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과 목적#2 – 모든길이 하나로 통하지 않냐고? 아니, 은혜의 복음만이 우리 가슴과 우리 사회의 빈자리를 온전히 메꿀 수 있어

이번글은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 2편이다. 내 주위 사람들의 고뇌와 번민을 들으며 느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묵상하다가 쓰게 된 글이다. “너무 바빠. 별로 재밌는것도 없어. 남들은 다들 제자리를 찾고 잘 사는것 같은데 나는 나이만 먹는것 같아서 초조하기도 하고 그렇네. 이뤄논건 없고 삶이 정체된것 같아서. 뭐 인생 별거 있냐”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나 자주 듣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시간도 없고, 마땅히 할말도 없어서 그냥 건강이 최고다, 그래도 우리가 이런건 있지 않냐, 잘하고 있다, 이런 상투적인 인사나 큰 도움안되는 위로로 대화를 끝내기 일수다.

죽을만큼 열심히 해봤어? 인생 만만치 않아. 죽어라고 살아야 겨우 남들만큼 살까말까야.” 이런 생각을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다가 지쳐버린 친구에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건 그 두번째 이야기 (원래는 상/하편으로 썼는데 너무 길다는 피드백이 많아서 더 나눴다)다. 인생의 의미? 그건 각자 찾으면 되는거 아니야? 다 시작은 달라도 한 곳으로 향하는거 아니야? 는 질문에 대해 아래 대답해본다. 앞선글은 아래를 참고 바란다.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시리즈:

각자 의미를 찾으면 되는거 아니야? 서로다른 길이 다 하나로 연결되는거 아니야?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그래 유물론 (모든것의 근원을 물질로 보는것)이 근간이 된 현대사회에서 영적인 빈곤이 있을수 있다는건 인정해.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주의/다원주의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거나 알수 없으며 따라서 서로다른 의견이 모두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가 틀렸다는 거야? 그건 편협한 사고방식 아니야? 난 종교를 부정하지 않아. 오히려 니가 크리스천이라면 난 너의 선택을 존중하겠어. 그러니 너도 나나 다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해줬으면 좋겠어. 결국 내가 보기에 의미는 각자 찾아가는 거야. 니가 찾은 길이 절대적인 길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각자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기독교든 불교든 무신론이든 (명상등) 이슬람교든 힌두교든 다 결국 모든것엔 배울게 있고 모든건 하나로 통하는 면이 있다고 난 믿어.

그래 충분히 설득력 있고 그럴싸한 주장이다. 사실 나도 이렇게 생각했었다. 열린 마음, 포용, 다원주의 – 이 얼마나 좋은 말들이고 끌리는 가치인가.

복음은 다르다

여기에 대해 하고싶은 말이 매우 많지만 여기선 단 한가지 대답만을 하려 한다. (혹시 아래 나의 대답 외에 더 궁금하신 분께는 팀 켈러의 이 영상을 추천한다) “복음은 다르다” 라는 것. 그건 절대 다른 종교나 다른 신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름에서, 왜 복음만이 길이고 진리인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1. 복음은 “사건”이고 “뉴스”다. 가르침이 아니다. 모든 종교는 이것이 신 (또는 어떤 초월적인 세계)로 가는 길이다 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 나는 하나님이다 너를 찾으러 이땅에 내려온. 그 이미 일어난 사건, 소식이 복음이다.
  2. 복음은 짐을 덜어준다. 그건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다. 그건 우리를 완전히 해방하고 무장해제한다.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무 조건없이 공짜로 니가가진 모든 짐을 내가 가져갈게. 내가 다 그 값을 치룰게. 그냥 받기만 하면되.
  3. 인간은 진리를 찾을수 없다. 진리가 우리를 찾아온다. 그건 사상이나 사고방식이 아니다. 그건 한 존재이다. 우리의 모든 짐을 덜어주고 모든 문제의 근원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진리이고 생명이고 길인 한 존재이다.
  4. 복음은 바로 그 진리되신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건 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사상의 흐름”, “사고의 방법” 같은게 아니다. 복음이 이야기하는 진리는 어떤 사고방식이 아니다. 그건 한 사람 – 곧 예수 그리스도 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우리가 알고 관계를 맺고 대화할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5. 그 사람이 아무런 조건없이, 공짜로,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지고 값을 치루었다는, 빚을 갚았다는 좋은 소식 – 복음 – 의 핵심은 은혜이다. 그 은혜는 우리가 가진 본질적인 문제 – 이기심을 완전히 잠재운다. 아무 자격없이 거저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주위로 나가게 만든다. 이건 우리 개인과 사회가 가진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 숨어있던 퍼즐이다. 유물론과 세속주의 (신은 없으면 이세상 눈에 보이는게 다라는 사고방식)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든다. 모든 종교는 인간을 좀더 이타적으로 만들지 몰라도 부족화 (경계를 치고, 진리를 파악한 사람들끼리 부족을 이루려는)한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빚진자, 자격없이 빚갚음을 받은자라는 정체성을 줘서 우리로 하여금 주위를 향해 희생하고 헌신하게 한다.

