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글은 비교적 짧은 글이다. 최근 둘째 아들을 보면서 느낀 당근과 채찍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내 아들과 내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한다.
들어가며 – 아들과의 갈등에서 느끼는 육아의 딜레마

아빠: “백하율, 너 이제 마지막 경고야. 소리지르지마. 이제 빨리 누워. 아빠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미 ~~”
아들: 싫어. 소리 지를꺼 야야야야야야야~~!! 꺄아아아~
아빠: “뺵!!! 하!!! 율ㄹㄹㄹㄹㄹㄹㄹ!!!!!!
(공포분위기, 침묵, 울음, 상처,…)
아, 결국 또 화내고 말았다. 진짜 화 안낼려고 속으로 몇번을 되뇌였는데, 오늘도 또 잘 보내고 기분을 잡쳐버렸다. 종종 있는 패턴이고 할때마다 너무 괴롭다. 아들놈은 소리안지르고 떼좀 덜쓰거나 떼 써도 소리안지를수 있고, 어떻게 하면 나는 그걸 좀 더 여유있게 받고 참아줄 수 있으려나…
하율이는 소위말하는 미운 세살이다. 엄청 애교부리고 밝고 까불까불하고 이쁘고 다 좋은데 일단 뭔가에 꽂히면 말은 귓등으로도 안듣는다. 뭐 하지 말아라, 어지러진것 치워라, 일상이 잔소리가 되기 쉽고 한 열번은 이야기해야 들은척 하는 경우 (사실 많은 경우 정말 못듣는것 같다)가 다반사다. 이건 사실 나도 충분히 이해가 되서 (? ^) 크게 힘들지 않은데, 진짜 나를 힘들게 하는데는 자기맘대로 안될때 나오는 엄청난 감정분출, 소리지르고 드러눕고 땡깡부리고 하는거다. 하율이가 이렇게 감정 폭발을 할때마다, 내 안에 나도 처음본 화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순식간에 오르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도 소리지르고 화내고, 하율이는 울고, 분위기 험악해지고, 옆에 있었던 하루도 울고 했던 적이 적지 않았다
알고 있었던 이슈다. 난 유독 감정분출에 약했다. 특히 누군가가 화내는거, 너무 싫어한다. 아마 나를 너무나 사랑해주었지만 또 본인이 받은 상처 등으로 한번씩 감정폭발이 되는 아버지의 화 (그 와중에도 내게 화내신건 손꼽을 정도지만) 에서 기인한게 아닌가 싶은데, 그걸 MBA과정 터치필리 라는 수업을 들으며 확실히 알게됐다. 아 감정폭발에 대해 내가 견딜수 있는 정도가 내 친구들 중에 거의 가장 낮구나. 난 이게 진짜 힘든 사람이구나. 내 안에 이런저런 상처가 있었구나. 이제 그게 다시 내 안의 도화선이 되어, 이렇게 또 세살짜리 아들 앞에서 화를 내고 있으니 아이러니 한 노릇이다. 이다지도 가정에 이어지는 상처와 아픔의 잔재는 깊고 질기다.
내가 몰랐던건 내 안에도 이만큼의 화가 있다는 것이다. “감정분출”을 싫어했기에, 난 “감정분출”을 하지 않는다는게 나의 원칙이고 자존심이었다. 그러던 내가, 갑자기 준비 안됐을때 확 들어오는 하율이의 훅을 맞고 나서는 거의 용암 분출하듯 엄청나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것이었다. 화가 화를 먹는다는것도 알게됐다. 그렇게 화 내고 나면 스스로가 너무 싫고 될대로 되라는 심정도 들고 기분이 진짜 구리다. 내가 나를 용서하기도 어렵고, 그렇게 나를 만든 아들놈이 더 밉고…
어떻게 하면 하율이를 잘 키울수 있을까? 사실 하율이는 나를 유독사랑한다. 눈뜨면 아빠를 찾고,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엄마 앞에서도 그런다. 나한테도 눈에 넣어도 안아플 내 싸랑하는 둘째 아들이다. 너무 웃기고 너무 재밌고 너무 사랑스럽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 또 말도안되게 화를 내고 상처를 주고 받는다. 하율이의 땡깡에 화를 내지 않으려고 다양한 마음의 준비를 해도 막상 그 순간이 되면 도무지 내가 나를 컨트롤할수가 없다. 내가 화내는게 얘에게 상처가 될까봐, 그렇게 또 가문의 상처(?)가 대물림될까 두렵다. 하율이는 어떻게 하면 이런 말도안되는 땡깡을 줄일 수 있을까. 한번 완전 따끔하게 버릇을 고쳐놔야 하나? 그리고 화내고 나선 사과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화낸 후에 또 사과하면 안된다는데 – 애가 더 헷갈려 한다고 – 그럼 어떻게 해야하나? 총체적 난국이다.
