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믿을 것인가’ (김형석 저) 를 읽고

* 아래 글 읽기에 앞서 제 블로그에 처음 들어오시는 분들은 부디 공지사항 에 있는 글들을 읽어봐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에서 이런 글들을 쓰고 있고 제게 연락주시고 싶은 분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것 같은지 제 생각 정리해 봤습니다.

이 글은 독후감이다. 어떻게 믿을것인가라는, 99세된 할아버지께서 최근에 쓰신, 폐허가 된 유럽교회를 보고 한국교회에 한국 기독교에 던지는 문제제기와 질문들이다. 이 책의 아주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를 다 동의하거나 공감한건 아니지만 참 많은 부분이 공감이 되서 나누고 싶다. 아래 독후감의 주요 독자는 크리스천 (기독교인, 천주교인)이고, 언론에서 비춰지는 한국교회의 수많은 이슈에 염증이 생겼거나 본인이 직접 주위에서나 자라면서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과 이해할 수 없는 교리논쟁때문에 하나님, 예수님 소리만 들어도 질린다면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

본질은 정말 간단하지만 확실히 알아서 증명하고 그 정수를 완전히 체화하기엔 정말 어려운 수학의 정리 (피타고라스 정리^10) 이런게 있다고 치자. 몇년전에 강남에 있는 모 수학학원 (학원A) 에선 이렇게 광고한다. “피타고라스 정리 끝판왕, 우리 학원에 오시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학원에 다니고 졸업한 많은 사람들이 정말 그 정리를 완전히 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학원에서 쓰는 교재가 가장 정설로 알려져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강북에 있는 모 수학학원 (학원B) 에선 아주 오래전부터 쓰던 교재를 쓰고 있다고 한다. 학원A 측에선 학원 B의 교재는 구시대적인 부분이 있으며 정리를 아주 잘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학원B를 과거에 졸업한 사람들 중에 정말 많은수가 그 정리를 증명해 냈으며 학원B의 선생님은 학원A 선생님 보다 훨씬 더 혹독하고 엄격한 과정을 걸쳐서 선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정리를 직접적으로 가르치지는 않는 전국에 수많은 학원들이 있다. 학원을 안다니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이들 중에서도 이 정리를 이해하거나 자신있게 설명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학원 측에서는 이런 사람들은 정통파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위 이야기는 신앙과 구원을 빚대어 내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여기서 수학정리는 “Christianity“를, 정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체화한 사람들을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영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을 의미하고, 학원A는 개신교 교회이며, 학원B는 천주교 성당이고, 기타 학원은 다른 종교단체들을, 학원 안다니는 사람들은 무종교주의자나 무교회주의자, 그리고 신앙공동체에 의지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 등을 빚댄 표현이다. 비유에 분명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요지는 간단하다. 구원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지 종교 단체의 문제가 아니다. 특정 시대에 따라 어느 종교단체가 다른 종교단체 보다 Christianity의 교리와 예수님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어느 단체를 다니느냐에 따라서 구원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요한건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있느냐이다. 그냥 어느학원에서 수학문제 푸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해서 본인이 그 어려운 정리를 완전히 풀수 있지 않을수 있듯이, 예수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해서 그 종교단체에 속한 모두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고 있는것은 아닐 수 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한국교회도 폐허가 된, 관광지가 되어버린 유럽교회의 전철을 밟고 있는가? 최근 내 정말 친한 지인 중에서,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님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1) 하나님을 떠난 사람 2) 교회를 떠나 성당으로 간사람 3) 다른 교회로 간 사람 이 다 있다는걸 알게됐다. 너무나 이해되는 현상이다. 나역시도 자라면서 교회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던 이유가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던건 그 맹목성, 그 비이성적인 무조건적인 믿음에 대한 집착 들이었다. 그렇게 좁고 편협한 사고방식이 진리라고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냥 정서적으로 멀게 느껴졌다. 제사/동성애 등 자꾸만 싸움을 만드는것, 내 길 만이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 질문이나 토론을 멀리하는 분위기…이런 것들이 계속 나타나고 비쳐진다면 사람들은 계속 떠나리라.

