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과 목적#5 – 교회는 교리주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이웃사랑/헌신의 본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그건 우리세대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이번글은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 5편이다. 내 주위 사람들의 고뇌와 번민을 들으며 느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묵상하다가 쓰게 된 글이다. “너무 바빠. 별로 재밌는것도 없어. 남들은 다들 제자리를 찾고 잘 사는것 같은데 나는 나이만 먹는것 같아서 초조하기도 하고 그렇네. 이뤄논건 없고 삶이 정체된것 같아서. 뭐 인생 별거 있냐”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나 자주 듣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시간도 없고, 마땅히 할말도 없어서 그냥 건강이 최고다, 그래도 우리가 이런건 있지 않냐, 잘하고 있다, 이런 상투적인 인사나 큰 도움안되는 위로로 대화를 끝내기 일수다.

죽을만큼 열심히 해봤어? 인생 만만치 않아. 죽어라고 살아야 겨우 남들만큼 살까말까야.” 이런 생각을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다가 지쳐버린 친구에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건 그 다섯번째 이야기다. 교회와 크리스천의 위선과 아집은 진절머리가 나. 복음이 그렇게 좋은거고 자기를 내어주는 거라면 내가아는 크리스천과 교회는 왜 그래? 란 질문에 대답한다.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시리즈:

바쁘신 분을 위한 5-8편 요약 (가상 대화)

친구: 하… 할말이 없네. 그래 그럴수도 있겠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말도안되게 좋은 소식이네. 근데 나는 믿는다 쳐. (내가 너를 보고 한번 믿어보마 ㅎㅎ). 고통받고 상처입고 마음이 꽁꽁 닫힌 사람들이 그런걸 어떻게 믿겠어? 이미 다 해결됐다고?? 내가 당한 억울한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럴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사사건건 자기들만이 옳다고 하면서 수많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압제들을 만들어내고 있는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막말로 교회와 성경이 가장 사람들을 압박해온거 아니야 – 자유를 주기는 커녕? 요새 이야기하는 소위말해 성소수자 이야기만 해도 크리스천들만 목숨걸고 반대하잖아. 여성을 억압한것도, 성에 대해 터부시 한 것도,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옹호한 것도, 다 크리스천들 아니야? 이런걸 볼때마다 난 무신론자들이 더 자연스럽고 더 당당하고 더 정의롭고 더 솔직한 것 같아.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아집과 위선의 집합체 같고. 사실은 자기들이 더 부패하고 더 호박씨 까면서 겉으론 정의롭고 겉으론 착한 척 하는 꼴이라니. 그걸 어떻게 설명할거야? 그리고, 사실 말하자면 할말이 끝도 없어. 소득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바치고, 교회는 세금이 면제되고, 목사들은 그걸로 먹고 살면서 계속 교회 밖의 사람들을 억압하는 그런 사상을 전파하고 – 이거 교회가 오히려 사회악 아니야?

산    :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 정말 중요한 문제의식이야. 어떻게 하면 이 좋은소식을 듣고 맛본 사람들이, 우리들이 그 좋은 소식을, 그 진리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 살아내고, 주위에 전할 수 있을까. 특히 작금의 상황 – 교회와 크리스천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버린 – 을 보면 안타까움이 너무 많지. 그거에 대해 할말이 없는건 아니야.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크리스천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 짝이없는 오해도 너무 많지. 하지만 이런 비판이나 문제의식이 모두 근거 없거나 모두 쓸모없다는 이야기를 하는것도 전혀 아니야. 오히려 세상 모든것이 변화하고 있는 시대에서 크리스천과 교회만 변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지. 복음 빼곤 다 바꿀 수 있고 다 바꿔야 하는게 맞다고 봐. 나에게 해답이 다 있는건 아니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게 한두가지 있어. 이제 너도 믿기로 했으면 한배를 탔으니 먼저 빚갚음 받은 자로서 어떻게 이걸 잘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거야.

첫번째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복음은 단순한 “No”가 아니라 더 나은것에 대한 “Yes”라는 거야. No는 압박과 구속과 제한을 상징하지. 위에 교회가 신앙의 이름으로 제한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대변할거야.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답답하지. 자연스럽지 못하고 구태의연하게 느껴질거야. 꼭 어떨때는 “우리집의 규칙들” 처럼 느껴질수도 있어. 빨리 자라서 탈출하고 싶었던 그런 규칙들. 하지만 복음은 No에서 끝나는게 아니야. 더 나은 것에 대한 Yes 인거지.

