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과 목적#4 – 세상의 악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정할 수 없어. 그분의 절대성과 은혜에 자유와 소망이 있는거야

이번글은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 4편이다. 내 주위 사람들의 고뇌와 번민을 들으며 느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묵상하다가 쓰게 된 글이다. “너무 바빠. 별로 재밌는것도 없어. 남들은 다들 제자리를 찾고 잘 사는것 같은데 나는 나이만 먹는것 같아서 초조하기도 하고 그렇네. 이뤄논건 없고 삶이 정체된것 같아서. 뭐 인생 별거 있냐”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나 자주 듣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시간도 없고, 마땅히 할말도 없어서 그냥 건강이 최고다, 그래도 우리가 이런건 있지 않냐, 잘하고 있다, 이런 상투적인 인사나 큰 도움안되는 위로로 대화를 끝내기 일수다.

죽을만큼 열심히 해봤어? 인생 만만치 않아. 죽어라고 살아야 겨우 남들만큼 살까말까야.” 이런 생각을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다가 지쳐버린 친구에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건 그 네번째 이야기다. 세상의 악, 세상의 부조리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이 질문에 대답한다.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시리즈:

좋은 소식? 선하신 하나님? 세상의 악과 부조리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자 여기까지 잘 따라왔다면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뭐? 좋은 소식?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신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후 부활했다는 그 허황된 이야기를? 그걸 믿기만 하면 영원한 삶을 누리고 바로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고? 난 못믿겠어.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고도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와? 세상은 결국 능력주의 (Meritocracy) – 능력있고 결과 내는 사람들이 보상받고 누리고 사는 – 의 세상 아니야? 결국 하나라도 노력해서 더 이루는게 중요하지, 모든게 벌써 다 이뤄졌다는 그런 한가한 소리는 내게 아무 도움이 안되는거 같아. 그리고, 소위 말해 믿는다는 사람들, 교회의 위선과 교만과 잘못들은 어떻게 설명할건데? 내가 굳이 이야기 안해도 너도 잘 알거야. 그래서 별로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고, 그런 아집과 위선과 나를 엮고 싶지도 않아. 그냥 내가 보기엔 그건 착각이고 허황된 소리야. 지금의 세상을 보고, 너나 다른 크리스천이 말하는 그런 선하고 완벽한 하나님이나 구세주를 믿는거는, 그냥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믿는거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아. 난 일없다.

그래, 충분히 일리있는 지적이다. 쉽지 않은 문제들이다. 결국 이러한 논리적 흐름, 사고방식이다.

  1. 크리스천이 이야기하는, 성경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전지전능하다
  2. 세상엔 악과 부조리가 있다
  3.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선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이 아닐 수 없다 – 악의 문제. 쉬운 질문은 아니지만 아래 몇가지로 대답해본다.

세상의 부조리는 인간의 불순종에서 왔다. 그건 하나님의 절대성을 손상시킬 수 없다.

조지 스테이너의 소설 “A.H의 산 크리스토밭으로 가는 길”은 20세기 최고의 문제작으로 꼽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아돌프 히틀러가 2차대전에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도망치던 그가 끝내 체포되어 인류에게 저지른 엄청난 범죄에 대해 재판받는 과정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유대인을 말살시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유대인은 인류에게 가장 큰 암으로써 반드시 제거해야 했소. 최종적인 해결책이 필요했소. 여러분 제발 내 말을 들어보시고. 역사상 이보다 더 잔인한 발명. 즉 전능하고 전지하고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고 불가해한 신을 고안해서 인간 존재에 해를 끼친 것보다 더 악한 발명이 있었소?

첫째 – 모든것을 요구하는 시내산의 신 – 유대인은 자신들의 신을 인간의 지각으론 헤아릴 수 없는 멀리 떨어진 완벽한 존재로 설정하고 그것에 대해 형상을 만들어서도 안되게 하면서 신을 분리시켰소. 하지만 그는 무서울 정도로 가까이 있는 존재, 우리의 잘못된 행위와 마음속 깊은 동기를 꿰뚫어보는 존재요. 그는 절대적이고 선한 유일신이요. 이보다 더 총체적인 강포가 어디에 있소? 신들이 유한하고 오류가 있는 존재이기만 해도 우리의 실패를 그들에게 전가키실 우 있지만, 유대인의 신을 가정할때 모든 잘못은 우리의 것이 되고 마는것 아니요.