특히나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것, 지금도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너무나 소비자 중심의, 결과 중심의 값싼 (?) 신앙관이다. 예수님을 믿는것도 결국 천당을 가기 위함이고, 중요한건 결과이니, 결국 신앙도 내가 천당을 가느냐 저 사람도 천당을 가느냐의 교리 싸움이 되어버리고, 난 구원받았다는 교만까지 나오게 되는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가. 분명 구원은 갑없이 받는 은혜고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다만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 그 중심엔 complete surrender, 죄인임을 통렬히 느끼는 humble heart가 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humble heart보다는 구원받았다는 자부심, 누구는 구원받았고 누구는 안받았고 하면서 judge하는 모습들, 그 중심에 오만과 편견을 오히려 많이 보지 않는지. 신앙도 수학문제처럼 정답찾기에 집착하는 이런 모습은 정말 너무나 한국적이다. This thing seriously cheapens the precious Gospel.

이런 한국 현대 교회에 상당히 팽배하다고 알려진 ‘구원 관련 교리논쟁’에 대해 이 책 김형석 교수님의 “어떻게 믿을것인가” 은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한다. 작가소개를 잠깐 하자면 살아있는 최고령 작가 중 한분이 아닐까 한다. 1920년 출생, 평양출신으로 어린시절 김일성이 공산주의자로 변모하는걸 가까운데서 지켜보고 해방이후 월남을 위해 고깃배를 타고 탈출하기도한다. 전후 우여곡절을 거쳐 학교 선생님에서 교사로 자리잡고, 한평생 하나님을 모시며 교회에서 말씀을 직접 전하기도 하고 교회 밖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함. 연세대 철학과 교수, 시카고/하버드대 연구교수 역임. 우리 아버지도 전에 생산성본부 시절 강사로 모시기도 하고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는 모르는 분이 없을정도로 명망 높으신 분. 나라의 선생님 같은분이다. 이책 읽고 꽃혀서 이분이 쓰신 다른 책들도 읽어봤는데 다들 주옥같았다.

아래는 주요내용이다. 총 다섯챕터로 되어 있고 각 챕터 소목차에 대한 주요 포인트 요약과 맨 밑에 나의 느낌을 아래에 적어봤다. 바쁘신 분들은 3번 이것인가 저것인가 만 봐도 좋으리라. 특히나 기독교인 (개신교 및 천주교), 기독교에 관심은 있는데 한국교회의 다양한 문제때문에 교회가 멀게 느껴지는 분들께 권한다.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세상 만나사 그렇듯이 비판은 너무 쉽지만 Reconciliation 과 상생으로 나가는 실천은 어렵다는 것이다. 인간사에 다 문제없는 부분이 없는데 교회라고, 한국 교회라고 문제가 없겠는가. 문제만 부각시켜 비판하는 것은 어찌보면 가장 쉬운일이고 하수에 속한다.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자아 비판이 성장과 성숙, 아니 어쩌면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기에 이렇게 또 글을 쓰시고, 나같은 사람도 퍼나르고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목회자와 크리스천은 정말 성실하게 성도를 섬기고 있고 교회를 섬기고 있고 그런 사람들임을 믿는다. 마치 공무원 비판하고 정치인 비판하기는 너무 쉽지만 막상 들어가서 한명한명 만나보면 참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듯이. 이게 값싼 문제제기가 되지 않으려면 결국 화살과 성찰은 나와 우리를 향하고 있어야 하리라.