아까 이야기한 “성 – Sex”를 예로 들어볼게. 성해방 이라고 말하는 진영에서는 “우리 육체에 솔직하자. 성을 해방하여 자유롭게 성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자” 라고 이야기하지. 하지만 크리스천은 성에 대해서 “진짜 소중한 것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 great power comes with great responsibility” 라는 스타워즈에 나올 법한말을 하지. 즉 진짜 소중한 건 그걸 소중히 지키고 언약의 관계하에서만 누렸을때 본연의 자리를 찾는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 진정한 기쁨은 받는것보다 주는데에 있는것 처럼 (그게 어려울지라도), 성과 같은 부분도 내가 단순히 내욕구를 채우는데 (그게 포르노를 보고 자위를 하는거든, 서로 아무런 제약없이 friends with benefit 같은 관계에서 즐기며 소비하는 것이든) 쓰는것이 진짜 본연의 자리가 아니라, 내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하고 괴로울때나 힘들때도 희생하며 자리 지키겠다고 한 관계에서 상대를 섬기는데 사용할 때 그것이 본연의 자리를 찾은 것이고 진정한 기쁨과 진짜 맛을 선사할 것이라는 거지.

다른 것들도 다 마찬가지야. 우리가 일을 생각하면서 “쉽진 않지만 그래도 결국 최선을 다하는게 답이 아니야? 복음 같은 허황된 소리를 받아들이면 세상의 성취에 대해서 디스카운트 하고 대충사는거 아니야? 나는 그런거 관심없어” 라고 복음은 세상에서의 성취를 No라고 제한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고 그건 제대로 복음을 이해한게 아니야.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하지. “그렇게 안간힘 쓸 필요 없어. 남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성공의 찬란한 광채를 쫓으며 스스로를 채찍질 할 필요도 없어. 이미 너의 모든 빚은 탕감받았고 나는 있는 그래도 너를 사랑하며 평생 사랑하고 함께할거야. 자 이제 프로가 되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애쓰듯 하던 그 스윙을 버려. 그리고 그 기쁨과 안식 안에서, 나의 사랑 안에서, 애처럼 한번 해보는거야. 뭐가 제일 재밌지? 뭐가 제일 신나니? 무슨 일을 할때 넌 가장 너됨을 느껴? 그걸 안에서 부터 한번 찾아보자. 그리고 세상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고 싶어? 그래 그게 너의 일이야. 넌 결과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그 일로 인한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 또는 그 반대 (인정받지 못하는것) 에서 자유로와져서, 애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스윙할거야. 그게 최고의 스윙이야. 그리고 넌 진짜 열심히 일할거야 왜나고? 그건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고, 그 과정에서 넌 더 큰 자유와 기쁨과 사랑을 느껴갈 테니까. 너는 쫓기는 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쫓는자가 될거야.”

그래서 소위말해  크리스천이 이야기하는 회개는 반성문이 아니야. 회개는 마음을 돌이키는 거야. 별볼일없는 (Mediocre한) 세상의 것들에서 마음을 돌이켜서 진짜를 맛보고 진짜를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새 마음을 품는걸 경험하는 거지. 회개는 No를 통해 Yes로 가는 것이야. 회개는 엄청 좋은거야. 그건 하나님이 친절함 (Kindness of God)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새 생명을 주는 것이지.

친구: No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Yes다.  그래 그런게 있다면 나도 경험해보고 싶네. 나도 모르는건 아니야 내가 원하고 바라던 것들 – 돈, 명예, 성공 등등 – 이 궁극적인것은 아니란걸. 그걸 넘어서는 진짜가 있고 그걸로 내 마음이 송두리째 변화하는 그런 경험, 그런게 있다면 나도 맛보고 싶어.

산  : 응 분명 맛보게 될거야. 그리고 꿈꾸게 될거야. 그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두번째 포인트야. 진짜를 맛보게 되면 우리 가슴은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찰거야. 말도안되는 꿈을 품게 될거야. 말도 안되는 상상력과 창의성이 나올거야. 크리스천의 역사를 보면 그런 예는 끝이 없어. 영국에서 노예제를 폐지시키는 움직임을 리드한 윌리엄 윌버포스, 흑인 인권운동을 리드한 마틴루터킹 목사, Why not change the world 란 모토로 세상을 바꾸는 꿈을 키우는 다음세대를 키워내는 한동대가 만들어진 이야기, 거기에서 나온 엠트리 최영환 대표 이야기, 최근에 나온 이 카우치 워십까지. 우리의 시야가 나 라는 작은 틀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향할때,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혼자힘으로 이 망망대해 같은 삶을 헤쳐나가야 하는 고아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로 변화할 때, 우리는 그 새로운 열정과 담대함과 창의성을 마음껏 펼치고 그분이 초대하는 낮은곳으로 마음껏 희생하며 살아갈거야. 그렇게 되면 분명 세상은 질문 할거야. 상승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나도 올라갈 수 있어요? 라고 How를 묻지만 하강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죠” 라며 Why를 묻게 되지. 도저히 복음 없이는 이해할 수 없으니. 그렇게 우리는 그분을 증거할거야.

친구: 그래 그런게 오면 좋겠다. 근데 과연 내게도 그런게 올까? 사실 잘 모르겠어. 그리고 과연 내가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 사실 별 기대도 바람도 없어. 내가 특별히 남들보다 잘하는게 있는 것도 아니고. 난 폐끼치기 싫어. 굳이 내가 필요할 이유도 없는데.

