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과 목적를 잃은 친구에게#1 – 더 열심히 한다고? 아냐 잠깐 멈춰봐. 전진뿐인 삶엔 궁극적 목적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도 없어. 하지만 걱정마. 너를 위한 기쁜소식이 있어. 거기에 소망도 목적도 있어

이번글은 최근 내 가슴에 가득찬 이야기들을 또 풀어내고 싶고 전하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한국의 스타트업은 강하다 – 제 2의 한강의 기적” 이란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가슴에 다른 이야기가 꾸물꾸물 차고 올라와서 또 치고나와 버렸다. 이러다 영영 못쓰게 되는건 아닌지. 위의 글의 핵심주제는 이것이다.

“한국의 스타트업 업계는 앞으로 10년,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비약할 것이다.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우리는 일굴 수 있다. 지금 이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또 앞으로 몸담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관계를 맺을 사람들은 다시한번 기적을 일구고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갈 경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시기와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자체가 하나의 스타트업이다. 우린 어떤 문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 어떻게 서로 일하고 서로 교류하고 살아갈 것인가. 어떤 책임감으로 일하고 살 것인가. 그 연대의식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자 다시 이번글로 돌아간다. 이번글은 내 주위 사람들의 고뇌와 번민을 들으며 느낀 안타까운 마음을 기도와 성찰가운데 풀어내면서 시작됐다. 원래는 상/하편으로 썼는데 너무 길다는 피드백이 많아서 더 나눴다. 총 여덟편에 걸쳐 글을 나누고자 한자. 이 글은 그 첫번째, 소망과 목적이 없다고? 그냥 더 열심히 해야할 것 같다고? 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써본 것이다. 2편은 여기 아래 간략한 목차와, 바쁘신 분을 위한 1-4편 요약 대화본도 첨부한다.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시리즈:

바쁘신 분을 위한 1-4편 5분 요약 (가상 대화)

산 : 그래 요새 어떻게 지내?

친구: 산, 요새 사는거? 별 재미없지. 기대하고 있는게 있냐고? 글쎄 비트코인도 안샀고, 주식이나 부동산도 타이밍을 놓쳤고, 커리어는 늘 제자리인것 같고. 그냥 정체되어있는것 같아. 크게 기대할 것도 없고 그렇다. 전에는 늘 열심히 살려고 더 스스로를 채찍질 했는데 그마저도 요새는 잘 안되서 좀 우울하네.

산 : 그렇구나. 충분히 공감해 나눠줘서 고마워 블라블라. 내가 보기엔, 결국 중요한건 외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변화, 우리 가슴과 마음의 변화라고 생각해.

친구: 응 나도 분명 그런 부분이 있음을 부정하는건 아니야. 다들 저마다 의미를 찾으려 살아가고 있는것 같아. 명상도 하고, 종교에서 그런 부분을 채움받는 사람도 있고. 나도 나름 감사도 드리고 평화를 찾으려 해가고 있어. 그냥 저마다 그렇게 각자의 해답을 찾아가며 최선을 다해 사는게 정답 아니야? 니가 보기에 니가 믿는 그 복음, 그 예수님이 특별해? 뭐가 달라?

산 : 응, 나도 전엔 그렇게 생각했어. 다 저마다 의미가 있고 다 각자 구도자로서 해답을 찾고 최선을 다해 사는게 정답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어. 종교는 우리를 우리자신에게서 해방할 수 없어. 그건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라는 또다른 숨겨진 교만, 파벌주의, 종파주의로 우리를 제한할 뿐이지. 아니면 모든 집착에서 해방되라며 개인의 영성만을 강조하거나. 하지만 복음은 확실히 달라. 그건 어떤 생각의 흐름이나, 어떤 정답으로 이르는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야. 그건 한 사건이고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야. 이미 그 사람을 통해 일어난 좋은 소식이야. 그건 모든것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지. 그건 지금 너의 고뇌와 경주, 목마름에서 너를 완전히 해방시킬거야. 그건 은혜 – 갑없이 받은 선물 이기에, 우리를 헌신과 희생의 자리로 나가게 해서 이 사회의 소망이 되기도 해. 즉 복음만이 우리 각자의 가슴속에, 그리고 우리 사회에, 딱 맞아떨어지는 잃어버린 퍼즐이야.