자기계발서와 셀프힐링북의 딜레마

잠깐 자기계발서와 셀프힐링북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갑자기 이 이야기가 왜 나오냐고? 조금만 기다리시라. 서점에 가든, 유투브를 보든, 이 시대에 가득한 메세지는 이 두개이다. 자기개발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 이대론 안돼. 정신차리고 더 열심히 해야돼. 반대로 셀프힐링북은 이야기한다. 스스로를 위로해. 너는 지금 그대로 괜찮아. 과연 이 메세지들은 우리에게 어떤 순작용과 부작용을 가져오는가?
책 | 메세지 | 순작용 | 부작용 |
자기계발서 | 지금 이대론 안돼. 더 열심해 해야돼. 세상이 만만한줄 알아. | 현타 | 비교-욕심-질투 시도-좌절-낙담 |
셀프힐링북 | 너는 문제없어. 지금 그대로 괜찮아 | 용납 | 착각, 자기기만 조건적 사랑 |
순작용은 사뭇 자명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서점가와 유투브를 휩싸고 있으리라). 자기계발서의 장점은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고 다양한 성공 방정식을 제공해 준다는데 있다. 하버드 천재의 공부법, 일잘하는 법,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이런 책들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런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유투브를 보고 하면, 지금 나의 부족함이 느껴지고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셀프힐링북의 장점은 위로를 준다는데 있다. 지치고 힘든 가슴이 이런책과 메세지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 “나도 그랬어. 지금 있는그래도 괜찮아. 20대의 나에게 보내고싶은 편지. 나를 받아들이는 법. ” 이런게 다 마찬가지다. 이런걸 통해 우리는 또 다시한번 거친 세상에 나갈 힘을 얻는다.
자기계발서는 비교 (욕심/시기)를 낳고, 셀프힐링북은 착각과 자기기만을 낳고
하지만 절대 순작용만 있지는 않다. 자기계발서는 크게 두가지의 절대 사소하지 않은 부작용을 낳는다. 하나는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게 되는것이고, 이건 욕심이나 질투로 이어진다. 둘째는 시도 – 좌절 – 낙담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다. 하루에 네시간씩만 자고 공부하고 일했다는 사람들의 메세지를 듣고 자기를 채찍질하고 다그쳐보지만 절대 쉬울리 없고 좌절하고 낙담한다. “나는 절대 안돼, 이 사람은 이렇게 좋은 조건이니까 된거지 나와는 시작점이 달라. 태어나길 다르게 태어났어 이건 불공평해. ” 이런 생각이 들기시작하면 최초의 동기부여는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더 큰 좌절이 몰려온다. 그리고 은근히 주위의 잘된 사람을 시기하거나 질투하게 될 수 있고, 아니면 계속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다가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내면의 평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셀프힐링북의 가장 큰 부작용은 착각과 자기기만이다. 실상은 괜찮지 않은데 계속 괜찮다고 하는 위로를 듣고 있으면, 당장 마음에는 좋을지 몰라도 상황을 개선하는데는 도움이 안될 수 있다. 그래서 공허하다. 잘못하면 나태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난 그런거 필요없어. 그건 마음이 약한사람들이나 필요한거지, 현실적인 도움이 필요해” 라며 힐링 북을 디스카운트 하기도 한다.
셀프힐링북의 또하나의 약점은 조건부 사랑이라는데 있다. 우리가 스스로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사랑에는 늘 한계가 있고 조건이 있다. 내가 나를 위로하고 용서할 수 있는것도 어느한계가 있다. 만약 남들이 아무리 나를 괜찮다고 위로해도 내가 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면? 남들에겐 도저히 고백할 수 없을만큼 큰 잘못을 저질러서 좌절하고 있다면? 이런 셀프힐링북이나 주로의 위로도 절대 나를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몰라. 난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난 스스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이렇게 자기비난과 절망에 빠지는걸 우리는 자주 보고 또 경험한다.