1. 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

기독교는 우리시대에 무엇을 주고 있는가 – 사회의 가치관에, 경제관에, 사회이념 형성에 도움을 주고 있는가 해를 미치고 있는가. 사회인들의 의식수준에 비해 뒤떨어져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교회와 교회주의 – 지나치게 큰 교회와 지나치게 작은 교회가 많다. 대학들이 무책임하게 정원 늘리고 통폐합되고 있듯이 그런것과 다를것이 없다. 교회가 교회주의 – 즉 각각의 교회 중심으로 운영되고 교회 내에서의 신앙생활만을 강조함 – 에 빠지면 정신운동이나 문화운동은 외면하고 그들만의 리그에 빠지게 된다. 링컨/루즈벨트/워싱턴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정신으로 역사를 만들어간 사람들이다. 교회는 교회주의에서 벗어나 그런 신앙과 정신을 키워주는 모체가 되야 한다 

교회의 책임 – 그리스도의 교훈과 가르침이 모든 사람의 인생관이 되고 가치관이 되어 그 정신과 뜻이 하늘나라 건설과 연결되도록 하는 것. 교인들을 통해 우리 사회에 선하고 의로운 사랑과 봉사의 가치관을 주는것

평신도의 양식 – 지성적이고 건전한 가치관을 지닌 평신도 교인들이 교회간의 통일성을 유지시키고 교회의 사회적인 위상을 바로잡아 갈 수 있으며 교회내 대립보다는 사회를 위한 노력에 더 크게 협력할 수 있다.

교회가 그들만의 리드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걸 백번 동감한다. 교회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링컨/루즈벨트/워싱턴/마틴루터킹 같은 사람을 계속 배출해 내야 한다. 그런 정신을 키워줘야 하고 분명 평신도의 양식이 참 귀하다. 나도 나중에 평신도로서, 우리가 늘 보고 듣는 드라마/넷플릭스쇼/유명한 Podcast나 주옥같은 책에 버금가는, 뛰어넘는 Christianity related 된 컨텐츠를 만들어 보고 싶다.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그게 유투브 비디오가 될수도 있고, 오프라윈프리 토크쇼 같은게 될수도 있지만 그게 뭐든.

2. 어떤 생활이 요청되는가

무교회주의는 가능한가 – 제도권 교회는 필요없다거나 떠나야 한다는 무교회주의는 환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교회 울타리 밖에서 크리스천들의 공동체가 생긴다면 그것또한 하나의 교회이며 그 생성과 활동을 우리는 환영해야 한다.

누가 기독교를 떠나는가 – 교회의 통성기도와 겉만 요란한 신앙생활이 싫어서 떠난 사람, 목회자의 정치적 발언이나 비리에 시험이 들어 떠난 사람,…이들은 1) 교회와 교리, 목회자를 믿고 따르려 했을뿐 예수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함 2)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삶의 영원한 진리가 그리스도와 Christianity 에 있음을 깨닫지 못함

몇 사람의 이야기 – 묵묵히 자기자리에서 하나님 섬기며 겸손하고 부끄러움 아는 삶을 산 사람들 이야기

교회생활과 사회생활 – 교회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신앙이 좋은 것인가. 교회가 사회를 위해 있는 것이지 사회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사회에서 더 유능한 하늘나라의 일꾼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신앙적 진리와 인격적 성장을 위한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

종교와 집단 이기주의 – 종교가 집단 이기주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있다. 개방된 보수주의가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어떤 진보세력보다 건설적이며 말없이 일하는 애국자가 역사를 건설한다.