친구: 좋은 소식? 그 예수만 믿으면 모든게 해결되고 천국가고 뭐 그런이야기 하는거야? 믿기만 하면 된다고? 글쎄. 난 잘 모르겠다야. 그게 어떻게 말이되냐? 난 그건 정말 한가한 소리같아. 그걸 어떻게 믿어? 난 그런건 도저히 믿을수가 없어. 그리고 그건 너무 편협한 사고방식 같아. 하나의 진리만 있다는걸 어떻게 증명할거야? 나도 믿겨지만 믿고 싶기도 하다만 난 됐다야.

산 : 하하 나도 전에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내 이야기를 들어봐. 지금 니가 이야기하는 그것도 사실 (Fact)만이 아닌 하나의 믿음이야. 눈에 보이는것, 다 증명된것만 믿겠다는 그것도 하나의 믿음인거지. 세상에 신이 없고 영적인 세계가 없다는걸 증명할 수 있어? 세상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것 투성이야 – 우리의 감정만 봐도 그래. 그리고 결국 절대진리를 알 수 없다, 하나의 절대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 상대주의 이건 또 어떻게 증명할거야? 상대주의는 아이러니 하게도 상대주의를 절대적 진리로 만든 모순에 빠졌지. 무슨말인지 이해가되? 결국은 우리 모두 무언가는 믿고 무언가는 선택하고 살고 있는거야. 모든 인간이 무릎을 꿇을만한 변증은 어디에도 없어. 그게 있다면 우리모두 똑같이 1+1=2 이렇게 생각하고 살게? 다들 저마다의 선택을 하는거지. 중요한건 그러니까 ‘절대진리는 있을수 없고 찾아봐야 의미도 없다’ 가 아니라, 결국 어떤 길이 세상을 가장 잘 설명하느냐 나를 가장 온전케 하느냐가 아닐까? 그렇게 볼때, 난 복음이 진리라는 실마리는 충분한거 같아. 이걸 봐봐.

친구: 하, 결국 증명된 것만 믿겠다는 것도 믿음이란 거지? 그리고 절대진리가 없다는 증거도 없다는거지? 그건 말 되네. 그래도 난 복음이 이야기하는 그 선한 하나님을 도저히 믿을수가 없어. 세상의 부조리를 보고도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와? 세상은 결국 능력주의 (Meritocracy) 아니야? 결국 하나라도 노력해서 더 이루는게 중요하지, 모든게 벌써 다 이뤄졌다는 그런 한가한 소리는 내게 아무 도움이 안되는거 같아. 그리고, 소위 말해 믿는다는 사람들, 교회의 위선과 교만과 잘못들은 어떻게 설명할건데? 내가 굳이 이야기 안해도 너도 잘 알거야. 그래서 별로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고, 그런 아집과 위선과 나를 엮고 싶지도 않아. 그냥 내가 보기엔 그건 착각이고 허황된 소리야. 지금의 세상을 보고, 너나 다른 크리스천이 말하는 그런 선하고 완벽한 하나님이나 구세주를 믿는거는, 그냥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믿는거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아. 난 일없다.

산 :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 쉽지 않은 문제들이야. 하지만 내가 하나 소개해도 될까? 좀 차갑게 들릴 수 있는 (?) 이야기지만, 소위 말한 “현타”를 내가 한번 들려주지. 크리스천이 믿는 세계관을 쉽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아.

1) 완벽한 창조주 (모든것을 요구하는 신) : 절대적이고 선한 유일한 신, 인간의 제한된 도덕성과 선함으론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완벽한 존재. 우리의 모든것을 꿰뚤어 보는 절대자. 한치의 불의도 용납할 수 없는, 완벽한 정의만을 받아들이는 공의롭고 정의롭고 완벽한 심판자.

2) 희생한 그리스도 (끔찍할도록 달콤한 그리스도) : 완벽한 창조주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찾아온 모든 문제들로 인간과 창조세계가 오염되고 고통속에 거하고 있을때, 바로 그 완벽한 신이, 우리에게 내려와 우리의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하고 우리를 위해 희생한 것 – 그것이 그리스도 (메시아). 그 사건.

3) 함께하는 영원한 삶 (정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바로 다음날 아침에 온다는 약속): 위의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찾아오는 함께하는 영원한 삶.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걸 지금 바로 살아낼 수 있고, 완벽한 그 세계, 고통없고 악 없는 정의의 세계가 지금 여기에, 바로 그 다음날 온다는 약속.