채찍과 당근의 딜레마
자기계발서와 셀프힐링북은 채찍과 당근,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움직이는 최고의 고전을 대변한다. 결국 모든것은 마음에서부터 나오기에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를 떠올려보자!), 마음을 움직이는게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캐쥬얼하게, 많은 경우는 필사적으로, 이런 책들과 메세지를 의지한다. 변화하고 나아지고 싶어서.
내 이야기로 돌아가자. 내가 겪고 있는 육아의 갈등은 내게도, 아들에게도 좋지 않다. 힘들다. 아프다. 변화가 필요하다. 어떻게 우리는 변할 수 있을까?
채찍은 내면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당근은 임시처방이 될 뿐이다
채찍은 이런식이다.
“산, 화를 내는건 좋지 않아. 애들 키우고 보면 결국 애들한테 99 잘해주다가도 1 잘못하면 애들은 그 1을 기억한다니까. 이 시기는 네 아들한테 아주 중요한 때야. 자 이 책을 읽어봐. “화를 다스리는 열가지 방법” 이거야. 난 화를 내지 않아. 그냥 그럴때는 이렇게 하면돼 ~~”.
과연 이게 먹힐까? 글쎄올시다. 나라고 화를 내고 싶어서 내는가. 나라고 뭐를 안해봤겠는가. 이런류의 처방은 많은 경우 내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준다. 그리고 효과도 없는 경우가 많다. 난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고, 이건 내게 매우 어려운 부분이다.
당근은 이런식이다. “산, 괜찮아. 다 그런거지. 완벽한 부모가 어딨어. 너정도면 너무 잘하고 있어. 애들은 다 또 그러면서 크는거야”. 하, 내가 써놨지만 위로가 된다. 채찍보다는 훨씬 이게 나은거 같다 ㅋㅋ. 하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나의 패턴을 변화시키는데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리고 이걸 잘못받아들여 진짜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건 큰일이다. 분명 지금 나의 화는 얼마든지 아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는 안좋은 행동이다. 이걸 계속하는건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 못할짓이다. 그만하고 싶다. 난 위로뿐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데, 당근은 그걸 줄 수 없다. 또하나, 만약 내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면 (위에 이야기한 조건부 사랑의 예), 남들이 아무리 위로해도, 난 내 아들에게 소리지르고 윽박지르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괴로움과 비탄에 잠길 것이다.
우리 아들에겐 어떨까? 잠깐 하율이를 소환해보자.
채찍은 이런식이다. “백하율, 너 한번만 더 소리지르면 그때는 진짜 혼나는거야. 진짜야 아빠가 경고했어. 자 그럴때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어봐. 그냥 아빠한테 차근차근 이야기해도 괜찮아.”. 결과는 어떨까? 먹힌적이 없다. 규칙과 협박은 아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오히려 잘못하면 아들은 상처받고 삐뚤어진다. 하율이가 또 규칙을 어기고 잘못을 저지르고, 내가 거기에 화를 냈을때, 아들은 잘못을 깨닫기는 커녕 아빠한테 상처받고 아빠를 미워하거나 피할수 있다. 행동은 일단 꺾였을지언정, 더 안좋은 상처가 아들 마음에 남았다.
당근은 이런식이다. “하율아, 화내고 소리질러도 괜찮아. 일로와 안아줄게. 우리 이쁜것”. 과연 이래도 될까? 이랬다가는 제대로 버릇나빠지는건 순식간일 수 있다. 하율이는 도움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바닥에 드러눕고 지맘대로 안되면 소리지르는건 확실히 잘못인 것을 하율이는 알아야 한다. 당근은 하율이를 착각에 빠뜨릴수 있고, 혹시나 하율이가 착각에 안빠진다 할지라도 하율이의 잘못을 고치는데에는 역부족이다.
채찍과 당근의 완전한 조합, 그건 우리에겐 없다
채찍과 당근의 딜레마….우리에겐 둘다 필요하다. 규율없는 용납은 공허하다. 용납없는 규율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부작용을 낳기 십상이다. 우리에겐 제대로된 채찍과 제대로된 당근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완전한 조합은 이런게 아닐까.