산 : 친구야, 그게 포인트야. 우리가 잘하는게 중요한게 아니야.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되는게 중요한거지. 우리는 프로처럼 결과에 죽고 살고 하는 사람이 아니야. 우리는 아마추어처럼 자기일을 즐기며 서로 용서하고 봐줘 가면서 한 지체를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거지. 우리가 서로의 약점을 보듬어 줄때, 우리가 덜 잘난 지체들을 더 존귀하게 대할때 (honoring), 우리가 서로 더 낮아지며 사랑하는 위대한 하강을 할때, 우리는 계속 그 복음안에 거할거야.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고 연합하실 거니까. 그리고 세상은 빛되신 그분을 볼거야. 그게 바로 핵심이야. 자격없이 빚갚은 받은 자라는 먹먹한 마음. 나의 약함을 숨기거나 피하지 않고 그 약함가운데 온전히 드러나는 그분을 담대히 믿고 맘껏 헌신하고 맘껏 사랑하는것. 그게 우리의 역할이야.

그리고 그건 혼자할 수 없어. 그건 함께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에겐 서로가 필요해. 서로 부족함을 감싸면서 사랑하며 하나되어 천국을 누리도록 그분은 우릴 창조하시고 초대하셨어. 니가 꼭 필요해. 자 같이가자.

문제의식: 그런데 복음을 안다는 크리스천들, 교회가 왜 이 모양이야

복음은 정말 엄청난 이야기 같네. 믿을수 있다면 믿고 싶어지는것 같아. 하지만 여전히 난 내가 소위말해 교회다니는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 생각만 하면 절대 안될것 같아.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사사건건 자기들만이 옳다고 하면서 수많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압제들을 만들어내고 있는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막말로 교회와 성경이 가장 사람들을 압박해온거 아니야 – 자유를 주기는 커녕? 요새 이야기하는 소위말해 성소수자 이야기만 해도 크리스천들만 목숨걸고 반대하잖아. 여성을 억압한것도, 성에 대해 터부시 한 것도,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옹호한 것도, 다 크리스천들 아니야? 이런걸 볼때마다 난 무신론자들이 더 자연스럽고 더 당당하고 더 정의롭고 더 솔직한 것 같아.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아집과 위선의 집합체 같고. 사실은 자기들이 더 부패하고 더 호박씨 까면서 겉으론 정의롭고 겉으론 착한 척 하는 꼴이라니. 그걸 어떻게 설명할거야? 그리고, 사실 말하자면 할말이 끝도 없어. 소득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바치고, 교회는 세금이 면제되고, 목사들은 그걸로 먹고 살면서 계속 교회 밖의 사람들을 억압하는 그런 사상을 전파하고 – 이거 교회가 오히려 사회악 아니야?

작금의 시대에 교회와 크리스천의 신뢰도는 땅으로 추락했다. 굳이 내가 일일이 여기 쓰지 않아도 이 글을 읽는 분이시라면 다 공감할 수 있으리라. 과연 교회와 크리스천은 사회악인가. 그리고 작음의 신뢰추락,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교회와 크리스천의 흑역사 만큼이나 이사회의 빛과 소금이 된 역사도 많았다.

위 문제제기와 연결되는, 교회와 크리스천의 불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번 돌아보자. 그래,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죄들, 불의들,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차라리 종교가 없는게 더 낫지 않은가?

아프리카에 돌아다니는 농담이 있어. 처음 선교사들이 왔을때 그들에겐 성경이 있었고 우리에겐 땅이 있었지. 그들이 떠날땐 어떻게 됐는지 알아? 우리손에 성경이 있고 그들에게 땅이 있는거야. 뼈때리는 이야기지?

미국이 크리스천의 이상을 품고 건국한 나라라고? 그 원주민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몰아낸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거야?

십자군 전쟁은 또 어떻고? 종교란 이름으로 제국주의나 침략주의를 정당화한 케이스가 너무 많아. 지금도 물질적 전쟁이나 폭력이 없다 뿐이지 여성을 억압하거나 기존의 질서를 강조하는 일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계속 자행되고 있지 않아?

이에 대한 여러가지 납득가능한 설명이 있다. 아래 그중 대표적인 네가지를 소개한다. (참고로 대부분의 이야기는 팀 켈러의 “하나님을 말하다 (The reason for Gor)”에서 발췌)

1. 성격적인 결함: 병원을 오는 이들의 건강이 더 나쁠 수 있다. 기독교의 일반은총은 도덕성이 떨어지는, 소외된 자에게 더 다가가는 면도 있다. 

기독교는 소외되고 낮은자에게 향한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회적으로 봤을때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모든게 갖춰진 사람들에게 복음의 힘이 임하기 보다는, 도덕적이지도 못하고, 삶에 문제투성이인 사람들에게 그 힘과 역사가 임한다. 교회는 영적인 빈곤과 망가져 버린 삶을 치유하는 병원가 같다. 이들이 더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하는건 어불성설이다. 도덕성이 떨어진, 소외된 자에게 예수님의 시선이 향한다. 가난한자, 병든자, 고아와 과부, 창녀와 세리 (세금걷던 당시의 매국노)에게 예수님의 마음이 향했다. 당시의 지배계층인 바리새인들에겐 예수님은 추호와 같은 호통을 치셨다. 문제가 없어서, 문제를 해결해서 교회에 오거나 교회가 되는것이 아니다.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치유를 경험하는 것이다.