어때? 정신이 번쩍드는 이야기들이지? 이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부조리들, 결과만이 중요하고 결과를 통해 모든것이 판단받는 세상의 현실과 작동원리, 교회의 위선과 잘못들, 이런것들은 넉넉히 설명되고도 남아. 그런 것들은 1) 완벽한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증거가 될 수 없어.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해도, 그건 완벽한 창조주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2) 희생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더 드러낼 뿐이지. 그리고 3) 함께하는 정의롭고 공의로운 삶과 세상을 향한 소망을 품어야할 이유가 되는거지.

이건 능력주의 (Meritocracy)와 180도 다른 이야기야. 결국 각자가 주어진 것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를 정당한 자신의 소득으로 누리며 살아간다는게 능력주의의 생각이지. 하지만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 – 니가 가진것 중 공짜로 주어지지 않은게 하나라도 있니? 공짜로 맨몸으로 부모님에게서 나와서, 우리의 지성도, 감성도, 우리가 가졌던 기회들도 모두 내 손으로 이룬게 아닌 공짜로 주어진 것이라고. 또 아무리 내가 선하게 살려고 몸부림쳐도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한 존재가 나의 모든 빚을 탕감해 줬다고. 그래 이걸 알고 믿기 전에는 세상이 부조리해 보이고 나는 나름 정당한 권리를 쟁취하고 누려가며 살고 있었고 살려 했었다고 이야기할지 몰라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빚진자, 은혜입은 자의 마음으로 완전히 탈바꿈 하는거지. 복음은 혁명적인 소식이야. 완전한 발상의 전환이야. 이걸 믿지 않을수 있어도 이런 일련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순 없을거야. 오히려 이걸 받아들였을때 세상이 훨씬 더 잘 이해되고 비로소 그 모든 설명되지 않았던 목마름과 고뇌가 채워짐을 경험하지. 진정한 자유가 너에게 찾아올거야.


소망도 없고 목적도 모르겠어. 더 열심히 해야할것 같아.

친구1: 요새 어떻게 사냐고? 별 재미없지. 기대하고 있는게 있냐고? 글쎄 비트코인도 안샀고, 주식이나 부동산도 타이밍을 놓쳤고, 커리어는 늘 제자리인것 같고. 그냥 정체되어있는것 같아. 크게 기대할 것도 없고 그렇다. 전에는 늘 열심히 살려고 더 스스로를 채찍질 했는데 그마저도 요새는 잘 안되서 좀 우울하네.

동료1: 진짜 열심히 하고 있는지, 나의 커리어는 제자리를 찾아 가고 있는지 자꾸 돌아봐야 되는것 같아요. 더 늦기전에 무언가를 이뤄야 할 것 같은데. 거창한 의미같은건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뒤쳐지지 않으려면 더 노력하는수밖에 없는것 같아요 정신바짝 차리고. 주위에 돌아보면 전 가진것도 없고 저한테 특별히 유리할 조건도 없어서 더더욱이 더.

친구2: 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냐고? 아니 사실 잘 못지내. 와이프와 관계가 많이 안좋아졌어. 그리고 사실 커리어도 밖에서 보기엔 벤처 캐피털 파트너에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난 내가 뭐하고 사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걱정과 두려움이 많아. 그리고 지난번 회사는 너무 잘못선택한것 같아. 내가 날린 기회비용은 진짜 수백억대야 – 그전 회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잠이 안와.

내 주위에서 늘 듣는 소리이다. 아, 다 너무나 공감이 가는 이야기 들이다. 이 말 자체는 맞는 말로 들리고 너무나 당연한 소리로 들린다는것, 나도 잘 안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나나, 딱히 바로 할 말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건강이 최고다, 그래도 우리가 이런건 있지 않냐 이런 상투적인 인사나 큰 도움안되는 위로로 대화를 끝내기 일수다.

죽을만한 열심? 왜? 어디를 향해? 전진뿐인 삶에는 궁극적 목적지가 없다.

죽을만큼 열심히 해봤어? 인생 만만치 않아. 죽어라고 살아야 겨우 남들만큼 살까말까야. 이 이데올로기는 비단 일과 커리어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아래 몇가지 예만 소개한다. 만약 이게 다라면, 정말 고통스럽고 피폐한게 우리 삶일 것이다.