- 채찍: 잘잘못은 명확하게 한다. 하지만 절대로 다그치거나, 징벌 주는 사람의 편리에 의한 (예를들어 부모가 화가나서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부모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아이를 협박하거나) 징벌을 하지 않는다. 철저히 받는사람 입장에서, 받는 사람 눈높이에 맞춰, 연민과 따스함으로, 꼭 필요한 수준의 훈육과 가르침만을 주고, 감정적으로 전혀 대하지 않는다.
- 당근: 조건부 사랑이나 용납이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을 준다. 잘못은 확실하게 잘못이라고 이야기해서 착각이나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게 하지만, 그 후엔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을 줘서 상처받고 아픈 사람의 존재 그 자체를 위로하고 새롭게 한다.
다시 우리 가족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하율이가 잘못하면 그 잘못은 분명 지적하고 확실히 해야한다. (채찍). 하지만 그 규율은 철저히 하율이 중심이어야 한다. 하율이의 잘못을 하율이에게 돌리고 “어떻게 너는 늘 이러니. 너같은 애는 처음봤다.” “한번만 더하면 아빠가 이제 진짜 화낸다고 했지. 니가 진짜 잘못한거야. 벌받아 마땅해”. 이런식으로 상처되는 말을 하거나 얼굴표정을 하거나, 아들에게 죄책감과 수치를 주면, 당장 그 행동은 꺾일 지언정 훨씬 더 큰 상처와 부작용이 남을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율이에겐 사랑과 용납이, 정서적 안정이 필요하다. 잘못한 것에 대해선 명확히 혼을내고 벌을 주면서도, 끝까지 참고 감정적으로 나오지 않고 하율이가 이해할때까지 몇번이고 왜 이게 안좋고 잘못인지 설명해주고, 평소에 듬뿍듬뿍 사랑해서 정서적 안정을 주며, 하율이가 화내는 약점들을 파악하고 그걸 계속 보완해주고 안아주는 사랑이 필요하다. 그건 초인적인 인내이다.

금쪽같은 내새끼의 오박사님의 처방을 본적 있는가. 딱 이런식이다. 아이의 약점을 엄청난 집중력으로 관찰한다. 그리고 그거에 대한 오박사님의 처방은 절대 일방적 훈육이 아니다. 훈육이 필요하지 않다는건 아니다. 하지만 훈육은 아이의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걸 오박사님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의 내면을 변화할 수 있게 무엇보다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를 용납하며, 용납받고 안정받은 아이에게 하나씩 변화를 유도한다. 변화로 초대한다. 그게 사랑의 훈육이다. 그건 절대 쉽지 않다. 그건 엄청난 참을성과 반복과 용서와 희생을 요구한다. 그건,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우리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건 정말 어렵다. 내 아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 온전한 육아는 내 안에 없다.
아빠인 나에게 필요한건 무엇일까? 난 하나도 다를게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잘못은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내가 “아들이 이렇게 나왔으니 내가 화 내는건 당연해. 이건 별거 아니고 누구나 이정도 화는 내잖아” 식의 자기 정당화나 자기의에 빠져 있다면 그것에 대해선 이게 절대 사소한 문제가 아니며, 아이에게 화를 내는건 아이를 사랑하는 행동이 아닌 나의 감정분출임을 명확히 하고 선을 그어야 할 것이다.
내가 나의 잘못을 안다는 전제하에 – 화 내는것이 절대 좋은 행동도, 정당화될 수 있는 행동도 아니라는걸 내가 인식한 후에는 – 내게도 용납이 필요하다. 사랑과 정서적 안정이 필요하다. 화를 낸 나에게도 마음의 평화는 없다. 누군가 그걸 충고하고 지적하면 그게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상처받거나 삐뚤어지기 너무나 쉽다. 그리고 나서, 그 용납과 용서와 사랑의 기반 하에서, 나의 패턴을 아주 잘 관찰하고 나를 너무도 잘 이해하는 그 누군가의 아주 참을성 있는, 그리고 아주 정확한 가이드가 필요하다. “산아, 이런게 너의 패턴이야. 이런게 너의 내면의 아픔이야. 그래, 이렇게 한번 해보자. “
이걸 온전히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를 온전히 용납해주고 언제나 내 편인 우리부모님 (?) 나를 늘 참을성있게 지켜봐주고 나보다 훨씬 육아의 권위자인 아내 (?) 하지만 이둘 또한 제 나름의 약점과 한계를 가진 사람들이다. 도움을 줄 수는 있을 지언정, 온전한 해결책을 줄수는 없다. 그리고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상처를 입기도 한다. 육아때문에 싸우는 부부가 얼마나 많은지 보면 잘 알수 있다. 상대방 지적은 쉬워도 무조건적 용납은 어렵다. 그게 우리들이다.