그리스도인과 정치활동 – 신앙인은 애국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단 정치활동에 신앙과 교회를 끌어들여서도 안되고 교회나 목회자도 정치활동을 자제하고 조심해야 한다. 정치현실보다 더 높은수준의 정치 방향을 제시하거나 그 질서위의 휴머니즘, 신앙적 정서를 주어야지 지나친 정치색은 경계해야 한다. 민중신학의 바람이 분적이 있으나 오래남을 신학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교회와 하나님을 떠나는 것에 우리 크리스천들과 교회는 정말 반성해야 한다. 그 사람들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지 못했기에 일어난 일이리라. 우리 안에 예수님의 빛이 있다면, 그 따뜻함과 그 사랑을 싫어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는 고 이민아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정치활동에 대한 부분도 백분 동감한다. 요즘은 교회는, 신앙 공동체는 절대로 정치적인 ruling power가 되어서도 안되고, 그런 색깔을 강하게 띠어서도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역사적으로 봤을때 교회나 종교가 민감한 정치적 사항에 관여했을때, 항상 부작용이 크게 발생했다. 중세시대, 십자군 전쟁, 면죄부, 그리고 이렇게 거창하게 가지 않더라도 최근 정치적 색을 띠고 특정 정당이나 인물을 지지하며 교회차원에서 기도하는 일부 한국교회들, (그리고 사랑의 교회가 세계 복음화를 외치며 더 세상적인 느낌의 성장을 추구할때, 이명박 전 대통령 등을 위시한 소망교회/순복음교회가 특정 교인의 정치적인 성공과 이런 것에 전 교회적으로 움직였을때 등)…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사람의 믿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바람이지만 그건 결코 국가정책이나 법/제도를 통해서 강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 않을까. 정치는 본질적으로 권력과 연결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법을 만드는 것이니), 권력은 Christianity 의 본질적 속성과 상당히 멀다고 느낀다. 하나님은 낮은데서 역사하시고 어려운자를 돌보시고 세상의 힘이 아닌 희생과 사랑으로 일하신다. 교회가 가진 영향력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신앙인 개인자격이 아닌 교회 전체적으로 특정 정치적인 부분을 지지하고 움직일때, 득보다 실이 많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든다. 동성애를 예로 들자면 지금 교회가 할것은 동성애 입법반대에 열올리는것 보다 동성애자에게 다가가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전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게 아닐까. 동성애반대를 열렬히 외치는 크리스천중 동성애자를 진정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묻고싶다. 종교적 신념에 의해 동성애 반대를 외칠수 있지만 그것이 교회라는 정치세력의 이름하에 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정치적인 판단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낙태, 여성인권, 흑인인권 등등) 복음의 핵심은, 사랑과 섬김과 희생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정치적 판단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판단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신앙 공동체는 정치색을 띠기 보다는 낮은데서 섬기는 그런 사랑과 희생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야하지 않는가…

3. 이것인가 저것인가

신앙과 인간관계 – 기독교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 평등, 하나님 앞에서의 천부인권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오히려 바깥세상보다 더 많은 위계질서나 상하관계가 남아있기도 하다. 성직자를 포함한 모든 크리스천은 인간적 평등을 지키면서도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크리스천 모두는 남보다 아래에 머물며 봉사하는 사람, 섬기기 위해 온 사람이다.

헌금과 교회재정 – 십일조가 신앙생활의 필수조건인것 처럼 이야기하고, 헌금시간을 강조하고 헌금자를 공개하는 건 한국교회가 다시봐야할 부분이다. 천주교에서는 이렇게 십일조를 강조하지 않는다. 1) 교회는 재산 소유나 관리에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2) 기복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는 부분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3) 올바른 경제적 가치관 – 일을 사랑하고 투자의 우선순위나 목적에 있어서 세상에 모범을 보이는 – 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4) 크리스천에게 사치와 낭비는 절대 절대 없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 가이사의 것 (세상것) 과 하나님의 것 (영적인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1) 크리스천이라면 세상의 것 (돈, 경제, 명예, 권력 등) 이 아무리 소중해 보여도 인생의 목적이나 영구의 가치기준으로 삼어서는 안된다. 2) 기독교적 가치관은 어떻게 하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가이다. 다른 모든것은 수단과 방편이다. 인간과 인격은 목적이 될 수 있으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것이다. 3) 인간의 운명과 구원은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다.