  • 자녀교육: 아들아 딸아, 세상 만만하게 보지말아라. 공부해야지? 하며 애들을 들들 볶는다.
  • 공부: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하며 나의 성적과 학벌을 남과 비교하고 불안해 하거나 자조하거나 은근한 교만에 빠진다.
  • 한국: 남들보다 열심히 한다. 수학도 잘하고 문맹률도 전세계 최저수준이다. 하지만 과연 행복한가?
  • 자본주의: 주주수익극대화를 위해 모든게 돌아간다. 하지만 이게 최선인가? 빈부격차, 환경오염 등 이 인간성없는 자본주의가 나은 괴물은 어쩔 것인가.

그렇다. 우리는 늘 무언가에 쫓기고 또 쫓으며 살아간다. 더더 올라가기 위해. 하지만 왜? 어디를 향해? 라고 물으면 글쎄, 다 이렇게 사는거 아니야? 삶이 다 그런거 아니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난 지금 먹고살기만도 바빠 라며, 또는 일단 성공하고 나도 베풀며 살거야 정도의 막연하고 어정쩡한 대답밖에는 줄게 없는 것이 현대 사회이다.

어렸을때는 좋은 대학 가려고. 성인이 되어서는 좀더 이루고 좀더 성취하려는 삶. 우리의 목적은 전진과 상승이다. 하지만 왜? 어디를 향해?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우리 삶이 이게 다인가? 왜 가슴뛰는 소망이 없지? 왜 내 삶을 송두리째 던지고 싶은 목적이나 의미가 없지? 그런 질문한번쯤 해보면 어떨까?

열심의 저주. 더 빨리, 더 노력하고 수고해서 더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열심을 내고 채찍질 하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엘론 머스크는 여전히 몇시간밖에 안잔다더라. 스티브잡스는 이렇게 일했대더라. 누구는, 또 누구는. 난 여전히 부족하다.”. 과연 이런 접근법이 무엇이 문제라고 나는 이야기하는 것일까? 크게 아래 두가지의 문제점을 들 수 있다.

  1. 더 노력해서 더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것: 죽어라고 공부해서 의대에 갔는데, 법대에 가서 열심히 살아왔는데 본인의 적성과 이게 도무지 맞지 않는다고 나이 40이 넘어서 직업을 전환하려는 사람을 종종본다. 우리사회에 얼마나 만연한가. 남에게 뒤쳐지면 안되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가야한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쳤는데. 막상 약속된 그 충만함, 의미는 온데간데 없고 공허함만 남아서 중년의 사춘기를 겪는일.
  2. 정상에 올라가면 눈앞에 또 잡을것 같은 산이 나타나는것: 부자들에게 어떤게 진짜 부자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고 한다. “조금 더 갖는것”. 그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정상에 올라갔다고 생각한 순간 또 손다을듯한 고지가 보인다. 이 삶에는 추구는 있지만 궁극적 목적지, 골인지점은 없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소망도 없다. 잠깐 소망했던 그것은 또 지나가고 마는, 다음의 질주를 위한 동기부여가 될 뿐이다.

내 삶이 바로 그랬다. 이 글에 소개한 바 있다. 난 인생은 등산을 하는것, 정상을 보고 계속 오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열심히만 하면 그걸로 족하고 적어도 정직한 “열심”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줄 알았다. 아니, 정직한 열심은 얼마든지 나를 배신할 수 있다. 중요한건 무조건적인 전진이 아니다. 잠시 쉬고, 생각하고 성찰할 때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삶의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을.

내안에서 목적과 소망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내안에 내가 너무 많을때, 우리는 오히려 외로워진다.

그럼 어떻게 나를 찾을수 있을까? 어떻게 나의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상대주의/다원주의, 유물론 (물질이 전부이다, 영의 세계는 없다)으로 대표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지배적인 세계관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너 자신을 찾아. 자아를 실현해” 결국 유물론적 세계관에 볼 때, 과학과 진보가 궁극의 가치이고, 우리자신도 근면하여 내 자신을 개발하고 발견하고 또 누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된다. 과연 그럴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Love myself? 아니. 나의 욕망은 내가 아니다

스스로를 사랑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이 메세지가 얼마나 오히려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들고 외롭게 할 수 있는지 위 영상에서 잘 소개한다. 여기서 김기석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욕구, 욕망과 우리를 동일시 하지 말자. 욕망은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든다. 인간이 스스로의 욕구에 집중할 때,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지고, 그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수도 없고 오히려 더 외로워 진다는 것이다.