오직 사랑만이 할 수 있는것을 규율에게 기대해서는 안된다
헤매고 있는 나와 우리 아들에게 “금쪽같은 내새끼”의 오박사와 같은 구세주가 찾아왔다. 그게 이 책이다.

“너의 집은 엉망진창이야. 너는 지칠만큼 지쳤어. 드디어 애들을 재우고 모든걸 불태우고 나서 넌 핸드폰을 들었지. 그때 애들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아, 단 한순간도 제정신일 수 없구나. 다시 이것들이 나를 돌게 만드는구나” 너는 엄청난 소리로 방문을 열어젖혔고 그 후의 일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거야. “
위의 이야기에 공감못할 부모가 누가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육아과정에서 혼란과 고장 (?, dyfunction)을 경험한다. 한 사람을 가르치고 기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다그치고 자녀를 다그치고 닥달하고 협박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고 그런다. 하지만 만약 근본부터 잘못된 접근법을 쓰고 있다면? 정말 중요한 것은 당장 필요한 육아팁이 아니라, 내가 부모의 역할을 무엇이냐고 생각하냐이다.
본인이 직접 애 넷을 키운 아빠인 작가는 이렇게 부모라면 모두가 공감할만한 에피소드로 책을 시작하며 육아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일단 그 이야기는 여기선 생략한다). 그리고 나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한 명문이 나온다. 바로 규율과 은혜에 대한 이야기다.
자녀에게 규율은 필요하다. 하지만 오로지 은혜만이 할 수 있는것을 규율에게 기대해서는 안된다.
Law: Your Children need God’s law, but you cannot ask the law to do what only grace can accomplish.
아. 할말을 잃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작가는 규율의 필요성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규율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규율의 역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인지하는 것이라고 폴(Paul)은 이야기한다. 결국 규율은, 율법은 자녀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자녀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간 내면의 힘을 줄 수 없다.
규율은 잘못된 행동을 드러내는데에는 즉효약이야. 하지만 그 잘못된 행동에서 자녀를 구하는데는 속수무책이지. 규울은 절대 네 자녀를 구하고 치료할 수 없어 – 바로 네 자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그것을 절대 규율은 줄 수 없어. 규율은 네 자녀에게 새로운 마음을 절대 줄 수 없어.
The law does a very good job of exposing your child’s sin, but it has no power whatsoever to deliver your child from it. The law cannot and will not rescue, redeem, and restore your child, but that’s exactly what your child needs. The law has no ability to give your child a new heart.
은혜가 정답이다
책 | 메세지 | 순작용 | 부작용 | 대안 | 결과 | |
채찍 | 자기계발서 | 지금 이대론 안돼. 더 열심해 해야되. 세상이 만만한줄 알아. | 현타 | 비교,욕심,질투,낙담 | 율법 |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식 (겸손) |
당근 | 셀프힐링북 | 너는 문제없어. 지금 그대로 괜찮아 | 용납 | 착각, 자기기만 | 은혜 | 자신감, 안정, 열정 |
위에서 소개한 표를 다시 가져온다. 자기계발서와 셀프힐링북, 채찍과 당근의 순작용과 부작용을 위에 소개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율법과 은혜이다.
- 규율 – 성경적 단어로 LAW (율법) – 은 채찍에 비교되는 개념이다. 규율은 잘잘못의 기준을 명확히 드러낸다. 규율을 통해 우리의 자녀는,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겸손케된다.
- 은혜 – 카톨릭에선 은총이라고 하는 – 는 당근에 비교되는 개념이다. 은혜를 통해 우리는 자신감과 안정을 찾고, 잘못된 행동을 고칠 힘을 얻는다.