복음은 사건이다. 가르침이 아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내 모든짐이 없어진 그건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다

복음에 인도되는 삶은 다르다 – 모두에게 강하게 추천하는 메세지

앞선 글에서 소개한 팀 켈러의 복음에 의해 인도된 삶을 다시한번 가져온다. 여기에서 팀 켈러는 위에 소개한 1번과 3번을 자세히 설명한다. 복음은 어떤 일련의 숙달하고 배워야 하는 가르침 같은게 아니다. 종교적 영적 수련을 해서 해탈이나 열반에 가는것과도 전혀 다르다. 복음은 하나의 일어난 사건이고, 그건 우리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절대 짐을 지우는것이 아니다. 복음 – 그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대신 빚갚음에 대한 이야기, 좋은 소식이다. 그거에 대해 우리가 할일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아무짐도 지지 않아도 된다.

복음은 거저 받는 선물이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짐을 덜어가는 것이다. 그건 진짜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다.

인간이 진리를 발견하는게 아니다. 진리가 인간을 찾아온다. 진리는 사상이나 세계관이 아니다. 한 사람이다.

성 어거스틴 – 고백록 (Confession)을 다룬 영화

위 영화는 그 유명한 기독교의 고전 – 고백록 (또는 참회록) Confession – 의 저자, 성 어거스틴의 삶을 다룬 영화다. 세시간 짜린데 한달음에 봤다 진짜 재밌다 비 크리스천에게도 강추한다. 4세기 로마가 어떠했는지 너무나 잘 묘사된다. 주인공 어거스틴은 무신론자였고, 화려한 언변으로 황실을 변호하는 변호사이자 웅변가였다. 그의 커리어는 말그대로 승승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크리스천 신부를 알게되고, 그와 화려한 말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된다. (위 영상의 2시간01분 ~2시간03분 부분)

인간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야. 진리가 인간을 찾아오는 거지. 진리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그건 이데올로기가 아니야. 그건 일련의 옳고 그름에 대한 정답도 아니야. 그건 사람이야. 예수 그리스도지. 인간은 진리를 발견할 수 없어. 오직 우리는 진리가 우리를 찾아오도록 스스로를 내어줄 수 있을 뿐이지.

복음은 바로 그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우리가 대화하고 알아갈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종교는 다 똑같은거 아닌가요에 대한 대답 – 기독교는 다르다

위 영상에서 김학철 교수님은 다른 신앙과 기독교의 차리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결정적인 차이는 “예수”라는 한 분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도대체 어떤 분이길래.

복음주의의 거장 존 스토트 목사님의 설교 – 예수그리스도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진리이고 유효한가

2021년 소천한 20세기 복음주의의 거장 존 스토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진리이고 유효한가” 란 위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른 종교나 다른 이데올로기와는 왜 철저히 다른지 예수그리스도의 다섯가지의 고유함 (uniqueness) 로 설명한다. 1) 그의 주장 2) 그의 죽음 3) 그의 부활 4) 그에 대한 찬양 5) 그가 남긴 성령이란 선물, 이 다섯가지가 다른 종교나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다른 예수그리스도 만의 특유함임을 존 스토트는 이야기한다. 모두에게 권한다.

여기에서 그는 위에 소개한 2번 – 기독교, 크리스티아니티는 어떤 사상이 아니다. 이건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라는 점을 명확하게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달랐는지 – 그의 주장 (직접 하나님의 아들임을 예표하는 주장들), 그의 죽음 (모든것을 떠앉고 희생하는 죽음), 그의 부활 (죽음에서 살아남), 그에 대한 찬양 (성서에 나타난, 모든만물이 그를 경배한다는) 등을 통해 설명한다. 특히 다섯번째 포인트, 위 영상의 34-40분, 예수님이 준 선물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를 추천한다. 성령은 크게 네가지를 한다고 존 스토트는 이야기한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형으로 만듬 (Contemporary) 2) 예수 그리스도를 모두에게 전달 (Universal) 3)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거하게 함 (Indwellling, Internal) 4) 예수 그리스도를 공유할수 있게 만듬 (Communal). 아, 난 한번도 이렇게 성령님의 역할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성령님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란 한 사람을 우리에게 이렇게 생생하게 연결해준다.