동의할 수 있지 않은가? 유행가 가사처럼,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을때”, 우리는 자기연민 (나 스스로가 불쌍하다는 마음)이나 자기의 (내가 옳다는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가 자기의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점점더 자신이 옳다는 그것에 매달리게 되고, 자기눈에 보기에 의롭지 못한 세상을 사랑할 수 없게된다 (과거의 나: 자기열심이란 자기의에 사로잡혀서, 열심히 살지 못하는 주위를 사랑할 수 없었음). 우리가 자기연민에 사로잡히면 어떻게 되는가. 1. 먼저 상처받고 억압받은 자신을 발견하고 주위 사람과 세상에 분노하고 미워하게된다. 2. 그리고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든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부정하고 미워하게 된다. 3. 그리고 스스로를 보고 살아가다가 결국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를 황폐화시키는 단계들이다. 혹시 지금 이 어디쯤에 와 있지는 않는가? 내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가 깨닫게 되는게 있다. 아 내 안에는 궁극적인 의미도, 변함없는 소망도, 완전한 자유도 없구나.

각자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라는 사회는 영적빈곤 사회이다.

복음에 인도되는 삶은 다르다 – 모두에게 강하게 추천하는 메세지

복음주의의 거장 팀 켈러는 2019년 말 복음에 의해 인도되는 삶 이란 주제의 설교에서 한 예화를 소개한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위 영상의 27-30분 부분을 보면 나온다.)

크리스천이 아닌, 유대인 무신론자 콜롬비아 교수는 미국인이 미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와 의미를 찾아온 여정이 크게 세 단계를 거쳤다고 분석했다. 1) 하나님의 나라 건설 (God) -> 2) 민주주의의 전파 -> 3) 자아실현 (self-fulfillment). 즉 다시말해 1)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다가 2) 과학기술과 윤리의 진보,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이상의 실현과 세계전파를 목적으로 삼다가 3) 지금은 자아실현을 삶의 목적이자 의미로 보고 있다. 그러나 3)은 미국의 문화를 해체시키고 있다. 스스로를 뛰어넘어 희생하고 헌신할 그 무엇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공동체를 이루고 더불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자아실현” 내러티브. 결국 각자 자신의 의미를 찾는 것이 진리이고 삶의 방식이라는 이야기의 허망함을 너무나 잘 짚었다고 본다. 물론 인간성의 선함을 믿는 인본주의 – 인간의 선함을 바탕으로 한 연대로 인해 유토피아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보는 세계관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마르크스를 기조로 한 유물론/인본주의). 하지만 인간의 이기심의 깊이와 뿌리에 대해 확고히 인지하는 세계관에서는 이기적인 인간이 저마다 각자만을 생각할때, 개개인은 의미없는 바다에 표류하게 되고, 사회는 영적인 빈곤에 의해 분열되고 해체되어 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기독교가 대표적이고, 기독교 아니더라도 수많은 세계관이 이에 동의한다 – 우리에겐 각자의 자아실현 이상의 공동목표가 있어야 인간들이 서로 공동체로 넘어설 수 있다는 것에.

Reality SF의 Dave 목사는 지난주 3월초에 – 다원주의 문화 한복판에서 거룩함을 입은 공동체로서의 교회 – 란 설교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은 다원주의 – 남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저마다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고, 다른 사람의 선택과 가치관을 존중하고 지지해 주는 것이 미덕이자 당연시 여겨지는 – 의 세상이다. 저마다 각자의 의미를 찾아가고, 그 어떤 공통의 가치관과 목표도 제시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모두는 물질의 풍요와 영적인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마치 팰러톤 자전거에서 운동할때, 사이버상의 트레이너가 나에게 “넌 너대로 최고야” 라는 소리를 듣는것과 마찬가지다. 그 소리를 들을땐 기분좋지만 나도 안다 내가 최고가 아니라는걸. 남들이 나보다 훨씬 몸도 좋고 잘생기고 멋지고 이쁘고 한데, 그런 소리를 계속 듣고 있으면 짜증나고 우울하고 자괴감에 빠진다. 그래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하고, 또 그런 위안에 스스로를 기대기도 하지만 늘 목마름을 느낀다.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이 아닐까.