둘째 – 뻔뻔한 나사렛인, 끔찍할 정도로 달콤한 그리스도 – 인간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이상의 것- 더 높은 이상, 더 높은 명분을 제시하여 그들에게 오염되고 이기적인 인간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라. 그러면 그들을 절름발이, 위선자, 구원을 구걸하는 거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현재의 존재 이상의 것을 요청하고 그의 지친 눈망울 앞에 이타주의, 연민, 자기부인, 희생 등 성자나 광인에게나 합당한 이미지를 들이대라. 그리고 그를 고문대에 누이고 잡아당겨라. 그의 영혼이 터질때가지. 이게 예수그리스도의 간교함이다. 유대인의 이상 중독증보다 더 잔인한게 어디 있소?

셋째 – 랍비 마르크스의 세속화된 메시아주의 – 즉 정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다음 월요일아침에 온다 라는 공갈이요.

초월성이라는 공갈, 완전성이라는 세균, 유토피아라는 바이러스 요. 이보다 더 잔인한 발명이 어디에 있소? 사악한 공갈이 어디에 있소? 이게 유대인을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요.

아 무릎을 치고 감탄했다. 이 작가의 상상력에도 혀를 내두리지만, 내가 할말을 잃은 것은 히틀러를 통해 제시된 이 세가지가 복음의 절대성과 무오성을 너무 잘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 다시한번 복음을 세가지로 정리해본다.

  • 1) 완벽한 창조주 (모든것을 요구하는 신) : 절대적이고 선한 유일한 신, 인간의 제한된 도덕성과 선함으론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완벽한 존재. 우리의 모든것을 꿰뚤어 보는 절대자. 한치의 불의도 용납할 수 없는, 완벽한 정의만을 받아들이는 공의롭고 정의롭고 완벽한 심판자.
  • 2) 희생한 그리스도 (끔찍할도록 달콤한 그리스도) : 완벽한 창조주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찾아온 모든 문제들로 인간과 창조세계가 오염되고 고통속에 거하고 있을때, 바로 그 완벽한 신이, 우리에게 내려와 우리의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하고 우리를 위해 희생한 것 – 그것이 그리스도 (메시아). 그 사건.
  • 3) 함께하는 영원한 삶 (정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바로 다음날 아침에 온다는 약속): 위의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찾아오는 함께하는 영원한 삶.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걸 지금 바로 살아낼 수 있고, 완벽한 그 세계, 고통없고 악 없는 정의의 세계가 지금 여기에, 바로 그 다음날 온다는 약속.

그래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세상의 부조리함, 악의문제, 그 어떤것도 선하고 완전한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이건 현타 같은거다. 신을 원망한다고? 세상의 악을 허용하는 신이 있으면 밎지 않겠다고? 1) 복음은 먼저 강펀치를 날린다. 정신차려 – 창조주 하나님은 완벽하고 그의 창조는 완벽했어. 모든 죄악은 창조물인 인간의 불순종에서 비롯된거야. 우린 죽었다 깨나도 그 완전한 하나님의 완전성과 선함에 다가갈수도 범접할수도 다 이해할수도 없어. 2) 그리고 우리가 그 강펀치에 헤롱대고 있을때 또 하나의 어퍼컷을 날린다. 그게 끝이 아니야.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은것. 그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여 모든걸 희생한것. 그게 복음이야. 3) 그리고 마지막 파이널 블로우를 날린다. 그건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야. 바로 이 앞에 있어 맛볼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거야. 그리고 그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할거야. 그 영원한 사귐과 하나됨의 초대에 Yes로 응하겠니?

복음은 진짜 모아니면 도다. 복음이 거짓이라면 그건 소설속의 히틀러가 이야기한 것 처럼 인류역사상 가장 악독하고 악랄한 상상과 말도안되는 공갈일수도 있다. 우리를 정신못차리게 만드는 세방의 강펀치, 이건 칼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인민의 아편일 수도 있다. 만약 그게 아니라 복음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이 복음은 절대적이다. 그 무엇도 절대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부조리들, 결과만이 중요하고 결과를 통해 모든것이 판단받는 세상의 현실과 작동원리, 교회의 위선과 잘못들, 이런것들은 넉넉히 설명되고도 남는다. 그런 것들은 1) 완벽한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해도, 그건 완벽한 창조주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2) 절대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불완전함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즉 죄악으로 인해 분리되고 떨어진 (Fall) 우리의 해답없음 (Helplessness)과, 희생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더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3) 함께하는 정의롭고 공의로운 삶과 세상을 향한 소망을 품어야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창조의 회복 – 개혁주의 세계관에 대한 성경적 고찰

위 책은 루소와 칼뱅에 의해 정립된 개혁주의 개신교의 세계관을 매우 쉽고도 깊이있게 설명한다. 결국 모든 것은 아래 세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에서 소개되는 개혁주의 개신교의 세계관이다. (이하 자주 소개할테니 잊지말자, 1, 2, 3번이다)

  1. 창조 (Creation) (시작): 완벽한 창조. 하나님의 완전하고 선한 창조의 질서와 구조.
  2. 떨어짐 (Fall) (분리):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오면서 선한 창조와 철저히 분리되어 버린 상태.
  3. 구속 (Redemption) (회복):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완전한 회복.

