 정의로워 질 때, 성경이 지키고자 하는 보수의 가치 (가정, 자유 등) 또한 지킬 수 있다. 교회는 진보와 연대와 사랑의 희생을 하며, 거룩을 위해 목숨걸고 싸우며 (동성애자를 비난하거나 어젠더를 배격하며 스스로 포르노나 음란 중독에 빠져있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진정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도로 사회의 아픔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연대보다 더 혁명적인 연대를 이루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그분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대응은, 우리의 방어는, 우리의 공격은, 역설적으로도 많은 크리스천 보수주의자들이 배격하는 우리 미셸 오바마 누님(?)의 역사적인 명연설에서 한마다로 압축된다.
마치며- 크리스천들이여 소망을 품고 믿음을 굳건히 하고 사랑을 입자
서두에 썼듯이, 워낙 민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 하다보니 크리스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비그리스도인 등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을 불편 (offend)하게 만들수 있으리라. 부디 너그럽고 관용적인 이해와 적극적인 관심을 부탁드리고 소망한다. 얼마든지 나와 생각이 다를수 있으리라. 답글 남겨주시면 겸허히 들여다 보고 또 고민해 보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동안 노예로 종살이 하고 있을때, 모세라는 아무런 무력이나 세상적 힘 없는 리더를 통해, 홍해를 가르고 광야에서 먹을것을 내고 마실것을 내서 수백만의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낸 분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면 바로 죽음을 맞게 되는 영적 한겨울에 샤느락, 미샥, 아빗나고를 통해 불가운데에서 기적을 내시며 이방인이 주를 찬양하게 했고, 다니엘이란 구별된 존재를 통해 이방나라를 움직이고 예언의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의 민족이 다 죽게 되었을때 금식하고 목숨을 건 에스더 한명을 통해 상황을 역전시켰다. 이스라엘이 죄로 바벨론에 멸망할때 그 심판의 메세지를 전하면서도 예레미야의 입으로 새 언약 (New Covenant)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며 어떻게 이런 악을 용인하실 수 있냐는 하박국 선지자의 울부짖음에,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로우며 반드시 악을 심판하시며 선을 회복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수천년전 변방 마을에서 억울한 죄를 대신입고 아무 저항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셨고, 그 제자들의 한점 두려움 없는 성령을 입은 삶을 통해 이땅에 교회를 세우고 지금까지 수많은 인류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신약 이후의 세계에도 하나님은 결국 선으로 악을 돌이키게 하셨다. 노예제도를 확고히하고 곤고히한 기독교의 아픈 과오도 씻을수 없는 사실이지만, 노예제도를 폐지시킨것 (그당시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웠던) 또한 두 크리스천 거장 윌리엄 윌버포스(영국)과 링컨(미국)을 필두로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개입하심 이었다. 비록 흑인과 여성등에게 처음부터 동일한 권리를 주는데는 실패했지만, 왕정과 계급제가 곧 진리였던 18세기에 천부인권이란 개념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권을 이야기한 미국 건국헌법과 정신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수많은 인류를 죽음과 자멸로 몰고간 공산주의의 거대한 혁명에 맞서 싸운것도 기독교 정신이다. 독립투쟁에도, 독재항거에도, 그리고 가난에의 항거에도, 천부인권과 인간의 존엄성, 소명을 이야기하는 기독교 정신이 많은경우 큰 줄기를 형성했다. 역사에 이런 예는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분열된 사회는 연합된 교회를 필요로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의 아픔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십자가의 도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없이는 인류사회는 분열과 공멸로 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가장 정치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세상이 좌와 우, 보수와 진보, 특정 정책을 두고 피터지게 싸울때 우리는 1) 정치적 전투가 아닌 뱀처럼 지혜로운 정치 내비게잇과 영적 연합으로 2) 다음세대의 가슴을 울리는 창의적인 아름다움으로 3) 가장 진보적인 진영보다 더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이웃사랑과 희생으로 영적 도덕적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소망인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우리의 역할이다.
억울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일부 교회의 부조리를 마치 모든 크리스천의 모습인것 처럼 포장하는 세상의 교회에 대해 일방적 비난 (예: 자유를 악용하는 종교)을 들으면 어찌 그런 생각이 안들겠는가. 교회가 지난 수십년간 낮은자리에서 사회적 약자에 나아가고, 노숙자와 장애인과 시골에 나가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부인하며 소명의식을 갖고 정진했던 것은 하나도 드러나지 않고 정치적으로 난도질 당하는 시대가 오는데 왜 안그렇겠는가. 하지만 이건 그리스도의 빛을 모드는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살 부름을 받은 우리가 감당해야할 소명이다. 세상과의 공정한 게임 (fair game)을 기대할수는 없다. 우리는 세상을 보지 않고 그분만 보고 구별된 존재로 우리 갈길을 가야한다.
크리스천들이여. 강하고 담대하자. 소망을 품자. 믿음을 굳건히 하자. 사랑을 입자. 모든것이 폐하더라도 사랑은 남는다. 모든것이 흔들릴때 흔들리지 않는 우리 주님이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다. 교회는 압제가 왔을때 더 강해진다. 교회가 제도권에 왔을때 부패했고 비대해졌지만, 교회가 박해받을때 기독교는 전세계로 퍼졌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도이다. 우리는 박해받을 지라도, 소망되신 그분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땅끝까지 사랑들고 가는 존재들이다. 한국의 연세대, 이화여대 모두 선교사들이 목숨걸고 아무것도 자신들에게 줄 것 없는 땅에 와서 가장 낮은자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그리스도의 도를 실천하며 만든 사랑의 결실이다. 병원도 학교도 마찬가지다. 아래 마틴루터킹 목사님의 “자정의 노크 (A Knock at Midnight)”란 설교 일부를 번역하며 길고 무거운 글을 마무리한다.
교회가 예언자적 열성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도덕적 영적 권위를 상실한 사회와 무관한 소셜 클럽으로 전락할 것이다. 교회가 경제적 부조리, 인종차별, 평화를 위한 몸부림 등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건 수백만의 로열티를 스스로 발로차는 행위이며 모두가 교회는 위선적인 단체라고 이야기할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교회가 스스로를 죽이는 현실안주의 족쇄에서 벗어나 그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회복하고 정의와 평화에 대해 강력하고 저돌적으로 이야기하며 실천할때, 교회는 다시한번 인류의 상상력과 사람들의 영혼에 불을 붙이고, 그들에게 진리와 정의, 평화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불어넣을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교회를 외롭고 소외된 자정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빛과 빵을 주는 사랑의 위대한 교제의 장소로 알고 기억할 것이다. If the church does not recapture its prophetic zeal, it will become an irrelevant social club without moral or spiritual authority. If the church does not participate actively in the struggle for peace and for economic and racial justice, it will forfeit the loyalty of millions and cause men everywhere to say that it has atrophied its will. But if the church will free itself from the shackles of a deadening status quo and, recovering its great historic mission, will speak and act fearlessly and insistently in terms of justice and peace, it will enkindle the imagination of mankind and fire the souls of men, imbuing them with a glowing and ardent love for truth, justice, and peace. Men far and near will know the church as a great fellowship of love the provides light and bread for lonely travelers at midnight.
산님, 이번 글도 너무나 잘 읽었습니다. 저는 대학생인데 요즘 참.. 많이 혼란스럽더라구요.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에 대해, 내가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나의 생각이 옳은지 등에 관해서요. 이런 의미에서 산님의 글은 참 귀하고 제게 위로가 됩니다. 나아갈 방향성 같은 느낌이랄까요,,^^ 앞으로도 글 많이 써주시고 쉐어해주세요 🙂 thank you always!
+ 평소에 팀 켈러 목사님 책 많이 읽으시는 것 같아서 더욱 반갑고 그랬어요 ㅎㅎ
수은님 답글이 큰 위로와 힘이 되네요. 워낙 민감한 주제인지라 쓰기 까지도, 쓰고 나서도 맘에 이런저런 짐이 있었는데. 네 수은님 같은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 정말 많이 기도하고 준비해야 될거 같아요. 계속 같이 고민하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정진해 봐요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복음주의적 교회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라면 대부분 고민하고 고뇌하는 문제일 것 같습니다.. 리서치와 정리로 좋은 자료들을 첨부해주셔서 감사하네요.. 미국 정치적 상황에 대해 양가적이 감정이 들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어떠한 신앙을 온전히 대변해 줄 정당이나 정치적 집단이 있을까 싶기도하고요… 고등학교 친구들부터 자신들의 입장을 온전히 대변해주는 인물이나 정당은 없다. 다 섞여있고 우리는 시기에 따라 경중에 따라 선택을 할 뿐이다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 같네요.
가장 큰 고민은 결국 기독교의 정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얻는 본질은 보수든 진보든 상대화되어 쓸수있지 않을까 싶어요, 가령 세상의 인권문제로 고통받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건진 하나님은 자신들을 이 땅에서 건져낼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스스로 가장 우려하는 것 중 하나가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 기독교, 크리스챠니티 역시 일부분(역사적, 카테고리적)일 뿐이고내가 속해있는 보수 복음주의(팀켈러, 두란노, 주일학교, 예배팀, 큐티, 기업-사역형 모델의 교회, 다니엘기도회 등)의 교회를 거울로 삼아 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아닐까 싶어요. 결국 퍼즐 중에 한조각일 뿐이죠. 그래서 영적 겨울, 혹은 믿음을 지키기가 갈수록 어렵다라는 표현이 저같은 보통?이란 표현도 어울리지 않겠지만 보수 신앙인들을 메인으로 생각한 말이 아닐까 싶어요.. 오히려 본질적으로 말세에 믿음을 볼자가 있겠느냐처럼 2000년전이나 지금이나 해당되는 가장 본질적인 자기부인과 믿음적인 측면만이 상대화가 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면 그것이 나의 삶에서 또 무엇일까란 고민이 남네요.. 너무 어렵다는…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건 자기가 할 수 있는 언어(부여받은, 그리고 계발한, 그리고 달란트 되어있는), 자기가 말할 수 밖에 없는 언어(소명의식, 자발적 헌신)로 최선을 다해 이야기하고, 나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믿음이라는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하는데, 그 선에서 산님의 블로그는 언제나 성실하고 최선하고 솔직하게 자기 언어를 써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람직한 블로그라 생각해요~ 언제나 킵고잉하시고, 쉐어링의 가치를 널리 알려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산님,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비록 제가 가지고 있는 견해가 좀 다를지라도 산님께서 지금 이 시대를 분석하는 자세에 대해서 존중합니다. 그리고 읽을때마다, 시대를 뛰어넘으며 두고두고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글이라는 것을 느끼게 만듭니다. 가치 있는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동감합니다. 기성 교회의 행태가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들고 다음 세대마저 떠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메세지로 와닿네요. 이럴 때 일수록 우리의 시선을 외부가 아닌 내부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로 더욱더 집중시키고 고정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성경 말씀을 내세워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복음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표현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며 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로 바르게 인도되어진다면 결국 모든 것들이 그 이치에 맞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제자리를 찾아갈 수 밖에 없으리라 믿어요. 좋은 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산님!:)
안녕하세요. 백산님 정말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인종간 제노포빅,레이시즘 인류 문명이 존재하는 한 계속 우리가 함께 짊어지고 가야할 엄청난 숙제인건 분명합니다. 특히 미국이라는 신대륙 발견부터 근대까지 이어져온 독립 전쟁이 미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투표제도를 탄생시키기도 하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조바이든과 트럼프 대선은 더욱더 분열 갈등을 낳은건 분명합니다.
최근 백신도 개발되어 보급단계에 놓이고, 첫 재무장관으로 재닛옐런 의장을 앉힌다는건 다시 반등의 괴를 노린다고 봅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지만, 틈틈히 글을 올려주셔서 개인적으로 팬의 입장으로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몸 건강하시구 따뜻한 크리스마스 되시길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singuha님, 늘 찾아주시고 관심가져 주시고 답도 달아 주시고 많이 감사드립니다. 네 정말 혼란한 시기네요. 많은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전 재닛앨런의장이나 바이든 정권의 다양한 수장들, 정치적 방향이나 의미는 잘 모르는데, 언제든 더 이야기도 듣고 알아보고 싶네요. 네 조만간 또 근황 블로그 통해 전하겠습니다 제가 감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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