그는 과거의 역사속의 인물, 책에서 나오는 그런존재가 아니다 – 석가모니, 마호메트, 이런 사람처럼. 그는 살아있는 사람, 우리가 대화하고 관계맺을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 모두가 늘 함께하고 우리속에 거하며 관계 맺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성령님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그건 엄청난 선물이고 엄청난 신비이다.

그 한 사람은 우리 가슴속의 모든 빈자리를 메운다. 미처 몰랐던 퍼즐처럼 우리를 온전케 한다. 그리고 우리사회를 하나되게 하고 회복시킨다.

위에 소개한 존 스토트의 설교의 마지막 메세지는 다음과 같다. 예수그리스도의 이 다섯가지의 고유함이 완벽한 증거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만한 충분한 증거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며 우리에게 두가지를 더 이야기한다. 첫째, 이 다섯가지의 고유함이 서로 매우 일관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일련의 스토리를 이루고 있음을 – 서로 대치되는것이 없고 서로의 일관성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줌을. 둘째, 이 다섯가지의 고유함이 우리가슴이 필요로 하는 우리의 필요와 정확히일치 함을.

예수그리스도의 다섯가지 고유함.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채워지지 않았던 그것을 온전히 채운다. 우리 모두는 조금더 좋은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면서도 늘 좌절하고 있지 않나. 우리는 평화와 안식을 얻기위해 늘 경주하지만 항상 뭔가 목마르지 않는가. 이 다섯가지의 예수의 고유성은 우리의 필요와 정확히 일치한다. 마치 미처 존재한지도 모르고 있었던 퍼즐처럼.

기독교에선 그걸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누구나 존재를 증명하려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려는 갈망이 있는데 그건 우리의 창조주이자 온전하신 그분만이 메꿀수 있는 거라고.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기에, 우리를 그분과 사랑하고 사랑받게 만드셨기에, 우리 안에 그 갈망을 만드셨다고. 그런데 세상에 불완전성이 들어와서 – 기독교에서 죄라고 부르는 –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그래서 우리는 다른것으로 그 갈망을, 그 구멍을 메우려 하는데 그것이 권력이나 재물, 남들의 인정이든, 심지어는 일이나 가족이나 아무리 좋아보이는 거라도, 절대 그건 우리안의 그 구멍을 메울 수 없다고. 오직 하나, 절대적이고 완벽한 그분만이 우리의 가슴의 구멍을 메우고 우리를 그 모든 갈망에서, 그 모든 추구에서 해방할 수 있다고. 그건 우리힘으로 회복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그래서 그분이 왔다고.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난 그런 도움 필요없다. 난 나혼자힘으로 충분히 선하고 멋진 삶을 살 수 있다. 또는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난 명상과 침묵, 사색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고 더 나은 사람이 될 힘을 얻고 있다고. 또는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내가 가진 다른 종교나 사상이 나는 진리라고 믿는다고.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복음에만 있는것 – 은혜 – 가 우리 가슴의 구멍을 메우는 퍼즐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팀켈러는 그의 저서 – The reason for God (하나님을 말하다) 에서 소개한 은혜의 절대성을 내가 일부 각색한 것이다.

인간이 가진 이기심 – 자기 중심성 –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하고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가져가려 하는것. 이게 우리가 가진 본질적인 문제이다 (기독교에서 죄성이라고 하는). 그 해결책은 은혜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아무 도움없이 스스로 충분히 멋진 삶을 일굴 수 있다고? 그 스스로 한 선한일 때문에 인간은 더욱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자기의(self righteous)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될때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해방될 수 없다. 그 안에는 끈임없는 추구나, 아니면 이게 다인가 하는 허무감, 공허함이 늘 멤돈다.

선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거나 선택을 받는다는 믿음 – 이슬람교로 대표되는 – 의 한계는 이것이다. 결국 나의 선한 행위, 윤리적인 삶이 정체성의 근간이 되기에, 주위에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판단하게 되고, 스스로에게 늘 채찍질함으로써 안으로 심령을 망가뜨릴 수 있다. 행위중심 신앙의 동기부여는 채찍이다. 즉 이건 짐 지우는 것이다. 개인에게 해방을 주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는 공격적인 갈등의 소지가 될 수 있다.

윤회적인 사고방식이나, 자기영성 수련에 초점을 맞춘 영적 흐름 – 힌두교나 카르마, 불교 등 또한 한계가 있다. 이건 우리가 가진 이기심 – 자기중심성 -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전제를 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 설사 소수에게 엄청난 수련을 통해 가능하다고 가정할지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걸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보자면 결국 개인적 차원이 영성만을 강조하여 사회의 문제 (빈부격차, 소외받는 이웃 등)를 해결할 수 없다.

은혜는 그 동기가 은혜의 감격이다. 기쁨이다. 사무치는 겸손과 자신감을 동시에 가져온다. 그리고 삶이 삐그덕댄다 하더라도 흔들림이 없다. 은혜는 삶의 지배권을 포기하게 한다. 모든것을 드리게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게 한다.

이거에 대해 이 자리에서 모든 설명을 할 순 없겠지만 한가지 확실히 복음이 다른것과 다른부분이 있다. 그건 복음 – 은혜의 소식 – 은 우리를 이타적으로, 더 나은 존재로 만들면서도 그걸 우리안에서 멈추게 하는게 아니라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의 아픔을 직접 희생과 헌신으로 메꾸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아까 위에서 이야기한 것이 우리 인간 개개인의 가슴에 있는 잊어버린 퍼즐이라면, 복음은 우리 사회의 구멍을 메꾸는 잊어버린 퍼즐이다.

위에 소개한 팀 켈러의 “복음에 의해 인도된 삶 에서, 팀 켈러는 복음이 상대주의나 세속주의, 타 종교와 달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의 소망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유물론과 세속주의 – 결국 눈에 보이는것, 이 세상이 다라는 믿음 – 은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든다. 다른 사람에게 굳이 관여할 이유도 없고, 법을 지키며 큰 해악 안끼치고 살면 됐지 그 이상의 도덕적인 삶을 살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종교는 우리를 기본적으로 더 이타적으로 만들지 몰라도 부족화 시킨다. 나는 맞고 상대는 틀렸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우월감을 주고 우리와 남을 나누게 만든다. 하지만 복음은 다르다. 복음은 철저하게 아무런 자격없이 거저받은 엄청난 선물, 엄청난 빚갚음이다. 내가 도저히 갚을수 없는 빚을 거저 탕감받은 사람은, 그걸 진짜 아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주위를 위해 사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희생한다. 그래서 복음은 이땅의 소망이다. 복음이 문화에 깊숙히 박힐때, 사회는 희생과 헌신과 용서와 화해로 가득차게 된다.

내안에 내가 너무 많다. 우리가 너무 많다. 아니면 사랑과 희생이신 그분안에 새롭게된 우리가 다 같이 있다.

세계관 – 무엇을 믿느냐 (The Worldview)종교Origin of evilOrigin of healing 한줄요약문제점
유물론, 세속주의 (이삶과 눈에보이는것이 다이다. 영적인 세계나 신은 없다 (or 알수없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무신론인류의 능력부족 + 인간이 만든 모든 굴레와 억압 (계층갈등, 종교적 억압, 정치적 억압) 물질문명의 진보 +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 혁명 (성혁명, 계층혁명), 근면하라. 너 자신을 즐겨라. 대범해져라. 너 자신을 개발하라 내안에 내가 너무 많다 
행위중심 신앙 (도덕적인 삶, 선행을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자비를 입다)  이슬람천국과의 분리, 육체적 타락선지자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 그것에 순종하는 것  복종하라. 너 자신을 확고히 하라. 선하게 살아 그 분의 심판앞에 임하자내안에 우리가 너무 많다 
자기초월적 신앙 (윤회하는 섭리를 받아들이기.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기) 힌두교/불교 집착 (attachment) 집착은 고통의 근원이다. 집착에서 벗어나라. 너 자신에서 벗어나라내안에 나도 우리도 없다
은혜의 신앙기독교 죄 (불신과 불순중에서 찾아온 하나님과의 분리)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 –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것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어라. 너 자신을 내어주라.내안에 사랑과 희생의 예수가 있고 그 안에서 우리가 다 하나된다

표로 정리해보자. 세계관 –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에서, 크게 네가지 갈래의 세계관을 분석해 보았다. (물론 딱 한 분류로 넣었더라도 구체적인 부분에선 매우 다를 수 있다 (힌두교 불교 등). 여기선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렇게 본다)

  1. 유물론 – 눈에보이는게 다이고 물질문명의 진보와 이를통한 자아실현을 궁극적인 가치로 여기는 세속주의 세계관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근면하라. 너 자신을 즐겨라. 대범해져라. 너 자신을 개발하라. 현대의 무신론, 상대주의와 다원주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 아무리 노력하고 성취해도 여전히 공허함을 목마름을 경험한다.
  2. 행위중심 신앙 –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그분의 심판앞에 서고 자비를 입는다는 이슬람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복종하라. 너 자신을 확고히 하라. 선하게 살아 그 분의 심판앞에 임하자. 무엇이 문제일까? “내 안에 우리가 너무 많다.” 사회로 나가는 근본적인 동기가 거저받은 사랑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 이렇게 살아야 복받고 천국갈 수 있다는 “해야한다” 이다. 행위중심 신앙의 동기부여는 채찍이다. 즉 이건 짐 지우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공격적인 갈등의 소지가 될 수 있다.
  3. 초월적 신앙 – 집착이 고통의 근원으로 보는 불교나, 내안의 영성이 있다는 힌두교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끄로운 세상에서 침묵하고 내면에 집중할 때, 침묵과 명상, 수련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영성이 있다. 혼자가 되어 본성을 발견하라. 모든 집착에서 해방하라. 무엇이 문제일까? “내 안에 아무도 없다”. 이건 위에서 이야기했듯, 개인적으로 도달할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인적 차원이 영성만을 강조하여 사회의 문제 (빈부격차, 소외받는 이웃 등)를 해결하는데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4. 은혜의 신앙 – 온전하신 그분과의 분리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우리가 직접 해결할수 없기에 관계를 회복하려 대신 모든빚을 떠안으신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이라는 기독교의 믿음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어라. 너 자신을 내어주라. 이때 어떻게 되는가? “내 안에 나와 우리는 없고 사랑과 희생의 예수그리스도만이 있다. 그리그 그 안에서 새롭게 된 나와 우리가 다 하나된다.”

어떤가. 왜 복음만이, 왜 거저입은 은혜만이, 우리가슴속의 갈망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는지, 우리사회문제의 소망이 되는지 이해가 되는가.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것. 우리가 너무 많은것. 나도 우리도 없는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타심, 희생, 무조건적인 사랑, 그걸통해 우리를 절대적이고 온전한 하나님과 연합하는 그분이 내안에 있을때, 모든 갈증이 사라지고 모든 짐이 없어지고 사회는 용서와 희생과 헌신과 화해로 회복된다.

그렇다. 복음은 다르다. 예수그리스도는 다르다. 그분은 진리이다. 그분은 삶이다. 그분은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그분만이 소망이다. 나에게도,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나는 자신있게 그렇게 믿는다. 아래 다양한 세계관과 그 메세지를 다시한번 소개한다.

그리스 사람은 말합니다 “겸손하라, 너 자신을 알라”

로마인은 “강해져라 너 자신을 체계화하라”

유교에서는 “위대한 자가 되어라. 너 자신의 단점을 고쳐라.

”일본의 신도 (Shintonism)는 “충성하라. 너 자신을 억눌러라”

불교에서는 “집착에서 벗어나라. 너 자신에서 벗어나라”

힌두교에서는 “혼자가 되어라.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라”

이슬람교는 “복종하라. 너 자신을 확고히 하라”

유대교는 “성스러워저라. 너 자신을 새롭게 하라” 

한국 무속신앙은 “기도하라. 복을 주실 것이다.” 

현대의 물질주의자는 “근면하라. 너 자신을 즐겨라”

현대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범해져라. 너 자신을 개발하라” 

기독교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어라. 너 자신을 내어주라.”

다음편 – 소망과 목적#3 – 증거없이는 못믿겠다고? 우리 모두는 증거없이 무언가를 믿고있다 – 에서 계속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무언가 울림이 있다면, 무슨 이야기라도 더 해보고 싶다면, 무슨 하소연이라도, 고백이라도 해보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링크나 이메일 (san.baek@gmail.com) 으로 연락 주십사 초청한다.

About sanbaek

늦깍이 크리스천 (follower of Jesus), 우렁각시 민경이 남편, 하루하율하임이 아빠, 둘째 아들, 새누리교회 성도, 한국에서 30년 살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거주중, 스타트업 업계 종사중. 좋아하는 것 - 부부싸움한것 나누기, 하루하율이민경이랑 놀기, 일벌리기 (바람잡기), 독서, 글쓰기, 운동, 여행 예배/기도/찬양, 그리고 가끔씩 춤추기. 만트라 -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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