우리에겐 우리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거기에 소망과 목적이 있다.

당신의 존재의 의미를 아시나요

위 영상에서 김기석 목사님은 우리가 가진 근원적인 질문 – 나의 존재의 의미는 뭘까. 목적은 뭘까. 나는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수많은 철학적 고찰을 소개하고, 계속 이렇게 묻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말한다.

위에서 소개했듯 내안에서 그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는 삶은, 눈에보이는 물질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외로움과 혼란, 개인주의와 영적 빈곤의 사회를 낳았다. 우리에겐 우리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영적인 물음과 추구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확실한 답을 준다 – 우린 부르심 받은 존재이다. 우리를 부르신 이가 우리의 존재의 의미를 준다. 물론 기독교 만이 이런 “나 이외의 존재에서로 부터의 의미나 목적, 삶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종교, 어떤 사상들이 있고, 복음으로 대표되는 기독교는 과연 다른 종교와 결국 같은것인가 또는 다른것인가 – 이걸 묻지 않을수 없다. 이하 2편에서 어떤 다양한 영적인 흐름이 있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는지, 그리고 그 중에서 왜 유독 복음만이 길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소망도 목적도 없다고? 절망하지마. 그걸 알게 된것이 큰 축복이야. 놀라지마. 너를 위한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 있어.

첫번째 글을 마치며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친구야, 소망도 목적도 없다고? 많이 지치고 공허하지. 나도 그랬어. 많이 힘들것 같아 마음이 많이 아프네. 하지만 절대 절망하지마. 아니, 오히려 기쁨으로 깜짝 놀랄 준비를 하는게 좋을거야. 왜냐고? 너를 위한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 있거든. 이건 먼저 내 혼자 힘으론 도저히 소망도 목적도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인식을 한 사람에게만 찾아올 수 있는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야. 그래, 스스로의 한계에 절망하게 된건 큰 축복이야.

그래,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것, 한계를 아는것. 하다가 안되는것을 체험한것. 이건 정말 큰 축복이다.

좀 억지스러울수 있지만 본인이 예전에 공부했던 고시공부를 예로 들어보겠다. 학생 A는 항상 고시시험을 치면 1차는 붙고 2차를 아슬아슬하게 떨어진다. 학생 B는 한번 시험을 보고 터무니없는 점수를 받고나서 아 이건 내가 도저히 붙을 수 없는 시험이라고 절망한다. 이 둘중 누가 더 축복받은 존재일까? 누가 더 소망과 목적을 찾기에 유리할까? 이하 소개할 복음의 렌즈로 봤을때, B가 훨씬 더 유리하다. 어차피 A도 B도 절대 혼자 힘으론 이 시험에 합격할 수 없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고 본인은 생각할지 몰라도 이 시험은 사실 인간은 절대 통과할 수 없는 불가능하게 어려운 시험이다. 그건 오직 100점, 한점 한획도 틀리지 않고 어긋나지 않은 완벽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거에 통과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당신이 학생 A라면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빨리 학생 B의 자각으로 이르기를 축원하고 싶다. 반면 학생 B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스스로의 한계에 절망하기에, 역설적으로 더 빨리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된다. 도대체 어떻게?

그게 복음이다.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절대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내려와서 우리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다고.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져서 해결해 주었다고. 그걸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고,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그 완벽한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고. 그 안에 흔들리지 않은 소망과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2) – 복음은 다르다 복음만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무언가 울림이 있다면, 무슨 이야기라도 더 해보고 싶다면, 무슨 하소연이라도, 고백이라도 해보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링크나 이메일 (san.baek@gmail.com) 으로 연락 주십사 초청한다.

About sanbaek

늦깍이 크리스천 (follower of Jesus), 우렁각시 민경이 남편, 하루하율하임이 아빠, 둘째 아들, 새누리교회 성도, 한국에서 30년 살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거주중, 스타트업 업계 종사중. 좋아하는 것 - 부부싸움한것 나누기, 하루하율이민경이랑 놀기, 일벌리기 (바람잡기), 독서, 글쓰기, 운동, 여행 예배/기도/찬양, 그리고 가끔씩 춤추기. 만트라 -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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