이 세계관의 핵심중 하나는 1번과 2번의 완전한 분리이다. 즉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문제들은 절대로 1번 선하고 완벽한 창조의 흠을 내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이야기와 일맥 상통한다.

그럼 애초에 불순종할 건덕지를 왜 만드신거야? 하나님은 새디스트야? 아니,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도록 리스크를 지신 것이다.

사실 위의 질문은 나를 아주 오랫동안 괴롭혔던 질문이다. 크리스천이 되고 나서도 거의 최근에 이르기 까지 그 누구도 내게 이 질문에 대해 명쾌히 대답해 주지 못했다. 하나님은 도대체 선악과를 왜 만드신건가. 왜 애초에 악을 만든걸까. 처음부터 우리를 천국에서 창조할순 없었을까? 그냥 그렇게 했으면 제일 좋을것 같은데 왜 세상에 악을 (또는 악이 될 수 있는 무언가를) 창조하셔서 이 고통을 우리에게 만들고 겪게 하는가. 도대체 왜…무신론자인 친한 형이 나에게 한 질문을 아직도 잊을수가 없다.

산, 뭐라고? 완전하고 선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야 말도마. 하나님은 새디스트야? 고통과 악을 창조하고, 인간이 고통당하는걸 보고있는? 그런 새디스트 하나님 난 일없다.

믿지 않은 아버지와 믿는 아들간의 3년간의 신앙적 문제에 대한 편지를 다룬 책, 한국어 번역: 한 무신론자의 편지 (지금은 절판)

위의 책에서 무신론자 아버지는 이 질문을 몇번을 걸쳐 아들에게 던진다. 하나님은 도대체 악을 왜 만든거야. 하나님이 완벽하지 않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선하지 않거나 아니야? 선하고 완벽한, 모든걸 관장하고 모든것 위에 계신 하나님이 이런 악한 세상을 창조한것 자체가 모순 아니야?

이것에 대해 아들이 계속 참을성 있게 조근조근 설명한다. 아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 하나님은 인간을 영적 존재로 만드셨어. 그건 인간에게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준것,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을 지도록 만든거야.
  • 자유는 인간이 선한일도 할 수 있게 만들고 악한 일도 할 수 있게 만들었지. 선과악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기에, 이걸 다른말로 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 (surrender)하고 살수있게도 만드셨고, 불순종 할 여지도 남겨놓으셨어. 그것이 자유이기에.
  • 왜 그런 가능성을 만드셨냐고? 사랑하기 때문이지. 순종만 할 수 있게 만드는건 사랑이 아니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봐. 우리가 컴퓨터 AI로봇을 만들고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게 하고 모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얼굴과 성격과 목소리를 만들어도 그건 결코 진정한 사랑이 아니야.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내면에서 우러나와야만 가능한거야. 그건 강제할 수 있는게 아니야.
  • 리스크를 질때만 사랑할 수 있어. 그건 상처받거나 배신당할 수도 있는 리스크지. 그런 리스크 없이는 사랑할 수 없어. 상대를 믿고 상대에게 나를 걸었기에, 배신당할 수도 있고 그걸로 상처받을수도 있는
  • 이건 너무 잔인한거 아니냐고? 하나님이 실수하신것 아니냐고? 아니, 하나님은 사랑하기에 엄청난 리스크를 지셨어. 그리고 그건 결국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대신 희생시키는 엄청난 값을 치루게 하셨지.
  • 그냥 그렇게 아니고 처음부터 자유롭되 완전한 존재로 만들수는 없었냐고? 천국에서 바로 창조할 순 없었냐고? 그건 불가능해. 왜냐하면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유의지로 그 선택에 책임지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야. 하나님 본인이 그걸 보여주셨지.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본인을 전인격적으로 내주는 존재야. 그런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되려면 우리는 영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내어주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그 선택을 해야해. 그래야지만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거야. 그래야지만 천국이 가능한거야. 모든 영적 창조물은 그 과정을 꼭 겪어야만해. 그것 없이는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될 수 없어.