율법과 은혜와 채찍과 당근, 자기계발서와 셀프힐링북의 근본적인 차이는 “누가” 그것을 제공하느냐이다. 자기계발서와 셀프힐링, 우리가 통상 보고 듣고 또 행하는 채찍과 당근의 주체는 다 “나”나 “남”이다. 반면 율법과 은혜의 주체는 모두 “하나님”이다. 그 하나의 차이에서 모든 차이가 나온다. 마치 인간이 만든 탄산 가공음료가 그때는 더 갈증을 해소하는것 같이 느껴지지만 하나님이 만든 물을 도저히 대신할 수 없는것처럼 그 차이는 너무나 다.
아래 은혜가 어떻게 채찍과 당근의 딜레마를 해결하는지 살펴본다.
은혜는 공허하지 않다
은혜는 율법을 전제로 한다. 은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이지만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자격없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은혜의 사전적인 정의는 “자격없이 받는 사랑과 용납”, “값없이 주는 선물”이다. 주는 입장에선 값없이 무조건 적으로 주는 것이고, 받는 입장에선 자격없이 무조건적으로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받는 단 하나의 조건은 “자격없음”이다. 내가 스스로 자격있다고 생각할때 그것은 은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은혜는 일방적 당근과 같이, 셀프힐링북과 같이, 공허하지 않다. 잘못을 괜찮다고 하는 용납이 아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한 후에 찾아오는 용납이다. 하율이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면 내가 아무리 하율이를 용납하고 껴안아도 하율이는 그걸 은혜로 받지 못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주위에서 아무리 나를 받아주고 용납해줘도 내가 나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값없는 선물이 될 수 없다.
은혜는 한계가 없다
은혜는 조건이 없다. 한계가 없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사랑은 조건적이고 한계가 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내가 남을 사랑하는 것도 어느수준 까지다. 도저히 스스로를 용서하고 용납못하는 사람도, 도저히 가족을 용납못하는 사람도 우리는 흔치않게 본다. 하지만 은혜는 다르다. 그것은 한계가 없다. 그래서 언제나 은혜를 만나면 우리 가슴의 벽은 허물어진다. 아무리 꽁꽁언 마음도, 상처받은 마음도, 좌절하고 포기하고 굳어버린 마음도 다 녹아내린다.
은혜는 비교하지 않는다
은혜는 비교하지 않는다. 은혜는 “값없이”, “자격없이” 받은 것이기에 우리를 한없이 겸손하게 한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주위와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거나 혀를 차며 보지도 않고,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은혜받은 사람은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에서 해방된다. 아무 자격없이 받은 것이기에 교만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한편 무조건적인 용납을 받았기에 결핍이나 갈증도 없다. 은혜받은 사람은 겸손하고 온유하고 부드럽고 연민이 넘친다. 그러면서도 당당하다.
은혜는 효과적이다 (파워풀하다)
정신분석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저자 스캇펙은 그의 대표작, 아직도 가야할길 (The less traveled) 의 첫 챕터를 “자기관리 (훈련) (Discipline)”이라고 이름붙였다. 핵심 메세지는 이것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 핵심에는 결국 쉽고 편한것을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과,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이 있다. 고통과 어려움 만은 세상을 잘 살려면, 쉽고 편한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지만 중요한 것을 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데 그것이 “자기관리, 절제 (discipline)” 라고 스캇펙은 소개한다. 그리고 이 어려운 힘을 기르는것은 “사랑” 이라고 스캇펙은 소개한다. 정신분석의사로서 수십년간 사람들을 상담하고 분석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사랑받은 사람은, 믿어주고 격려하고 북돋아주고 기다려주고 응원해주는 그런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은, 어렵지만 중요한 것을 먼저하는 힘을 기를 수 있었지만, 반면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런 힘을 갖지 못하고 포기하고 만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비유가 하나더 있다. 북풍과 태양의 이솝우화이다. 결국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것은 세차게 몰아치는 북풍이 아닌, 따뜻하게 초대하는 태양이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에게 내면의 힘을 주는 것은 사랑이다. 용납이다.
그래, 은혜는 파워풀하다. 은혜는 변화를 반드시 동반한다. 은혜는 엄청난 힘과 에너지를 준다. 은혜는 말도안되는 용기와 꿈을 준다.