제사, 결혼, 가정 – 제사,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 이런 문제에서 흑백론으로 나누고 죄다, 아니다를 구속하기 보다는 어떤 것이 조상을 섬기는 길이고 어떤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인지에 대한 지혜로운 판단이 필요하다. 교회안에 팽배한 우상숭배는 남겨둔채 한두가지 관습을 무조건 죄라고 정죄하는 것은 자가당착이고 지혜롭지 못한 싸움이다. 우리는 인간다운 삶이 이루어지는 가정, 직장, 자유/평등/복지가 성숙된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신앙은 그 후의 선택이며 참다운 종교는 이런 가정, 직장, 사회를 축복해줄 높은 차원의 정신적 지도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성과 자유를 구속하는 신앙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를 넘어 진리를 가르치고 자유를 보장하며 인간성의 회복과 완성을 책임질 수 있는 참다운 신앙이 필요하다.

인간적인, 진실로 인간적인 – 구약의 인물들은 매우 불완전하고 문제 투성이이다. 그런 인간적인 부분을 적나라하게 다루면서도 가장 고귀하고 환희에 찬 위상까지 알려주고 체험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이기에, 죄인에서 성자가 되는 과정을 담고 구원의 과정을 담고 있다. 위선은 절대로 하나님을 가깝게 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되어 있고 그 교리를 어길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교리를 강조하면 다른 종교의 신도나 크리스천 안에서 일어날 사회적 여파와 기타 부작용을 우려하게 된다.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과 개인의 신앙적 관계이지 문화권이나 교리의 문제는 아닐 수 있다.  타 종교의 주원 문제를 크게 언급하는 것은 지혜로운 태도가 못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크리스천의 과제는 타종교를 가진 이웃을 섬기고 이웃과 함께 살며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종교 구원의 문제는 신부나 신학자나 목사가판단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전세계와 인류의 공통된 신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자유, 휴머니즘, 예정론 –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론 사이에서의 갈등, 휴머니즘이 인본주의가 아니냐며 휴머니즘과 신앙사이의 갈등 이런 것들을 본다. 하지만 휴머니즘의 본질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보는 것이기에 기독교와 배치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초 휴머니즘이다. 예정론과 자유의지 또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양립할 수 있다. 예정은 ‘은총의 선택’이다.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속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현재이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한 ‘예정’이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이자 백미이다. 어려운 문제들이지만 꼭 해야하는 이야기들을 거의 다 해주신 느낌이다. 핵심은 ‘교리’ 싸움과 논쟁때문에 ‘복음’을 놓쳐서는 안된다는것. 율법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놓친다면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없다. 제사를 지내느냐, 조상에게 절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예정론 – 모든것이 정해져 있는지 아닌지 이런 부분을 논쟁하느라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면 그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 종교에 구원이 있는지 판단하고 언급하는것에서 떠나 타종교 가진 이웃을 섬기고 그런 이웃과 함께 살며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들의 인격과 인권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사회를 만들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올리는 것이다. 십일조 같은것을 너무나 강조하며 교회가 재산 소유와 관리에 시간과 노력을 바친다면 교회는 신앙인들에게 올바른 재정관을 심어주기는 커녕 타락하고 변질되기 쉽상이다. 아 속이다 시원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4. 몇가지 과제의 재음미

명동성당은 성역인가 – 성지, 성역이 특정 공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 공간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문제의 해결은 지성인들, 말없는 국민의 양식이 내려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죄라고 생각하는가 – 다른 사람의 인격, 생명, 삶을 수단과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은 죄이다. 기독교라고 해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기독교 전파를 위해 이용한다면 이것은 죄이다. 이건 그리스도의 정신과 기독교 이상을 역행하는 길이다.

예수의 재림은 어떻게 가능한가 –  지금 우리 삶속에 와서 머물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 가르침과 약속을 체험하고 누리면 언젠가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성취됨을 믿을 수 있다. 먼저 내 삶에 오셔서 내 삶을 이끌어 주시고 다음에는 역사속에 오셔서 역사를 심판하시면서 그 길을 열어가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채워가신다. 이건 역사적인 사명과 삶에 있어서의 신념과 희망으로 받아들일 문제이다. 논리적인 추리와 인간적인 기대로는 완전히 해명할 수 없다. 믿음은 보지 못한 것들의 실상이라는 바울의 거시적인 해설을 곱씹어보자.