아. 풀리지 않는 실마리가 보이는듯 했다. 자유의지를 지닌다는건, 순종할수도 불순종할수도 있는 존재가 된다는것. 마치 시계추처럼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선택권을 지닌 존재가 된다는 것. 믿음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상대에게 내어줄수도, 아니면 스스로 옳고 그른대로 행하고 스스로가 자신의 중심이 될수도 있는 그런 존재. 그리고 그런 과정 없이는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를 전인격적으로 내어주는 그 하나님과 하나될 수 없다고.

시험은 훈련일수 있다. 그리고 우린 그 훈련을 통과해야만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다

Bible project – The Test

위 영상에서 Bible project는 이렇게 설명한다. 시험이 다 나쁜것이 아니다. 그 시험과 훈련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면, 그건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볼때 선악과로 대표되는 “시험”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한 꼭 필요한 훈련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이런식이다. 진정한 믿음과 하나됨은 자기를 상대에게 온전히 내맞기는 (Surrender)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온전한 존재이시기도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를 섬기고 서로에게 스스로를 내어주는 존재이다. 즉 상대를 믿고 스스로를 내어준다는 것은 그분의 속성 그 자체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받았고 그분과의 연합, 영원한 사귐과 하나됨으로 초대받은 존재다. 그래서 우리에겐 이 훈련이 필요했다. 이 훈련을 거쳐야지만 우린 그분과 하나될 수 있다. 그건 에덴동산의 아담이나, 지금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마치 함정을 파듯이 불가능한 시험을 내놓고 떨어지기를 기다리는분이 아니다. 아니 떨어진 우리를 위해 직접희생해서 그 훈련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다. 그리고 지금도 오래참음으로 기다리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해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의 선택의 책임을 지게, 그리고 그 훈련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셨다는 이 알것도 같고 모를것도 같은 이야기 위에 하나가 더있다. 그건 하나님의 모범, 그리고 기다림이다.

만약 이 모든게 사실이라면 인간은, 인류는 그 시험과 훈련에 실패했다. 타락한 천사 루시퍼처럼 하나님과 떨어져, 많은 경우 스스로 우상을 만들고 온갖 불법을 저지르는 존재가 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런 인류를 멸하고 다시 새로운 존재를 만들수도 있었으리라. 실제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흔치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아의 방주이다. 바벨탑을 쌓는 인류를 심판하여 재앙을 내리셨지만 노아의 신실함을 보고 하나님은 인류를 멸하지 않기로 약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쩔 수 없는, 완전히 떨어져 버린 그 인간을 위해 직접 오셨다. 그리고 몸소 그 시험을 통과하는,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그 훈련을 온전히 견디는 모범을 보이셨다. 이게 가장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도대체 왜? 신이 인간이 되었다고? 이슬람에선 도저히 믿지 못하는, 코웃음을 칠법한 이야기다. 그 엄청나게 위대한 신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냐고. 그것에 대해 오스와드 챔버스는 이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목: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순종”.

우리가 구원에 대해 생각할때 죄에서 사함받는것, 정결케되는것 이런걸 생각하기 쉬운데, 구원이라 함은 그런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다. 그것은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진정한 순종을 할때, 우리는 순종하고 있다는 그것도 잊어버린다. 우리안에 내가 하나도 없고, 우리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서 태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우리를 향한 순종을 이해하기 전에는 진정한 순종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히 완전하게 그분을 내어주셨다. 그게 예수그리스도로 이땅에 내려오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순종이다. 그분이 우리를 향해 모든걸 남김없이 내어주신것을 이해할때, 우리도 진정 그분에게 모든걸 내어준다는게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그분께 자신을 내어줄때, 우리는 순종한다는 생각도 잊어버린다 – 우리안의 모든것이 그분에 의해 태워지고 그분이 우리를 통째로 거두었기에.

그렇다. 하나님은 시험에 실패한 인간을 위해 직접 시험을 당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지금도, 오래참음으로, 손을 내밀고 계시다. 그분의 신실하심과 긍휼함, 자비함, 사랑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논리 그 위에 계시다.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마지막 대답은 이거다. 모든 대답을 듣고 다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썩 만족스럽지는 않은, 그러나 충분히 말이 되는 대답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논리와 논점을 훨씬 초월한 그 위에 계시는 자라는 것.

  1. 크리스천이 이야기하는, 성경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전지전능하다
  2. 세상엔 악과 부조리가 있다
  3.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선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팀켈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을 말하다 – The reason for God 에서 위 논리의 2->3번 사이에 비약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위 결론은 전지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이 악과 부조리를 허용할 만한 어떤 이유가 있을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모르는, 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나 목적이 있을수도 있다는 것을?