마치며 – 은혜에 의지하자

이 책을 읽고, 은혜를 묵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더 단단히 하고 있던 어느날이었다. 또 반복되던 그 패턴이 왔다. 너무 잘 놀고 애들 씻기는데 둘째가 또 연신 말도안되는 짜증에 소리지르고 뒤집어 졌다. 몇번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는데 계속 속으로 “예수님 도와주세요”를 되뇌이다가 이러다 또 화내지 싶어서 일단 나가라고 애를 내보내고 아내가 일단 애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율이 침대 맡에서 이야기를 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하율아, 아빠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아까 아빠가 나가라고 그래서 속상했어?”
(뭐라뭐라 딴 이야기함)
“하율아, 아빠 봐봐. 아빠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아까 아빠가 나가라고 그래서 속상했어?”
(살짝 눈치를 보다가) “응… 무서웠어.”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하율이가 막 소리지르고 드러눕고 짜증내서 많이 속상해서 그랬어.”
“내가, 내가 (울먹이며), 내가 양치하고 혼자 옷벋고 내려오고 싶었는데——.”
“그랬구나. 아빤 전혀 알아들을수가 없었어하율이가 소리지르고 그래서. 아빠가 미안해 화내서. 아빠 용서해줄수있어?”
“응 (울먹이며).”
“하율이 사랑해. 너무 멋지다. 아빠가 미안해 (나도 눈물 글썽) 용서해줘서 고마워. 아빠가 화 안내게 더 노력할게. 이제 하율이도 짜증 덜내고 이야기할수 있겠어?”
“응, (눈물닦고 씩 웃으며) 이제 재밌는 얘기 해줘.”
세살짜리 아들과 이런 눈물의 힐링이 있을줄은 또 몰랐다. 하율이가 울먹이며 내가 무서웠다고 하자 너무 미안하더라. 정말 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상처주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는데, 그러면서도 우리는 또 서로 상처받고 상처주고 그런다. 그래서 내가 경험한 육아는 – 내가 경험한 삶의 다른부분과 어김없이 마찬가지로 – 은헤없이는 불가능하다. 부족한 내가 용서를 빌고 사랑을 고백하며 아들에게 손내밀때, 내 부족한 아들도 아빠는 도저히 줄 수없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조금이나마 느끼지 않을까.
아이들을 보면서 알게 되는것. 한명의 사람이 사람구실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은혜가 필요한지이다. 얼마나 많은 참을성과 용납이 필요한지. 끈임없이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응원해주는게 필요한지. 얼마나 많은 사랑이 필요한지. 이건 부모로서 아이들을 품어본 사람이라면 다 공감하리라.
착각해서는 안될게 있다. 우리 어른들에게도 그게 필요하다. 우리모두는 그것이 필요하다. 스캇펙이 이야기 했듯, 이 풍파많은 세상을 헤쳐가는 우리 모두에게, 더 어렵고 힘든일을 계속 해내는 데에는, 엄청난 사랑 잔고가 필요하다. 조건없은 사랑이 필요하다. 값없는 선물이 필요하다. 그 폭포수 같은 은혜에 거할때에만 우리는 우리 본연의 모습, 내가 상상치도 못한 사랑과 희생을 거뜬히 감내하는, 최고 버전의 우리가 될 수 있다.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내 감정을 분출한 날이면 – 공교롭게도 오늘도 – 그저 난 상한 심령으로 또 그 은혜앞에 업드릴 뿐이다. 그리고 또 한번 회개하고 사랑받고 용납받고 쉼과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나의 부족함에 좌절하지도 않고, 나의 화를 정당화하지는 더더욱 않고, 내 마음은 그분의 나를 향한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차고, 난 그분의 참을성과 인자하심을 맛보고, 그렇게 난 더 나은 아빠가 될 힘을 얻는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자기계발서와 셀프힐링북에 의지해서 내 스스로 낼 수 있는 의지의 힘과 나와 다른사람이 주는 조건적 용납의 힘에 의지해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머지않아 그 한계와 부작용을 체험하리라. 아니 아마 이미 체험하고 신음하며 좌절하고 있을지 모른다. 혹시 그런분이 있으면 꼭 내 시간과 마음을 내서 함께 고민하고 기도해보고 싶다. 이 링크에 정보를 남겨주세요!
아니면 누군가에게 자기계발서를 제시하고 셀프힐링을 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건 전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자기계발서가 진정 그 누군가를 변화시키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셀프힐링이나 우리가 주는 조건적인 사랑이 진정 그 누군가를 변화시키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난 은혜같은거 필요없다고, 난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다. – 내면의 자유와 기쁨, 평화를 경험하고 계세요?
이건 과거의 내게 주는 메세지기도 하다. 나에게 “열심히 산다”는건 아이덴티티 그 자체였다. 그것이 나를 정의하고 나를 나답게 하는 거였다. 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결과를 사모했고 의지했고, ‘값없이 받는것 – 은혜’의 개념은 마음이 약한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교는 마음에 위안을 주겠지만 난 나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삶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나에겐 “성실과 근면”이 곧 신과 같았다. 그게 없는 주위 사람을 정죄하지는 않으려 했지만 아우를 순 없었고, 나 스스로 그런 기준에서 벗어나면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했다. 그렇게 채찍질하며 또 스스로를 때로는 칭찬하고 다양한데에서 동기부여를 받으며 살아갔지만 난 여전히 목말랐다. 스스로 내는 힘, 명상에서 오는 힘, 세상에서 받는 동기부여, 스스로에게 해주는 칭찬 – 이것들은 그당시에는 힘을 주지만 그 안에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없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받는 선물이다. 그건 우리를 스스로에게서 구한다. 후회와 좌절의 늪에서 구하고, 자기기준에 못미치는 사람을 판단하는 자기의 (self-righteous)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은혜가 정답이다. 그 은혜를 의지한다. 나도, 내 아들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우리의 죄에 대한 고백하나면. 값없이 주어지는 그 폭포수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기원한다.
“너의 그 행동은 잘못이야. 하지만 너는 다 용서받았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너를 너무도 사랑한다. 너를 향한 아름다운 계획을 내가 가지고 있단다. 내 손을 잡고 한걸음씩 가볼수 있겠니? “
평소에 댓글 없이 글만 읽고 가는 블로그 독자 중의 한명입니다. 오늘 육아에 대한 글을 읽고 많이 은혜받고 갑니다. 한동안 우울증과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내가 그런 상태인지도 모른채 재정적인 압박에서 투잡, 쓰리잡을 뛰며 일하고 육아를 했습니다. 부부생활 또한 좋지 못했어요. 가정이 필요한 물질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고난인줄 알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어느 정도 상황이 나아지니 그게 아니더군요. 그때는 자기계발서니 힐링이니 하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마음을 잡으며 버텼던것 같습니다. 지나고 보니 심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사로 잡혀 있었더군요. 결국 모든 의욕을 잃고 나태해지고 모든 감정이 소멸해버려서 빈 껍데기가 되어버려서 직장에서의 평가도 안 좋아지고 프리랜서로 하던 일들에서도 구멍이 나기 시작해 많은 부분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야 그동안 놓았던 성경과 설교를 들으며 회복중에 있습니다. 문득 문득 과거에 시간 낭비했던 자신이 미치도록 싫어지는 때가 있지만 그래도 조금더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미국에서 올해 6살, 5살 되는 연년생 아들과 한달전에 출산한 딸을 키우고 있는 아빠입니다. 1년 정도 블로그 눈팅만 하다 오늘 드디어 이렇게 댓글을 남기게 되네요. 백산님 글에서 항상 많이 배우고 큰 힘 얻고 갑니다. 그냥 오늘은 꼭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Jacob님…많은게 느껴지는 답글을 달아 주셨네요. 네 어떤 마음인지 알것 같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다가 안되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하고 자책도 하고 그런게 참 저희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애셋에 엄청 정신 없으시겠어요 셋째 출산하고 진짜 정신없는 시기일텐데, 이 시기가 회복의 시기, 온전히 은혜가운데 거하는 시기가 되기를 응원합니다. 언제 말씀 나눠볼 기회 있으면 좋겠어요. 같이 기도도 해보고요. 저한테 편히 메일 주시거나, 제가 짬 나면 메일 드려볼게요. 중보하고 응원합니다 감사드려요.
‘은혜’라는 단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Grace is enough! Amen!
Grace if enough! Amen!!
매번 공감이 되는 글이지만, 이번 글은 더욱 마음에 깊은 공감과 울림을 주네요ㅠ_ㅠ 글에 첨부해주신 google doc에 글 남겨놓았습니다. 늘 감사드려요 🙂
Pingback: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하) – 같이 가자 니가 필요해 | San's di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