2. 신앙과 폭력: 폭력은 비판받아야 하지만 기독교가 없는 곳에서도 폭력은 있었다. 폭력이 기독교의 반증은 아니다. 

두번째 설명은 이것이다. 폭력은 기독교의 반증이 아니다. 오히려 폭력은 하나님과 떨어진 인간의 불완전함을 드러낸다. 더 많이가지려 하고 남의 것을 뺐으려 하는 역사는 인류역사 내내 있었다. 징기스칸의 전쟁, 로마의 정복전쟁, 그리스의 정복전쟁, 현대에 와서는 지상낙원을 건설한다는 공산주의 이상하에 행해진 대량학살 (소련, 캄보디아 등), 아프리카의 끊이지 않는 내전 등 굳이 일일이 꼽지 않아도 그 예는 끝없이 많다. 폭력에 기독교를 이용한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분앞에 회개해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반증은 될 수 없다. 오히려 복음이 없는 땅에서의 불법, 수없이 행해진 인간소외와 착취 -> 복음의 전파 -> 사회의 화합과 문명의 발전 -> 사회구성원의 교만으로 인한 복음의 타락으로 보는것이 훨씬 더 역사를 잘 설명한다. 서유럽이 그랬고, 우리나라의 근대사도 얼마든지 이런 시각에서 볼 수 있다.

3. 광신도: 이건 예수님의 모습이나 방법이 아니다. 

주위를 보면 믿음이란 이름으로 모든걸 영적 전쟁이라고 명명하며 전투적으로 임하는 크리스천, 때론 교회를 종종 본다. 그들은 때때로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 크리스천을 믿음이 약하다고 비판하고, 자신의 모습이 진짜 크리스천이라고 굳건히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이나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천군천사로 자신의 적을 멸하고 이땅의 영광을 취할 수 있음에도 묵묵히 십자가를 지는 순종의 길을 택했다. 소외된 이웃에게 눈물흘리며 다가가고, 늘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하고 성찰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광신도의 모습, 주위와 전혀 화합하지 못하고 이웃의 아픔이나 문제들을 연민과 사랑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 이런건 제대로 예수를 몰라서 발생하는 문제이지 본연의 교회와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볼 수 없다.

4. 성경의 가르침: 성경은 종교적 불의를 비판하는 도구가 되어오기도 했다. 

성경의 가르침이 여성이나 노예를 억압하는데에 사용되었던 만큼, 여성과 노예, 또 다양한 불의를 비판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에 최초로 제대로 반기를 들고, 노예제 폐지를 위해 불가능해 보이던 싸움을 싸우며 모든것을 바쳐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낸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 흑인 인권운동일 이끈 미국의 마틴루터킹 목사님, 동유럽 공산주의와 히틀러에 반기를 든 디트리트 본회퍼 등의 크리스천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조선의 해묵은 반상구조, 남존여비 사상을 뒤흔들고 인권신장, 여성권익 신장을 이끈 것도 선교사들과 성경적 가르침으로 무장한 크리스천들이었다.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이야기들

한국에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들을 돌아봐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끝이 없다. 처음 천주신앙이 전해졌을때, 조상을 공경하지 않는다는 오해로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그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천부인권 사상 등은 정약용 등의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후에 개화되면서 들어온 선교사들에 의해 지금의 연세대, 이화여대, 세브란스 병원등 한국사회발전의 기둥이 된 학교와 병원들이 지어졌다.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사람 중 안중근, 안창호, 서시의 윤동주 시인 등 모두 크리스천이다. 3.1 운동과 기독교란 이 글에서 전 인구의 약 1.5%를 믿돌던 기독교가 3.1 운동의 배경에는 약 1/3가량을 차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주 한국건국에나 (다양한 역사적 시각차이가 있지만), 민주화의 근간에도, 수많은 기독교인과 교회의 더 낮은자리에 가고, 자기자리에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헌신과 노력이 적지 않았음을 역사가 증거한다.

나두산 목사님이 쓴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이야기들 (관련기사, 관련 영상)에서 그는 기독교가, 불교, 유교 문화에 흐르는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전환, 상민과 여자들의 인권회복, 의료기술, 교육의 도입, 한국어를 가르침으로써 조선 시대 양반층 귀족층과 평민들의 신분이 뒤바뀌는 등 한국사회를 근대화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역사를 소개한다. 3.1 운동을 주동한 사람의 상당수도, 남궁억, 주시경, 신채호 우리나라 초창기 근대학문을 주도했던 사람들도 거의 100%가 크리스천음도 밝힌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핍박과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수많은 순교자들과 선배 크리스천들을 소개한다.