회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이기적인 발상/집단 이기주의, 종교지도자들부터. 건전한 공동체 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미래를 바라보며 대화를 통해 공동선을 추구해 가야 한다. 대화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양심에 교류와 협력을 더해준다. 이게 계속될 때 우리는 회개의 길을 걷게된다. 

기적에 관한 문제 –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 (예수님 공생애의 기록 등. 단 어떤면에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신게 아니라 사랑을 행하신 것이다). 기적이란 무엇인가? 자연법칙을 바꾸는 것인가? 기적은 자연법칙 보다는 생명질서와 연결된다. 병마 등에서 나타나는. 그러나 기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삶의 정신적 질서와의 연결. 정신적 질서위에 임하는 은총을 받아들이면 기적은 평범함을 띠고 나타난다. 은총의 질서에 따라 삶을 살 때 신앙인들은 기적속에 산다. 교회가 쓰는 개념과 신앙고백 자체가 기적에 속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 구원이란 결국 천당에 갔는지 지옥을 갔는지인가? 죽고나서 천국으로 가는 것이며 거기서 영원히 사는것을 가리키는가? 이슬람에서는 이슬람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한다. 천주교/개신교가 싸우기도 하고 개신교도 중에는 천주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천국/지옥을 이렇게 단편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공간적 위상으로 생각하는가? 그건 아니다. 결국 구원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죽음후에 영속할 수 있는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기독교의 구원이란 결국 1. 하나님의 실재와 아버지로서 절대자/초월자 하나님에 대한 신뢰, 신이며 인간이신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주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 2. 성령이라고 부르는 하나남의 능력이 구원의 사실을 섭리하며 은총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이런 사실을 믿고 체험하면 천국이나 지옥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죽음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사랑이 성취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이런 과정에서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그의 나라가 무궁히 지속되고 있는 참되고 영원한 삶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우리는 무엇을 죄라고 생각하는가, 회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이 부분에서 작가의 견해는 신학적이라기 보다는 교훈적이 강하다고 느꼈다. 성경적으로 죄는 하나님과 멀어진 것이며 (헬라어로 하말티아, 과녁에서 빗나간것) 을 의미한다고 배웠고, 회개는 결국 그런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되는 것을 의미할텐데, 작가는 여기서 공동제 의식과 공동선을 많이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적에 관한 문제’, ‘예수의 재림’, 그리고 ‘구원이란 무엇인가’가 더 와닿았다. 기적을 정신적 질서와 연결했을 때 결국 우리 신앙인들은 기적속에서 산다는 말. 그리고 구원이란 결국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뢰이며 성령님의 도움으로 그걸 체험하며 그것에 동참하는 과정이라는 말. 이런 것들이 너무나 와닿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그 사역가운데 거하고 있을때, 믿음으로써 동참하고 있을때 우리는 기적 한가운데 있으며 그것은 이미 구원받은 삶이리라.

5. 바른 신앙생활을 위하여

방언과 신유에 관해 – 부작용이 많을수 있느니 경계해야 한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 크리스천은 성경을 읽어야 한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나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수립해 가는 것이다. 성경 66권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며 근원적으로 이해하는것을 추천 –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부분을 가려읽는것 – 을 한다. 성경을 그냥 역사책으로 보는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한마디한마디에 목을 메서 신약의 구약적인 인습이나 구약의 제사장 옷 짓는것 까지 기억하고 이런 부분을 현대에 요청하고 모든 것에서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구약이 없는 신약만 주장해서도, 신약 없이 구약만 강조하는 것도 옳지 않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 구약 -> 나머지 복음서를 읽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 

묵시록 해석과 사이비 신앙 – 묵시록 해석때문에 사이비로 가는 신앙을 참 많이봤다. 묵시록은 예수 제자중에 가장 오래 생존했던 요한이 유배되어 있을때 하나님의 직접계시를 받아 기록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기독교회와 로마제국의 대립투쟁의 시절에 크리스천들의 인내와 희망과 이루어질 하늘나라에 대한 신념을 굳혀줌. 시대적 특성상 많은 부분이 은유적이기에 구체적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베토벤의 음악 하나하나에, 피카소의 그림 하나하나에 특정 악이나 의미가 있다고 하는것 처럼 잘못이다. 