즉 이런 이야기다. 세살먹은 애는 부모가 차도에서 뛰어놀면 안된다고 금지하는걸 다 이해할 수 없다. 세살먹은 애에게 그런 수많은 제약은 부조리하게 보일것이다. 그것이 부모의 더 고차원적인 목적과 이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하물며 부모자식간에 이럴진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선 어떻겠는가. 강아지는 인간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다. 신은 인간의 논점 위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일이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세상의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추격당하는 추구자 – 논쟁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순전한 기독교, 나니아 연대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고통의 문제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글로 남긴 기독교의 거장 20세기 가장 존경받던 옥스퍼드의 철학자, 문학자인 C.S. Lewis 는 본래 무신론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변절한 무신론자”라고 칭하며 자신이 무신론에서 신앙으로 옮겨간 움직임을 묘사한다.

첫번째 움직임은 “예기치 못한 기쁨 – surprised by joy” 였다. 일상적인 평범한 경험에서 불현듯 내면에서부터의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한 갈망, 기억, 감동을 경험한 그는 이걸 기쁨이라고 불렀다. 이건 행복과 쾌락과는 다른 것이었다. 멀리 떨어진 조국을 향한 갈망,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꽃의 향기 우리가 들어보지 못한 곡조의 메아리. 이런것들.

이 체험으로 충격을 받은 루이스는 무신론에서 빠져나와 추구자가 되었다. ‘기쁨으로 놀란’ 경험은 그의 세속적,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구멍을 뚫고 그 너머의 세계를 가리켰다. 그것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이었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 동경은 그 자체로 ‘실재’였고 그가 가지고 있던 사고와 세계관에선 이걸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없었다.

그의 추구가 절정에 달했을때 그는 “하나님이 나를 포위하듯 다가왔다” 며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에스겔서에나오는 무시무시한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이 움직이면서 함께 맞춰진 것처럼, 이제 이지적으로 정립된 철학적 원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솟아올라 그 수의를 벗어던지고 똑바로 서서 살아있는 모습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철학을 가지고 놀 수 없게 되었다. 나의 영 (spirit)은 어떤 면에서 대종 종교의 신과는 달랐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의 대적은 논점 자체를 철회했다. 그것은 하찮은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분은 그것에 대해 논쟁하려 하시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말씀하실 뿐이었다. “나는 주 야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선천적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이런 계시가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호적인 불가지론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애 대해 쾌활하게 얘기할 것이다.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그들은 나에게 고양이가 쥐를 찾는것데 대해 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루이스는 자신의 추구가 충격적인 경험으로 수렴되었던 과정을 돌아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정말로 어린 무신론자는 아무리 조심스럽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 해도 안전할 수 없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논쟁과 논리 위에 계시다. 우리가 그분을 발견할때, 아니 우리의 추구가 그분의 사랑에 의해 추격당해서 우리가 그분에 의해 발견될때, 우리는 모든 논점위에 계신 그분의 절대성을 체험한다.

그분을 만나면 우리의 질문은 더이상 필요없게 된다. 그렇게 그분은 우리를 채우신다

하나님의 절대성을 체험하고 모든 상처를 회복한 가수 이수영의 간증 – 눈물흘리며 한달음에 봤다

눈물흘리면서 한달음에 봤던 이수영의 간증이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밑에서 삼남매의 맞이로 갖은 고생을 한다. 그리고 재혼한 나쁜 계부한테 갖은 학대와 고난을 당한다. 거기다가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어머니 마저 고통사고로 잃고 세상에 내동댕이 쳐진다. 하나님을 믿고 알게된 후에도 도저히 풀리지 않았던 그 질문 – 하나님 도대체 왜 우리 엄마아빠를 데려가셨어요 – 을 그녀의 마음한구석에 늘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 궁금증, 대답과 설명을 원하는 그 마음. 그게 계속 마음 한구석에 풀리지 않는 숙제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을 만난 그녀는 이렇게 고백한다 (1:12-15분을 보면 나온다).

그분 앞에는 왜가 합당치 않더라고요. 그분은 늘 100% 옳으신 분이기에. 제삶의 고난의 과정속에 하나님은 늘 함께하셨다는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전 진짜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버릴수 있는 존재였다는걸, 믿음의 반대는 “무서운 열심”이라고 전 생각하는데 전 붙들을 하나면 있으면 그게 부모가 됐더라도 무섭게 붙들수 있는 존재였던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다 옳고 다 완벽하다는게 그냥 깨달아졌어요. 지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시기에.

그리고 나서야 끝까지 그녀를 괴롭히던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에서 그녀는 해방됐다. 완벽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만나고 알았기에, “왜” 위에 계신, 논쟁과 논점 위에 계신 절대자 하나님을 만났기에 그녀는 해방됐다. 그분은 우리의 논점 위에 계신다. 그분은 완벽하다. 그분은 전지전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분에게 소망을 둘 수 있고 그분을 믿을수 있다.

마지막으로, 애들 보면서 느낀, 논쟁과 논점위에 계신 하나님을 소개하며, 긴 글 상편을 마무리한다. 얼마전 일이다. 둘째 하율이가 토라졌다. 그러면서 이것저것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아빠, 난 진짜 너무 짜증나고 화났어. 이것도 안해주고 저것도 안사주고, 아빠 미워.

내가 어떻게 했을까? 아들과 논쟁을 하는것은 별 의미가 없다. 아들은 맘이 상한것이고 꽁한 것이다. 난 그냥 그게 풀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아들을 번쩍 안고 빙글빙글 돌리고 간지럽히며

이 짜식이, 아빠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까불고 있어. 내가 이쁘지만 않았어도 엉덩이 맴매 하는데

이렇게 장난을 치니 하율이는 금방 까르르 웃으며 다시 본연의 내 아들로 돌아왔다.

그래 하물며 부족한 육신의 아버지가 이러하질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크심이야 이루 비할수 있을까. 그분은 논쟁과 논점 그 위에 계신다. 그것이, 엄청나게 이성적이며 엄청나게 논리적인것 좋아하는, 머신러닝 회사에서 데이터분석을 통해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개선해가는 프로덕트 매니저이자 데이터 기크 (geek)인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다. (물론, 하나님은 때로는 아주 자상하게 우리의 부족한, 종종 말도 안되는 논쟁에 다 응해주시기도 한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포인트는 그분은 그 위에 계시다는 것).

그분의 절대성 (Truth) 과 사랑 (Grace) 에 자유가 있다.

아래 그분의 절대성과 사랑안에 자유와 믿을만한 이유, 소망이 있음을 소개한다. 위에 소개한 완벽한 창조주, 대신 값을 치룬 그리스도가 각각 절대성과 사랑을 대변한다. Truth and Grace라는 단어로도 나타난다.

정말 쉽지 않은 얘기들을 돌직구를 날리며 달려왔다. 소망없고 목적없는 세상이 기댈 수 있는 단 하나는 복음 – 기쁜소식 – 예수 그리스도이다. 다른 길은 없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부조리나 설명할 수 없는 일들도 완벽한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속죄양이 되어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하여 영원한 사귐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성령님의 역사를 부정할 수 없다. 모든 죄는 인간의 불순종에서 왔고, 그 분은 절대적으로 선하다. 하나님이 악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여 그 가능성을 열고 리스크를 지신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논점 위에 계신다.

이건 우리 모두에게 결코 받아들이기 쉽지만은 않은 이야기다. 이 글을 쓰는 나에게도. 내 주위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처를 볼때마다, 또는 가끔 내 가슴깊숙한 상처와 고통을 경험할 때 마다, 이런 마음이 불쑥불쑥 든다. 도대체 왜… 그리고 이 방법밖에 없었는지. 상처입은 내 가족과 주위 친구들을 볼때마다, 결국 우리가 다 죄인이라서 그래 이런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 아파함에, 그 해답 없음에, 아니 너무나 당연히 세상은 결국 혼자사는 것이며 사람들은 각자 스스로를 지켜야 할 뿐이라는 그 단단히 굳어져버리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마음앞에 그냥 눈물흘리고 같이 아파해 주는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을때가 많다. 먼저 펑펑 울고, 그 슬픔을 같이 나눌때, 우리는 비로소 이런 질문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 마음의 자리가 생기는게 아닐까.

그런 마음의 자리가 생겼을때,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게 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그냥 내버려둔 분이 아니심을. 그분이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음을. 그분은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이고 우리는 그 존재와 떨어졌기에 (위에 소개한 1번 – 선하고 온전한 창조 2번 – 떨어짐) 우린 도저히 그분께 다시갈 수 없지만, 그분이 우리를 위해 대신 값을 치룸으로써 다시한번 우리에게 그 절대성, 선함과 연결될 수 있는 길이 생겼음을.

즉 이건 위에서 이야기한 1, 2, 3번에서 회복에 대한 이야기 – 복음이다. 이 3번의 회복이, 2번의 분리를 완전히 역전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완벽하고 온전한 빚 탕감 (구속)에 대한 이야기다.

복음은 결국 빚갚음의 은혜를 입은 이야기이다

위 잘잘법의 김학철 교수님도 기독교의 용어 “죄”를 “빚”으로 바꾸어, 성경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복음을 설명한다. 결국 복음은 우리가 모두 무언가에 빚진자라는 인식, 그리고 그 빚을 아무 자격없이 탕감받았다는 감사와 감격의 인식임을 의미한다. 능력주의, 결과주의에 지친 우리 모두에게 복음은 그래서 소망이고 기쁜 소식인 것이다.

이건 능력주의 (Meritocracy)와 180도 다른 이야기다. 결국 각자가 주어진 것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를 정당한 자신의 소득으로 누리며 살아간다는게 능력주의의 생각이라면 복음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 니가 가진것 중 공짜로 주어지지 않은게 하나라도 있니? 공짜로 맨몸으로 부모님에게서 나와서, 우리의 지성도, 감성도, 우리가 가졌던 기회들도 모두 내 손으로 이룬게 아닌 공짜로 주어진 것이라고. 또 아무리 내가 선하게 살려고 몸부림쳐도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한 존재가 나의 모든 빚을 탕감해 줬다고. 성경에도 같은 비유가 나온다. 10만 데나리온 – 하루 품삯을 10만원이라도 한다면 6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존재. 그게 우리들이다. 세상은 서로다른 능력과 조건들을 금수저, 흙수저라 이름붙이고 비꼬기도 하고 부러워도 하지만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 그 모든것이 다 거저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모두는 빚진자이다. 그리고 엄청난 절대 갚을 수 없는 빚을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탕감받은 자이다.

이걸 마음으로 받아들인 자는 결코 꼬인 마음이 될 수 없다. 모든 닫히고 굳어진 마음들이 녹아내리고 빚진자, 은혜입은 자의 먹먹한 마음으로 탈바꿈 하게 된다. 그렇다. 복음은 혁명적인 소식이다. 완전한 발상의 전환이다. 이걸 믿지 않을수 있어도 이런 일련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순 없다. 오히려 이걸 받아들였을때 세상이 훨씬 더 잘 이해되고 비로소 그 모든 설명되지 않았던 목마름과 고뇌가 채워짐을 경험하게 된다. 진정한 자유가 찾아옴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전에 소개한 적 있는 영상을 다시 가져온다. 위 영상에서 김영서 작가는 9년간 이어온 친부의 성폭력, 그리고 친부의 수많은 압제와 상처에서 자신을 해방시킨건 그 무엇도 아닌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데에 있었다고 고백한다. 상처받은자를 위로하고 보듬는 것은 너무나 필요하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피해의식”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나 또한 누군가에겐 가해자일 수 있다는것,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이기심을 가진 죄인이라는 것, 나의 영혼엔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그 고백이다. 그것이 없는 해방은 가짜 해방일 수 밖에 없다. 내가 피해자라는 억울한 마음에, 가진자와 압제하는 수구세력을 정죄하는 마음에 평생 갖히기 쉽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것처럼 “피해자” 정체성은 먼저 1) 주위 사람을 미워하게 만들고 2) 하나님을 부정하고 미워하게 만들고 3) 결국 스스로를 미워하게 만든다. 그 사이클에서, 자기연민에서, 피해자 정체성에서 우리를 해방하는것은 나 또한 회개가 필요한 어쩔 수 없는 빚진자 (죄인)이란 고백이고, 그 이후 찾아오는 은혜 – 복음의 체험이다. 그것이 있을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한다.

그분의 절대성과 사랑에 믿음이 있다.

존잡생각의 명 컨텐츠중 하나 – 스타트업에서 내 성장의 기회 뽕뽑기

위의 영상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신이형 (센드버드란 회사를 이끌고 있는 김동신 대표)의 유투브, 존잡생각에서 가져온 것이다. (동신이 형이 이 글을 읽을리 만무하지만, 언젠가는 형에게 이 기쁜소식을 전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고 기도이다.) 여기서 15분쯤에 가면 김동신 대표는 John French and Betram Raven으로부터 권력의 5가지 종류를 소개한다.

  • 강압적 권력 (Coercive): 처벌이나 위협등을 가할 수 있는 권력
  • 보상적 권력 (Reward) : 돈이나 승진 등의 보상을 줄 수 있는 권력
  • 합법적 권력 (Legitmate): 지위나 직책에서오는 권력
  • 준거적 권력 (Referent) : 개인적 성품, 인간미, 존경심, 카리스마 등에서 나오는 권력
  • 전문적 권력 (Expert): 전문적인 지식, 경험, 역량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준거적 권력 x 전문적 권력의 힘은 정말 막강하고도 스케일러블 하다고. 이건 억지로 찍어누르는 힘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품과 전문성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엄청난 힘이 있다고.

아 너무나 맞는 성찰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신 하나님의 절대성 (Truth), 그리고 온전한 사랑과 은혜이신 하나님의 사랑 (Grace)을 드러낸다. 그분의 전문적 권력에 당할자가 있을까. 그분은 전지전능하시다. 그분은 창조주이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것을 속속들이 아시고 우주만물을 주관한다. 그럼 그분은 강압적, 보상적, 합법적 권력을 행사하시는 분인가?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준거적 권력의 끝판왕인 사랑과 희생의 은혜를 우리에게 보이신 분이다.

이것이 맞다면? 우리는 그분을 “신뢰” 할 수 있다.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믿을만한” 존재이다.

그분의 절대성과 은혜에 소망이 있다

마지막은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무언가 변하지 않는것에 소망을 걸고자 한다. 그리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늘 소망을 걸고 살아간다.

그것은 비트코인, 주식, 부동산으로 대표되는 돈일수도 있다. 그건 공무원 시험, 좋은 학교, 전문직으로 대표되는 안정적인 커리어일수도 있다. 그건 결혼, 부모자식관계, 친구간의 우정으로 대표되는 다른 사람일수도 있다. 소망을 거는건 리스크를 지는 행동이다. 믿었기 때문에 소망을 거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무에게나 아무것에나 소망을 걸지 않는다. 믿었다가 배신당하면 큰 상처이기에 우리는 고민에 고민을 거쳐 무언가 변치않을 것, 나를 배신하지 않을것에 소망을 건다. 그러면서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건 나를 배신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떤가. 너무 자주, 우리의 믿음은 배신당한다. 그래서 소망이 사라지는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무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믿지않고 아무 리스크도 걸지 않는 삶을 살다가 – 상처당하는게 무서워서 – 우리 가슴은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이다. 삶이 재미가 없어지고 맛을 잃는 것이다. 눈빛을 잃는것이다. 그리고 그래도 아무 소망없이는 살 수 없어서, 작은 리스트를 지고 (그게 주식이든, 커리어든, 주위 사람이든), 그래도 이건 믿을만하다고 이건 너무 소중하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자조하거나, 주위에 자랑하고 사는게 많은 경우 우리의 삶이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진짜 믿을만한것이 여기 있다. 절대 우리를 배신치않는, 절대 우리불변의 것이 있다. 하나님의 절대성 – 결국 세상의 모든 문제에 하나님은 그 어떤 잘못이나 책임도 없는, 온전히 선하고 변치않는 그 절대성, 그 절대적인 선함, 이건 믿을만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우리자신의 작음에 좌절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소망이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모든걸 해결하신 존재다. 우리에게 지금 바로 누릴 수 있는 그분과의 연합을 약속하신 존재다. 그 은혜에 소망이 있다.

그래 그분의 절대성과 은혜에 소망이 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아무리 부조리해도 소망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소망하고 믿을 때, 우리는 다시한번 사랑할 힘을 얻는다. 그리고 아파하는 세상을, 아파하는 내 주위사람을, 아니 본인이 아픈지도 모르고 난 잘 살고 있으니 건드리지 말라면서 소망을 잃고 그냥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숨겨진 아픔을, 품고 기도하고 헌신하고 희생할 힘을 얻는다. 소망을 입는다.

다음편 – 소망과 목적#5 – 교회는 교리주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이웃사랑/헌신의 본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그건 우리세대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에 계속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무언가 울림이 있다면, 무슨 이야기라도 더 해보고 싶다면, 무슨 하소연이라도, 고백이라도 해보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링크나 이메일 (san.baek@gmail.com) 으로 연락 주십사 초청한다.

About sanbaek

늦깍이 크리스천 (follower of Jesus), 우렁각시 민경이 남편, 하루하율하임이 아빠, 둘째 아들, 새누리교회 성도, 한국에서 30년 살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거주중, 스타트업 업계 종사중. 좋아하는 것 - 부부싸움한것 나누기, 하루하율이민경이랑 놀기, 일벌리기 (바람잡기), 독서, 글쓰기, 운동, 여행 예배/기도/찬양, 그리고 가끔씩 춤추기. 만트라 -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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