그렇게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던 교회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하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성찰하고자 한다.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여전히 정말 많은 교회와 크리스천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교회는/크리스천은 먼저 은혜입은 자이기에 더 막중한 책임, 더 엄격한 잣대를 가지는게 마땅하다. 이하 교회, 특히 이 시기의 한국교회에 대해 내가 느끼고 보고 듣는 쓴소리들을 나누고자 한다.

크리스천은 교리주의/교회주의에서 벗어나 소명의식과 이웃사랑으로 무장하고 사회로 나가야 한다.

김형석 교수님의 기독교에 대한 따끔한 지적

위 영상은 해박한 지식, 100년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혜로 따끔한 소리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김형석 교수님의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거침없는 지적이다. 워낙 그 주장에 거침이 없고, 철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다 보니 보수적인 기독교 진영에선 이분을 부담스러워 하거나 이분의 교리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 논쟁을 떠나서 이분의 아래 메세지, 지적은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다. 과연 100년후 기독교, 희망은 있나? 그는 기독교가 희망을 품으려면 아래 세가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1. 기독교/교회의 권위는 사랑에 있다. 이웃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2. 교리를 진리로 바꿔야 한다.
  3. 교회주의를 버리고 사명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참고로 본인도 이분의 주장/의견과 100% 같이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특히 위 영상은 자칫잘못하면 복음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 -> 인류의 진보 의 역사의 큰 흐름을, 마치 복음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 -> 인류의 퇴보 처럼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는것 같아서 조심스럽다. 교육수준이 높고 발달한 국가에서 기독교와 교회가 힘을 못쓰는 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닌 등따습고 배부르면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인류의 죄성때문일진대. 그리고 이분이 좀 dramatic하게 교회의 미래를 비관(?)하는것처럼 말씀하시는거에 비해 난 교회의 미래에 훨씬 더 긍정적이다. 인류 역사상 크리스천의 공동체는 흥했던 적도 쇠했던 적도 있지만 큰 흐름에서 보면 그 생명력을 막을수는 없다. 그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그분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바벨론의 식민지가 됐을 때에도 (BC 500-0),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가 되었을때도 (BC 1800-1400),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단 그렇다 할지라도 이분의 문제제기와 날카로운 비판을 새겨들어야 한다는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몇가지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교회와 현실사회의 장벽과 거리가 아직도 너무 넓고 그 책임은 사회보다도 교회에 있다. 기독교는 기독교회를 위해 있지 않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음을 망각했다는 반성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우리끼리 즐기고 만족하는 단순한 신앙의 안식처가 아니다. 주님의 일꾼을 사회와 국가로 배출하는 사명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사회가 교회를 위해 있지 않고 교회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

종교는 본래부터 권위를 바탕으로 형성되지만, 권위주의에 빠져선 안 된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이 권위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게 기독교적 권위다. 예수님은 계명과 율법을 버리라고 했다. 지금은 교회가 교리를 붙잡는다. 교리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해졌는지 모른다. 교리를 진리로 바꿔야 한다. 교회가 ‘교회주의’와 ‘교권주의’에 빠지면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

그래 너무나 뼈를 때리는 지적이다. 상편에서 소개한 팀 켈러의 “복음에 의해 인도된 삶”에서 팀 켈러는 복음과 종교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종교는 인간을 더 부족주의 – 나와 남을 나누고 나는 맞고 남은 틀리다는 사고방식과 세계관 – 로 만들어 사회를 화합하지 못한다. 하지만 복음은 다르다. 복음은 값없이 없는 은혜받은 자라는 정체성을 줘서 우리각자가 십자가를 지고 이웃을 위해 희생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를 한없이 낮은 자리로 가게 한다. 그래서 사회에 용서와 화해와 회복을 가져온다“. 작금의 교회는 “복음”보다 더 “종교”의 모습을 띈게 아닌지 돌아보지 않을수 없다.

믿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분리하여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접근법은 종교를 자기기만과 독선에 빠지게 한다.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강연 – 믿는것 만으론 모자란다

위의 영상은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인 정진홍 교수님의 양화진 강연 – 믿는것 만으론 모자란다. 이다.

그의 메세지를 소개하기 전에 내가 만난 정진홍을 잠깐 소개하고 싶다. 서울대학교에 갓 입학하고 이제 대학교란 상아탑에서 멋진 강의를 듣고 공부해보겠다는 꿈에 불탔던 나는, 주위에 소위 말하는 “서울대 명강의”를 수소문했고, 서울대 3대 명강의라는 정진홍 교수의 “종교학 개론”을 1학년 1학기에 수강했다. 한학기동안 이 교수님은 종교를, 특히나 기독교를 낯낯이 까발렸다 – 이런 역사, 저런 역사, 종교란 이름으로 일어난 이런 악행들, 종교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등등. 당시 불가지론자이자 무신론자 (자칭 나신론 – 나는 나만 믿어)였던 콧대높던 나는 이런 정보들을 아주 흥미롭게, 또 나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증거들로 받아들이며 수업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잘 들었다. 그런데 모든 강의를 마치고 종강하며 그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이럴수가…거의 유주어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는 종교학을 공부했고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에서 신학박사를 받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기도 하다. 한평생 학자이자 크리스천으로서 치열한 고민을 하며 살아온 그는 이런 인터뷰 (종교학자 정진홍에게 크리스천 신앙을 묻다), 성경은 실증의 언어가 아닌 고백의 언어다 등의 이야기를 하며, 보수 교계로 부터 “불경스럽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 인물이다. 실제로 그의 성경에 대한 견해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고수하는 “성경 무오주의” 와는 결을 달리한다. 그는 “성경을 내 삶의 의미를 찾는 준거로서 대해야 한다”면서, 성경에 쓰인 고백만을 전부이며 절대적인 걸로 받아들여 타인에 대해 배타적인 독선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접근은 자기만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하면서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습으로 이어지며, 결국 고민하는 과정 없이 문제와 해답만 있는 종교는 자기위선과 기만에 빠진다는 지적이다.

이제 위 영상으로 돌아가자. 정진홍 교수님은 “믿는 것 만으론 모자란다” 라는 강의에서, 우리의 신앙 행위 – 소위말해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 (이성), 정 (감성), 의 (의지), 상상력을 모두 활용한 총체적인 것이지 결코 우리의 혼 – 지정의 – 과 떨어져 있는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믿음을 무언가 모든 이성 위의 것, 감성 위의 것, 의지 위의 것, 이렇게 격상시켜 놓고 그것에 대해선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는 방식의 접근법은 꼭 필요한 성찰의 기회를 배제시켜 버려 매우 위험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미리 정해진 질문말을 묻고 미리 정해진 답변만을 반복하는 접근은 공허하고 자기기만적이라는 것이다. 작금의 교회의 위기에 너무나 필요하고 뼈아픈 지적이다.

교리는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다. 우리는 이웃의 짐을 덜어주는 사람들이다. 은혜의 자리에 초대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지 율법을 사회에 강요해서 짐지우는 사람이 아니다.

위 두분이 일관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교리주의, 교회주의, 믿음이란 이름하에 내부 성찰을 가로막는것 등이다. 이것에 대해서 본인도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어서 아래 적어본다.

교리 (dogma)나 특정 신학 (theology)는 진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진리이다. 신학은 제한적인 인간이 제한할 수 없는 그분을 풀어낸 것이고, 교리는 그걸 바탕으로 정리한 일련의 가르침 – 도그마이다. 교리는 필요하다. 하지만 교리주의에 빠지면, 이것 만이 진리가 되고 만다. 그래서 구원이 무기가 된다. 이 교리가 아니면 이 신학이 아니면 구원이 없다는 생각과 가르침이 문화가 되면 그건 매우 위험하다. 자기비판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율법주의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가 가장 경계하신 것도 이것이다. 그분이 가장 강하게 비판하고 가장 주력하신 것 중 하나가 이 율법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는 것이다. 안식일 관련 율법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모세를 통해 내려온 신성시된 율법의 근본정신에 도전하고, 율법을 자신과 사회에 강요한 바리새인을 아주 강하게 비판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율법주의를 타파하셨다.

쉽지 않은 이야기다. 교리와 진리를 구분한다는 것은. 그리고 율법주의를 경계한다는 것은. 하지만 너무나 필요하다. 교리는 하나님의 법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진리처럼 느껴진다 – 하지만 진리이고 은혜이신 예수그리스도 없는 교리는 족쇄가 될 뿐이기에. 아래 세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1. 첫째, 우리의 동기와 가슴을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과 맞지 않는 이웃이나 주위를 볼때, 우리의 가슴이 겸손과 사랑과 연민으로 넘치고 있는가. 아니면 판단하고 어울리길 꺼려하게 되는가. 우린 이단논쟁을 일삼거나 어떤 질문이나 행동을 불경스럽다는 이야기로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있는가. 이걸 늘 살펴야 한다. 이걸 잘 살필수 있는 방법이 있다 – 세상에 위협당하고 느껴지는가? 우리가 세상으로 부터 위협당한다고 느끼고 방어/수비하는 자세로 임할때, 세상의 이웃들을 사랑과 관용, 헌신으로 대하기 어려워진다. 그럴때 우리는 여유를 잃고, 세상과 전투적인 자세가 되기 쉽다. 우리의 신앙은 방어하는 신앙인가? 누구로부터 무엇을? 세상을 적으로 여기고 지키려는 신앙은 종파주의, 교회의 정치화 등으로 이어진다. 돌아봐야 한다. 아래 소개하겠지만 우리는 초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가장 좋은것을 맛보고 전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망을 가지고 진취적으로 나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영적인 것에는 관심없거나 거짓 우상을 섬기는 이웃을 위해 대신 희생하고 헌신하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건 방어가 아니다. 그건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것처럼 역설적으로도 가장 강한 공격이다.
  2. 둘째, 우리가 전하고 의지할 수 있는 진정한 권위와 능력은 은혜/사랑에 있지 율법에 있지 않다는걸 명확히 안다. 앞선 글 – 채찍과 당근, 그리고 은혜 에서 오로지 은혜만이 할 수 있는것을 율법에 기대해서는 안된다. 를 소개한 바 있다. 우리는 은혜 없이는 율법을 따를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은혜로 오셨어야 했다. 핏값으로 산, 그 대속 (빚갚음)에 권위와 능력이 있다. 교회의 권위와 능력은 그 은혜를 증거하고 실천할 때에 나온다. 사회에 교리를 이야기하고 직접 율법을 세우려고 강요할 때 나오는게 아니다. 하나님의 법은 교회내부에서 은혜입은 우리가 잘 살아내면 된다. 사회와 이웃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율법이 아닌 은혜이다. 거기에 권위와 능력이 있다.
  3. 셋째, 우리의 역할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초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율법을 사회에 강요하고 율법을 사회에 확립시키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은혜를 체험하고 이웃사랑 – 용서와 관용과 화해와 헌신 – 을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린 은혜로 초대하는 사람들이다 – 희생과 헌신을 통해.

율법 – 옳고 그름에 관한 문제는 진리이신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 하신다. 우린 그걸 살아내고 증거하는 것이지, 그걸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다. 은혜입고 그분에 의해 성화되지 않고는 율법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살 수 없다. 우리가 율법을 믿지 않는 사회와 이웃에게 강요하는건 어불성설이다. 그건 안그래도 힘들게 사는 이웃에게 더 짐을 지우는 일 – 팀 켈러의 “복음에 의해 인도된 삶 에서 말한 복음의 정신 – 짐을 덜어주는 것 – 에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거다. 성경적 가르침에서 낙태는 옳지 않다. 교리적으로 동성애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면 크리스천은 어떻게 하는가? 교회차원에서 법적 저지를 하고, 광화문 시위를 하고, 퀴어축제 앞에 푯말을 들고 “주여”를 외치는 것이 율법을 사회에 들이대는 행동이다. 이것이 옳은것이다 – 따르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 이것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싸늘하기를 넘어, 이걸 “혐오”로 보고, 진저리를 치고 있다.

우리의 역할은 초대하는 것이다. 퀴어축제에 가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들을 은혜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인가? 다양한 이유에서 낙태한 사람들을 은혜의 자리로 초청해야 할까 아니면 그건 죄라고 수치심이 들게 해야할까? 우린 섬기고 초대하는 것이다 – 경외함으로, 겸손함 (humility)으로 나를 남보다 더 낮게 여기고. 우리가 그 역할을 게을리하고 율법, 옳고 그름 논쟁에 피를 세울때 – 세상은 예수님을 도저히 볼 수 없다. 우린 탕자의 비유에 나온 첫째아들이 될 뿐이다.

진정한 권위는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하고 희생하지 않고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특히나 코로나이후 교회의 집회등에서 코로나가 확산되는 일들이 발생하자, 안그래도 교회의 위선과 부패 (물론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것이 전혀 아니다. 미디어에서 일부의 사례를 부추긴 부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에 환멸과 피로를 느끼던 사회에서 본격적인 교회 비판이 이어졌다./ 많은 교회의 보수정치 참여도 여기에 불을 부추겼다. 믿지 않는 사람들 누구에게라도 물어보자. 그들이 하는말은 한결같다.

복음? 하나님? 이게 맞는 길이라고? 됐고 제발 혼자 믿는건 좋은데 남한테 폐끼치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계속 그렇게 믿음의 이름으로 사회에 폐끼칠거면 그런건 없느니만 못하다

상황이 이럴진대,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회에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고 한다면? 그럴려면 발언권을 먼저 확보해야한다. 지금의 사회는 크리스천들의 이야기를 전혀 궁금해 하지 않을때가 많다. 어디서 부터 풀어야 할까?

김형석 교수님의 위 강연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수 있다. 이웃사랑, 사랑이 곧 권위다.

부모님은 자녀의 삶에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이야기한다. 부모의 진정한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건 사랑에서 나온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 인간은 마음을 연다.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고 사랑한 사람에게 우리는 귀기울이지 않을수 없다.

단순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시작한 가든시티의 대표 마이클 아리에타

Docusign의 초창기 멤버로 CEO의 Chief of Staff등을 지내고 지금은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단순노동자와 그런 사람들을 고용하는 소상공인들을 사랑하고자 가든시티란 회사를 만든 마이클 아리에타의 인터뷰이다. 그의 회사 가든시티는 비지니스를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서 근근히 이어오거나 비지니스를 접을 위기에 빠진 소상공인들, 소규모 비지니스를 관리하는 지주회사이다. 그 지주회사를 통해 비지니스의 영속을 돕고, 그회사의 서비스 종사자들에게 더 많은 임금과 각종 삶을 윤택하게 하는 정신상담, 채플린 등의 혜택을 제공한다. 이것을 통해 당장의 성장보다는 구성원 모두가 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이 그의 동기이고 그의 접근법이다. 그들에게 신앙을 강요하지는 절대 않는다. 단 원하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문을 늘 열어놓고.

우리의 역할은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권위가 있다. 나는 우리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희생하고 있는가.

문제제기는 쉽지만 해결책 제시는 어렵다. 우리세대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이 글의 목적이 교회 비판이 아닐진데 난 지금 이런 이야기를 왜 주저리 주저리해서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걸까? 그건 현재 상황과 문제점에 대한 성찰과 자기반성 없이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게 흔들리고 변하고 있다. 평생 한직장을 다닌 부모님 세대에 비해 우리 세대는 조직의 울타리에 기댈수 없고 각자 경쟁력을 가지는게 요구되는 사회를 살고 있다. 코비드에 의해 가뜩이나 빠른 변화는 더 가속화 됐다. 이렇게 모든것이 변하는 이 시기에 교회는, 크리스천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하나의 논점으로 교회구조만 봐도 할말은 많다. 지금의 교회 구조 – 전임 사역자가 지역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은 십일조를 통해 재정적인 뒷받침을 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 만이 과연 교회의 모습일까. 구약에 보면 레위지파는 자기땅을 소유하지 않고 제사장으로서 타 지파가 성전에 바치는 헌금, 성전세 등을 통해 살아가도록 되어 있지만 신약에 와서는 레위지파를 따로 규정하지 않고 만인 제사장을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부족한 내 이해로 보기에는 지금의 카톨릭 성당/교계의 구조도, 개신교의 종파들과 구조도, 타 기독교분파 (정교회 등)의 구조도 절대적이지 않다. 각자가 믿는 교리 위에, 그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교회란 조직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 그 구조는 절대적이지 않을 뿐더러 많은 부분이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보인다.

교회가 어떤 구조로 변화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게 이글의 목적은 전혀 아니다. 몇가지 생각이 있긴 하지만 아직 내가 충분히 연구하고 고민한 부분도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메세지는 많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주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부분부터.

그리고 목사님들이나 신부님 등의 성직자들, 우리 부모님 세대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도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분들에겐 감사한 마음, 빚진 마음이 훨씬 앞선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있는게 아닌가. 무에서 유를 이룬 세대,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 같은 시대를 풍미하는 교회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킨 선현들이 아닌가.

그리고, 노파심에서, 이런 교회의 위기가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이야기하는건 더더군다나 아니다. 앞선글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 전하는 편지 (상)” 에서 하나님은 어떤 인간의 잘못, 세상의 부조리, 설명되지 않는 아픔과 억울함 위에 계심을 소개한 바 있다. 하나님은 늘 참으시고 늘 믿으시고 (성부) 늘 대신 빚갚고 고통당하시고 (성자) 늘 우리안에 함께하시며 돕고 돌보시거나 우리에게 손짓하고 계신다 (성령). 그 일점일획이라도 그분의 잘못이나 책임은 없다. 모든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분은 뒷짐지고 심판을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를 돕는 분이다.

이제 바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그래 문제 투성이고 크리스천과 교회는 많은 지표에서 우리가 살면서 경험한 가장 큰 위기들을 맞고 있다. 문제제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진짜 어려운것은 해결책 제시이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이건 우리세대에 남겨진 숙제이고, 우리가 같이 고민하고 풀어가야할 문제이다.

다음편 – 소망과 목적#6 – 별볼일 없는것을 No하고 더 나은것을 Yes로 택하는것 에 계속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무언가 울림이 있다면, 무슨 이야기라도 더 해보고 싶다면, 무슨 하소연이라도, 고백이라도 해보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링크나 이메일 (san.baek@gmail.com) 으로 연락 주십사 초청한다

About sanbaek

늦깍이 크리스천 (follower of Jesus), 우렁각시 민경이 남편, 하루하율하임이 아빠, 둘째 아들, 새누리교회 성도, 한국에서 30년 살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거주중, 스타트업 업계 종사중. 좋아하는 것 - 부부싸움한것 나누기, 하루하율이민경이랑 놀기, 일벌리기 (바람잡기), 독서, 글쓰기, 운동, 여행 예배/기도/찬양, 그리고 가끔씩 춤추기. 만트라 -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9 comments

  1. Pingback: 소망과 목적를 잃은 친구에게 전하는 편지 (상) – 너를 위한 기쁜 소식이 있어 | San's diary

  2. Love

    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일단 눈물 콧물 좀 닦고 올게요 … ㅠㅠㅠㅠㅠ
    …👍🙏 Amen!

  3. yebin

    너무 감사하네요 ㅠㅠ!

  4. Pingback: 소망과 목적을 잃은 친구에게#2 – 복음은 다르다. 복음만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 San's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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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Pingback: 소망과 목적#3 – 증거없이는 못믿겠다고? 우리 모두는 증거없이 무언가를 믿고있다 | San's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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