예배, 부흥회 등에 대하여 – 수많은 예배 방식을 봤다. 예배형식/내용을 봤을 때 1) 개회기도는 너무 길지 않고 의미있는 기도이길 2) 주님의 기도를 반드시 드렸으면 3) 설교에 충실하고 삶의 방향과 지침이 되어주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부흥 운동은 좋은점도 있으나 부작용도 많다. 형식보다는 내용에, 양보다는 질에, 행사보다는 알맹이에 집중하자. 

어떤 기도가 바람직한가 – 주의기도가 표본이다.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보여주기식 기도나 형식적 기도를 경계해야 한다. 무조건 오래하거나 특정 형식으로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리라. 

성전, 교회, 하늘나라 – 예배당/교회는 세가지 책임을 다해야 한다. 1) 복음으로서 진리를 선포 2) 사회와 인류에게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목적을 심어줘야 3) 사회와 역사를 통해 하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존립의 의이가 있다. 그런 교회당이고 예배당이면 된다. 

두가지 충고 – 1. 기도원 – 교단의 재정적 여유로 재벌 연수원처럼 지어진 부분들이 있다면 슷로 자숙하며 규제해야. 교회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신앙집단인 기도원은 문제가 있을수 있다. 2. 목회자들이 신도와 사회지도자들보다 떨어지지 않는 교육과 인간적 성장을 갖춰야 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길 – 왜 십자가와 고난이 필요했는가. 그건 예정되어 있었던, 사명과 같은 것. 그리고 인류에게 평화와 희망을 약속해주는 유일한 길이 었다. 속죄를 위하여. 일반적으로 우리는 더 오래 더 잘살기 위해 애쓰고 있으나, 예루살렘으로 발빨리 가시던 예수님은 더 빨리 더 속히 죽기 위해 고난받기 위해 가시는 것처럼 가셨다. 그 길을 뒤따를 수 있겠는가. 이것이 최상의 인생의 길이며 인류가 성취해야할 하늘나라 건설의 길이다. 

방언과 신유에 대한 부분, 예배 부흥회에 대한 부분, 기도원 등에 대한 부분, 이분이 참 한국교회의 다양한 문제를 많이 보셨구나 이런게 느껴졌다. 아직 그런걸 제대로 경험해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나한테 다 와닿는 내용들은 아니었다. 난 오히려 방언/신유 이런 부분들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생각이 있었는데 (문봉주 대사님의 새벽형 크리스천을 읽고) 이건 좀더 지켜볼 일일까.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 특히 축자영감설은 지나치다는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그래 사실 나도 그게 맞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챕터, 예루살렘으로 가는길은 우리에게 숙제와 도전, 여운을 남긴다. 대속,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고 고난을 받으려 빠르게 가신 예수님의 뒷모습을 우리는 쫓을수 있는가. 우리 신앙인의 삶은 그런 삶이 되야할 것이다…

About sanbaek

늦깍이 크리스천 (follower of Jesus), 우렁각시 민경이 남편, 하루하율하임이 아빠, 둘째 아들, 새누리교회 성도, 한국에서 30년 살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거주중, 스타트업 업계 종사중. 좋아하는 것 - 부부싸움한것 나누기, 하루하율이민경이랑 놀기, 일벌리기 (바람잡기), 독서, 글쓰기, 운동, 여행 예배/기도/찬양, 그리고 가끔씩 춤추기. 만트라 -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One comment

  1. Pingback: Goodbye 2018 and Welcome 2019 | San's diary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

%d bloggers like this: